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 6: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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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 6:1-4)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이 꼭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믿음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고,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을 볼 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믿음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믿음이 큰 사람이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작으면 믿음이 작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 특히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아니고, 그저 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마23: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버렸습니다. 눅11:42절에도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을 저버렸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같은 말씀을 두 가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5:42절을 보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구제를 해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구제한 목적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인정받고, 영광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를 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고,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공치사가 많고, 자기를 과시하는 말을 하고, 명함에도 새까맣게 써서 자기 자랑을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하려고 합니다.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잠11:25절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또한 잠19: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할/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주어진 기회는 미루지 말고 외식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만 보시는 구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할/
  ▶구제는 세 가지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⑴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야 구제할 수 있습니다. ⑵구제를 특권으로 알아야 합니다. ⑶오직 사랑에 마음으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구제할 때, ⑴하늘에 상이 있고, ⑵이 땅에서 축복이 있고 ⑶그 자손들에게도 상급이 내려집니다. /할/ 오늘 본문은 구제에 관한 것입니다. ◀제목 소개!▶

 

  마5장은 그 유명한 주님의 산상보훈으로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삶의 기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기준을 여섯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살인하지 말 것과 ⑵결혼생활의 귀중함을 가르쳐 주시면서 간음문제와 ⑶이혼에 대한 문제 ⑷신실한 언어생활을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⑸어떤 경우에도 복수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⑹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천국 백성들의 도덕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이러한 도덕적인 삶이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적인 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태도와 표준이 무엇입니까? 과연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6:1-18절에서 크게 세 가지로, ⑴우리가 어떻게 구제활동을 할 것인가? ⑵우리가 어떻게 기도생활을 할 것인가? ⑶어떻게 금식생활을 할 것인가? /할/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구제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멘!/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1)

 

  본문은 1-18절까지의 기록된 세 가지 종교생활에 대한 서론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성도의 위대한 의무이며, 경건의 3대 요소입니다. 탈무드에서도 '구제, 기도, 금식'을 유대교 경건의 3대 요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할 때에 그 동기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함이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보다는 이웃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①성도들은 항상 세 가지의 신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⑴항상 자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지금 내 신앙이 바로 가고 있는가를 항상 정립해야 합니다.
  ⑵우리가 어떤 선택 결정을 할 때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⑶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믿/
  본문에 '의를 행할 때'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기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 앞에 두 개의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그들 앞에서' 곧 사람들 앞에서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의를 행하려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의를 행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가 다 문제입니까? 그의 해답이 마5:16절에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 비취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이 우리가 행하는 착한 행실, 곧 우리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병든 자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셨습니다. 요5:30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 모든 일을 '예수님의 원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행하느냐?'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의를 행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의를 행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믿/

 

  ②본문 1절은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⑴'사람에게 보이려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고 알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대는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보라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것은 성경에서는 외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위선 또는 외식의 뜻은 처음에는 웅변가라는 뜻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좀 변해서 배우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참된 자기의 모습을 버리고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합니다. 외식은 구약의 창세기부터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최초의 위선자는 가인입니다. 그는 겉보기에 그럴싸한 거짓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드린 제사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드린 위선적인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거부하셨습니다. 그러자 거짓이 드러난 가인은 그의 분노 때문에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최초의 위선자는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3년 간 예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처럼 위선을 떤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일이 없습니다. 그냥 같이 지내며 따라 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은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당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가 큰 잔가? 누가 강한 잔가? 누가 최고인가?'에 관심이 큽니다. 사람들은 나타난 겉모양에서 평가합니다. 사실 그 이상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사람들 앞에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의하라!' 무엇을 주의하라고 하십니까? 구제하든지, 기도하든지, 금식하든지, 헌금하든지, 봉사하든지, 주의할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려고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⑵참된 신앙은 그 상급이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목사님이 알아주지 않아도 절대로 시험에 들지 말고 섭섭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상급과 모든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본문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꿔 생각해보겠습니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 앞에 했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상을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할/
  다시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우리가 가로챔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의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상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상은 고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을 받는다.'는 뜻은 당시 상거래 전문용어로서 물건을 샀을 때 영수증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어떤 신앙적인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예배이든, 찬양이든, 지도이든, 봉사이든, 주일학교 교사이든, 헌금이든 간에 이미 영수증이 발급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참된 신앙의 행위에서부터 옵니다. /믿/ 바른 예배, 이 자리가 복 받는 자립니다. 바른 헌신, 봉사, 구제, 이것 자체가 복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눈에만 잘 보여도 한자리합니다. /믿/ 하나님께 잘 보이십시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예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 대한의 건아들은 기대 이상으로 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선수들이 상을 받을 때 '과연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니 기자가 그것을 묻기도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고 저들이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의 백 번을 걸친 설교보다도 더 감동적입니다. 양궁의 조윤정양은 그의 어머니가 교회 집사로써 남의 집에 가서 파출부 노릇을 해가면서 그 딸을 키웠는데 거기에서 그런 어름다운 신앙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여자 배드민턴 선수인 황혜영과 정소영양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무릎을 끌었을 때 괜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가슴이 쨍했습니다. /할/

 

  ③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⑴선을 행하라는 것이 의입니다. 선이란 무조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이해가 되던, 안되던, 내게 이익이 오던 안 오던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이고, 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게 여기시는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기쁘게 여기시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의입니다. /할/
  ⑵의라는 단어는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어떤 사건을 심의하면서 이 사람은 옳고, 저 사람은 틀리고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상품백화점 붕괴사건에 책임문제로 전직 구청장은 구속됐는데 현직에 있는 구청장은 죄가 없다고 판결되어 귀가시켰습니다. 법적으로 이 사람은 죄가 있고, 저 사람은 죄가 없다고 판결하는 것이 의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은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죄로, 허물로 죽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구속해 주시고 모든 죄와 사망에 법에서 무죄를 선언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이 칭의는 곧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를 행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잘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생활입니다. /할/
  ⑶관계 개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의입니다. 이것은 바른 믿음의 관계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이웃(세상) 앞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내 자신 앞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④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는 데는 몇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⑴벌받는 것이 두려워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 만큼 복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실 지도 모른다. 내 이 축복 받은 것 빼앗길지도 모른다.' 내키지는 않지만 선을 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봐 불안하기에 억지로 선을 행합니다. .
  ⑵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사람들로부터의 보상입니다. 칭찬 받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내가 선을 행한 것이 알려짐으로 사람들이 알아줄 때 그것이 좋아 선을 행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보상입니다. 쉽게 말해 복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선행에 대한 보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선행에는 분명히 축복이 따릅니다. 그러나 선행을 했기에 복을 받는 것과 복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선행하고 칭찬 받는 것과 칭찬 받기 위해 선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목적 자체가 보상이라면 바른 동기라 할 수 없습니다.
  ⑶공로주의자입니다. 내 것을 준다는 마음이요 내 공로를 쌓아간다는 생각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세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는 것에서 자기 만족을 찾습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좋은 사람이다.' 이것을 즐깁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느끼며 쾌감을 얻습니다. 도덕적 향락주의입니다. 도덕적 선행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선행의 바른 동기라 할 수 없습니다. /아멘!/

 

2. 외식을 버리라! (2)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마23장을 보면, 예수님이 6번씩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명사가 바로 '외식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의 구제가 어떤 점에서 외식적이었는가를 본문에서 세 가지 정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⑴그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⑵그들은 물질의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영광이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⑶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은밀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정반대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회당과 성전의 구석진 곳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제를 위해서 마련된 방입니다. 곧 '침묵자의 방'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그 방은 들어가는 입구가 양쪽에서 나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제를 하는 사람이 구제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입구와 구제를 받는 사람이 구제 받기 위해서 들어오는 입구가 서로 달랐습니다.
  구제를 원하는 사람은 조용히 그곳에 가서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자유롭게 놓고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구제를 받기 원하는 사람도 다른 쪽으로 들어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고나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제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 놓은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곳에서 얼마든지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마23장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할/

 

  ①구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⑴구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고 그 어려운 형편에서 건져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하나님과 같이 베풀고자 하는 외적 행위가 바로 구제입니다.
  구제는 물질로서 남을 도와주는 일인고로 참으로 선한 일입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요,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시112:9절에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잠11: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할/
  하나님 앞에 구제하는 것, 봉사하는 것, 복을 받은 일입니다. 그런데 구제할 때 주의할 것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잘 분별해서 겸손하게 왼손이 하는 것, 오른 손이 모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⑵왜 우리가 구제해야 합니까? 구제는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제를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4남매의 자녀를 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네 자녀들이 서로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굉장히 기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서기 위함입니다. 신문에 나가 위해서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기가 다릅니다.
  ⑶어떻게 구제할 것입니까? '외식하는 자같이 나팔을 불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 성전에 나팔이 13개가 있었는데 구제헌금을 할 때는 그 나팔을 불렀답니다. 나팔을 불 때, 사람들이 구제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구제한다는 것을 알고 '야! 저 사람은 참 선한 사람이구나!'하고 칭찬을 했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실제로 사람들은 조그마한 구제를 하면서 나팔을 불지 않습니까? 아무개는 가정이 아주 형편없이 어려웠는데 내가 도와주어서 살게 되었다고 은연중에 자기를 자랑을 합니다.
  차라리 누구에게 무엇을 주어서 그를 부끄럽게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또 조금 도와주고 전달할 때 사진을 찍고 신문에 내고 합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언제나 작은 구제를 한 사람이 큰일이나 한 것처럼 광내고 소리칩니다. 

  신앙의 외식이란 바로 나팔을 불어 자기를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한 신앙행위란 언제나 그 자체에 이미 축복과 상급이 담겨져 있습니다.
  2절 하반 절에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에서 '이미 받았다.'는 말은 당시 상거래의 전문용어로서 완전히 총액전부를 받고 영수증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더 받은 것이 없이 계산이 다 끝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끝나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할/
  ▶구제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때, 성령 받은 사람들이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구제하고 봉사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업을 감당하라고 주셨습니다.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라고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병원에 안가도 될 만큼 건강을 주신 것은 그 건강을 정욕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 봉사하라고 주셨습니다. /믿/할/

 

  ②구제하는 태도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⑴외식하는 자와 같이 나팔을 불지 말라고 했습니다.
  ⑵성실함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롬12:8절을 보세요!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아멘!/ 아무렇게나 대강, 대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만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⑶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15:10절에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할/ 봉사할 때도, 헌금할 때도, 구제할 때도 우리 마음속에 '아 이거 아까운데' 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즐겨내는 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자는 기뻐하십니다. /아멘!/
  ⑷본문 3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어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문자 적으로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구제할 때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모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생각해보면 '네 것이 아닌 것처럼 주라!'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조지 물러' 목사님의 전기를 읽어보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간증 문이 많이 나옵니다. 조지 물러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하나님! 지금 오천 만원이 필요하오니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표를 주시면서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돈을 보내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명으로 보내오면서 말하기를 '이 돈은 네가 당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내는 것입니다.'라고 한결같이 말하더랍니다.
  그들은 '제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기를 물러 목사가 이런 돈이 필요하니 기쁜 마음으로 주어라'는 음성을 들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다고 말하더랍니다. /할/
  어떤 사람은 헌금한 것, 구제한 것을 꼭 자기가 그것을 확인하고 간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헌금이나 구제를 했으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 그런지 이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쓰여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내가 개척교회를 몇 개 세우고 목사님 양복을 몇 벌 맞추어 주었고, 피아노를 샀고, 자랑을 많이 합니다. 솔직히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우리의 왼손 곁에 서 있는 사람도 모르게 눈치를 채지 않도록 하고 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명예욕에서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제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구제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구제하는 것은 중단할 것입니다.
  ㉢도와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긍휼과 사랑과 자비심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할/

 

3.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여기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시고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처럼 고마운 말은 또 없습니다. 사람들이야 무어라 하든 남들이야 나를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다 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하든 하나님은 아신다.'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세상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최고의 행복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할 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은밀한 모습이 거짓되고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위선을 아시고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아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밀하게 계시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시며 우리의 속마음을 감찰하시고 계십니다. /믿/ 은밀한 중에 봉사하시는 손길, 구제하는 손길, 하나님이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아멘!/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여기 갚으신다는 말씀은 그냥 갚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30, 60, 100배로 갚아주십니다.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또 마10:42절에서 예수님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냉수 한 그릇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보잘 것 없는 것조차도 예수님은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십니다. 오늘 예배 때 뿐 아니라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충성하는 것을 보십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이웃의 영혼을 위해 저녁에도 나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믿/아멘!/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 오늘 희생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손길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보시고 주님이 갚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믿음의 재벌 록펠러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재미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갑부였던 죤 록펠러는 그의 손자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철저한 금전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는 주말이 되면 자기의 어린 손자들을 다 불러모으고 그들 각자에게 25센트씩 용돈을 주었습니다. 물론 손자들은 받은 용돈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두 가지 조건만큼은 지키도록 했습니다.
  하나는 '용돈의 10%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돈의 또 다른 10%는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하라'고 가리켰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주말이 되면 또다시 손자들을 불러모으고 그들 각자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용돈을 어떻게 썼는지 반드시 그에게 보고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일 어떤 손자라도 용돈을 바르게 사용했으면 그는 상으로 5센트를 더 얹어서 그 주에는 30센트를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반대로 만일 손자 가운데 누구라도 용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벌로서 사정없이 5센트를 깎아 20센트만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록펠러는 자기 손자들이 어릴 때부터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자들에게 자기가 준 용돈을 통해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록펠러는 어릴 때부터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나는 장차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리라!'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33세 때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해 순수익만 일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는 30대에 이미 백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 뒤 10년이 지난 43세 때는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를 형성해서 대규모 재벌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그 뒤 또 10년이 지난 53세 때는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꿈대로 그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해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또 밤에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에 먹는 음식이라고는 기껏 비스킷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이 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계속해서 말라갔습니다. 전문의가 그를 진단해 보고서는 1년을 넘기기가 어려우니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이처럼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사실 사람들에게서 인심도 많이 잃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저 물질을 손에 움켜쥐기만 했지, 한 번도 선하게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눈물로 자신의 침상을 적시면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만큼이라도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써보리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움켜쥐었던 손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곳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리버사이드 교회도 그때 세워진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를 비롯해서 곳곳에 5,000여 개의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인 시카고대학을 비롯해서 그는 24개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자선사업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록펠러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 유명한 페니실린 주사약도 그곳에서 지원한 연구비로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그 한 사람만 일평생 동안 자선사업에 5억 달러 이상을 희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다섯 아들들과 또 그의 손자들이 자선사업을 위해서 사용한 금액을 합치면 수 십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손을 펴고 나니까, 그의 건강이 급속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건강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그가 54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건강하게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더욱더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아멘!/ (2011년 8월 7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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