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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화·들·짝] 초월주의의 타락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3. 7. 17:34

[김지석의 화·들·짝] 초월주의의 타락

등록 :2018-03-06 18:16수정 :2018-03-06 19:12

 

타락한 초월주의가 극단주의와 친화성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초월주의에서 동력을 얻어 무력행사로 나가거나, 초월주의 자체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극단적인 방법에 기대게 된다. 이슬람 극단주의에는 양쪽이 섞여 있다.

초월주의 타락의 배경에는 급격하게 진행돼온 세계화가 있다. 기존의 가치와 규범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생기는 불안을 초월적 존재에 기댐으로써 해결하려는 경향이 커져왔다. 지구촌의 탈종교화 흐름이 198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뒤집힌 것은 이런 추세와 맞물린다.

초월주의란 진리와 규범의 근거를 사람 이외의 존재에 두는 모든 사상·사조·철학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람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 전제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초월주의가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만물 가운데 특수하지만 완전함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뿐이다.

초월주의는 종교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곧 초월적 존재의 대표는 신이다. 기독교·불교·이슬람교 등 세계종교는 물론이고 다신교와 고대신앙도 초월적 존재를 상정한다. 유교문화권에서는 하늘이 신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역사에서 보면 종교 바깥에도 초월적 존재가 여럿 있다. 우선 왕이나 성인이 그렇다. 종종 둘 다 지상에서 신(하늘)을 대신하는 이들로 간주되기에, 사람들은 그의 권위에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종교의 힘이 약해진 근대 이후에는 국민국가가 초월적 존재로 부상하며, 이어 이성과 과학도 많은 이에게 초월적 지위를 갖게 된다. 이념이 최고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냉전 종식 이후에는 시장근본주의가 대표적이다.

사람은 수양과 실천을 통해 초월적 존재에 다가갈 수는 있지만, 그와 똑같이 되거나 그의 뜻을 현실에서 완성하지는 못한다. 이런 긴장이 사람의 자기 향상과 인류 역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런 면에서 초월주의는 인간주의와 더불어 인류 역사를 이끌어온 중요한 정신적 자원이다.

하지만 초월주의는 공만큼이나 과가 크다. 지금 세계도 타락한 인간주의에 못잖게 타락한 초월주의로 고통받고 있다.

타락한 초월주의는 우선 독단과 권위주의로 나타난다. 초월자의 권위에 기댄 개인이나 조직이 자신의 판단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경우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많은 권위주의 정권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종교 조직, 이념 단체 등이 이를 시도한다. 흔히 근본주의로 불릴 정도가 되면 이미 위험한 단계에 들어섰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근본주의든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초기에는 개혁을 지향하지만, 세력을 구축한 뒤에는 비판 자체를 봉쇄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초월적 존재의 절대성에 매몰되면 주체 및 그 주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실종될 수 있다. 취약한 주체는 거꾸로 초월주의를 타락시켜 독단과 권위주의를 부추기게 된다. 신정 정치 체제에서 이런 악순환이 잘 드러난다.

타락한 초월주의가 극단주의와 친화성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초월주의에서 동력을 얻어 무력행사로 나가거나, 초월주의 자체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극단적인 방법에 기대게 된다. 냉전 이후 시대의 최대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된 이슬람 극단주의에는 양쪽이 섞여 있다. 반이민을 매개로 서구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극우세력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타락한 인간주의에서 흔한 권력실증주의는 타락한 초월주의에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 권력 장악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 제도의 오랜 전통을 가진 서구에서는 극우세력이 선거 때마다 전술을 바꿔가며 집요하게 세력 확대를 꾀한다.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기독교 우파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손을 잡은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역사에서는 이런 시도가 성공한 사례가 여럿 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위의 세 현상이 모두 목격된다. 아직도 횡행하는 색깔몰이 등 냉전 이데올로기는 독단의 한 전형이며, 이는 종종 극우세력의 과격시위라는 극단주의로 연결된다. 이들에게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은 신과 같은 초월적 위상을 갖는다. 권력실증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보수·진보의 여러 집단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2심 판결에서 이례적으로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 역시 초월주의와 결합한 권력실증주의의 위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금 나타나는 초월주의 타락의 배경에는 지난 수십년 동안 급격하게 진행돼온 세계화가 있다. 기존의 가치와 규범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생기는 불안을 초월적 존재에 기댐으로써 해결하려는 경향이 커져왔다. 19세기부터 꾸준히 이어진 지구촌의 탈종교화 흐름이 1980년대 이후 유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뒤집힌 것은 이런 추세와 맞물린다.

초월주의의 타락은 인간주의의 위기와 함께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 자체와 사람이 만든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스스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을 이끌어줄 존재를 찾는 경향이 강해진다. 하지만 쉽게 초월하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초월을 내세워 오히려 사람의 역량을 위축시키는 시도가 잦아지고 초월주의는 더 타락하게 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초월에 대한 욕구는 불가피하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화하는 것이 초월이라면, 초월적 존재 또는 초월한 상태를 상정함으로써 그것에 다가갈 길이 더 잘 보일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지성을 다해 초월을 꾀할 수 있는 정도만큼 사람은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다.

타락한 형태가 아니라면 초월주의는 대부분 인간주의적인 본성을 갖는다. 곧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뒤에 초월을 꾀한다면 인간주의와 초월주의는 충분히 양립한다. 역사의 오랜 시험을 거친 종교의 경우 특히 그렇다. 오로지 정신적 존재만이 다가갈 수 있는 한계와 고난을 통과한 뒤에 신과 만난다면, 그 종교는 초월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주의적이다.

초월주의와 인간주의의 수준을 함께 높일 수 있는 특효약이 있다. 민주주의의 심화가 그것이다. 잘 짜인 민주주의는 사람의 가치와 역량을 높여주면서 정신적 초월도 뒷받침한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하다. 하지만 다수가 참여하는 민주화 투쟁이 항상 이뤄질 수는 없다. 일상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크고 작은 공동체를 통해 자신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그 방안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한 예로, 진화인류학자인 데이비드 슬론 윌슨 미국 빙엄턴 뉴욕주립대 교수는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에 이르는 방식으로 의미를 찾는 한에서 영적이거나 영혼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태도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결합한다. 이는 세계의 어떤 현상에 관한 이론을 수립하려 한다면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탐구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말한다. 곧, 사람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실적 지식에 근거해 행동하고자 성실하게 노력함으로써 도덕적일 수 있다.

이 방안을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간단한 규범으로 압축할 수 있다. 다수가 이 규범을 지키는 집단은 초월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주의의 왜곡을 피해 공동체적 삶을 강화할 수 있으며, 이는 거꾸로 건강한 초월주의와 인간주의의 발전을 뒷받침한다. “첫째, 실증적 증거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치가 있는 상대로서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의 기반을 약화하는 것은 당신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일이다.”(<네이버후드 프로젝트>)

그러고 나서도 초월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더 키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런 시도는 마음만 있으면 시간과 장소에 무관하게 누구나 할 수 있다. 지구상에 출현한 모든 문명이 이와 관련한 갖가지 자원을 갖고 있다. 특히 지구에서 출현한 모든 생명체의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자연은 거의 무료로 활용할 수 있는 초월의 교과서다. 생명의 유한함까지 넘어서는 초월의 가능성이 자연에 있다.

세계는 지금 근대화가 이룬 성취와 실패를 넘어서서 지속 가능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있다.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 못잖게 좋은 사상·사고·철학과 책임 있는 실천이 필요하다. 분단국이면서 선진국과 개도국,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교차점에 있는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4892.html?_fr=mt0#csidx9b97d5dc90f56358033ea8a4b47c21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