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격동의 시대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당연한 것이었던 규범과 권력의 민낯 앞에서 몇몇은 세상을 바꾸자며 앞장서기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바짝 몸을 웅크리기도 한다. 특히 그 권력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앞장선 자들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거나, 세상이 그리 쉽게 변하냐며 냉소하기도 한다. 하긴 역사를 반추해보면 혁명은 언제나 반혁명의 역풍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자신을 내던졌던 용기 있는 이들의 삶은 너무나 쉽게 사그라졌다.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는 20세기 초반 ‘역사’를 살아낸 여성 혁명가 3인의 삶을 그려낸다. “‘소설’이 ‘역사’를 배반” 않도록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은 실존 인물인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처절했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들은 식민주의와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웠던 뜨거운 여성들이었다.그녀들은 여성의 위치에서 당연시되어온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다. 사랑, 결혼, 가족 등 여성을 옭아맨 모든 사회 통념과 규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자신들도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고 자각했던 이들은 함께 혁명을 꿈꿨던 동지들에게도 낯선 존재였다. 식민타파와 계급투쟁이라는 시대의 목표는 여성의 위치에서 한층 더 복잡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데올로기와 국가 건설이라는 당위 앞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20세기, 그 역사의 장에서 그녀들의 외침은 소외되었으며,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들은 그렇게 비극적으로 사라져버렸다.10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여성 혁명가들이 등장한 듯하다. 그동안 세상이 수십번도 더 바뀌었건만, 그들의 삶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표면적으로는 사회 곳곳에 여성의 약진이 확인되지만, 그 이면에는 힘과 권력을 앞세운 폭력이 일상이다. 동등한 인격체를 ‘정복’할 수 있다는 야만이 진보를 부르짖는 정치인,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다는 예술가, 부패한 재벌 총수, 그리고 일베에서 여성혐오를 일삼는 이들이 공유하는 정서라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계급, 이념, 영역 등을 뛰어넘어 작동하는 거대한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이며 뿌리 깊은지 증언한다.이런 맥락에서 성차별적 권력은 단순히 몇몇을 본보기로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가부장제는 성과 젠더를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의 삶을 장악해왔기 때문이다. 누구도 몸과 마음에 배태된 가부장적 폭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만큼 지금의 ‘미투’ 운동은 단순히 몇몇의 범죄를 폭로하는 것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몸속 깊숙이 각인된 성차별적 습관과 야만성이 똬리를 튼 의식 저편까지도 모조리 바꿔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성찰과 변혁의 기획으로 확장되어야 한다.지난 세기 여성해방을 열망했던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가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으로 지워졌던 반면에, 지금 여기의 수많은 ‘서지현’, ‘김지은’ 들의 처절한 외침은 사회의 근간이 되어온 모든 힘을 압도하고 있다. ‘공작정치’라는 구태의 프레임이나 무고와 ‘펜스룰’을 들먹거리는 물타기로 이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촛불을 거치면서 말할 수 없었던 이들이 되찾은 목소리는 결코 제도권 정치에 구속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으며, 이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