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법정 다큐-수인번호 503
17. 아수라장 된 박근혜 구형 공판
17. 아수라장 된 박근혜 구형 공판
‘국정농단’ 사건 관련 결심공판이 열린 지난달 27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 중인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 박 전 대통령은 이날도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연합뉴스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억지로 대통령을 가둬놓고!”
지난달 27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이 모처럼 부산했다. 한 노년 여성은 방청권을 패용해달라는 법정 경위의 요청에 “건방지다”며 역정을 냈고, “억울한 대통령”이란 소리도 드문드문 터져 나왔다. 개학을 맞아 교복 차림을 한 학생들도 잰걸음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다녔다. 평소엔 경위 서너 명이 법정 전체를 책임졌지만, 이날은 열댓 명이 법정 앞뒤 양옆을 가득 채우며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오후 2시10분, 법정 경위가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의 입정을 알리자 수런거림이 비로소 잦아들었다.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
박근혜(66) 전 대통령의 1심 마지막 재판이 시작됐다.
“빨간빛 말고 빨간색만 봐달라”
결심공판은 피고인 신문과 더불어 형사재판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선고를 앞두고 검찰과 변호인이 최종적으로 맞붙는다. 재판 내내 변호인의 입을 통해 말하던 피고인이 눈물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재판은 예외였다. 박 전 대통령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16일 ‘재판 보이콧’ 선언 이후 피고인 없이 진행되는 궐석재판이 25차례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의 불출석을 알리는 일은 익숙한 과정이 됐다.
“오후에는 최종 변론절차를 진행하도록 돼 있습니다. 검찰 의견 진술, 구형 이어서 변호인들 최종변론을 듣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피고인 최후진술을 듣는 것으로 순서가 이어지는데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소송관계인 출석 확인하겠습니다.”
전준철 검사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검찰 논고문 곳곳에는 ‘청년 실업 문제’, ‘취업난’, ‘정경유착’, ‘문화·예술계 양극화 심화’, ‘온 국민을 기만’, ‘제왕적 권한’ 등의 표현이 굵은 글씨체로 강조돼 있었다.
“피고인의 행위는 기업과 사회의 진정한 상생을 위한 기업의 자율적인 경영 활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왜곡하는 것으로서 정작 계약을 체결할 충분한 자질을 갖춘 중소기업과 반드시 기업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소외 계층을 희생시켰고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경제 한파와 고령화로 인한 청년 실업 문제와 취업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과 그들의 부모들로 하여금 뼛속 깊이 좌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였으며 우리 사회가 불법과 반칙이 통하는 사회,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만이 성공하고 군림할 수 있는 사회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고, 정부 정책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여 국가 발전을 위한 토대이자 소중한 사회적 자본인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신뢰’라는 가치를 무너뜨렸습니다. (중략)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농단한 최종 책임자인 피고인에게 징역 30년 및 뇌물에 해당하는 592억2800만원의 2배에서 5배 범위 내인 벌금 1185억원을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나왔고 일부 방청객은 법정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이어 변호인단의 ‘마라톤 변론’이 뒤따랐다. 조현권(63·사법연수원 15기), 남현우(47·34기), 강철구(48·37기), 김혜영(40·37기), 박승길(44·39기)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이었다. 국선변호인은 법원별로 정해지기 때문에, 항소심에 올라가면 다른 변호인이 선정된다.
첫번째 주자 박승길 변호사의 변론은 ‘사진전’을 방불케 했다. 그는 국정농단 사태 전후를 비교하는 사진과 여러 비유를 동원해 혐의를 부인했다. 오후 2시40분께, 박 변호사가 첫 번째 사진을 띄웠다. 2016년 12월5일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재벌) 총수 중에 촛불집회에 나간 분 있으면 손들어 보라”는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문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이승철 부회장이 손을 번쩍 든 모습이다. ‘도슨트’ 박 변호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가제는 ‘전경련의 이중성’.
박근혜 피고인 없는 최후변론
박승길 국선변호인이 말했다
“무지개 속 빨간색 구별 어렵듯
실체적 진실은 명확하지 않아”
박승길 국선변호인이 말했다
“무지개 속 빨간색 구별 어렵듯
실체적 진실은 명확하지 않아”
“전경련은 피해자 아닌 협력자
여론 휘둘리지 않는 판단 해달라”
검찰의 징역 30년 구형 나오자
방청석에선 곡소리…내달 6일 선고
여론 휘둘리지 않는 판단 해달라”
검찰의 징역 30년 구형 나오자
방청석에선 곡소리…내달 6일 선고
“하지만 이런 사진도 있습니다. 전경련에서 주최한 광복 70주년 페스티벌 사진전 대상 사진입니다. ‘국민과 함께 해군이 지키는 독도’라는 작품입니다. 이 사진은 전경련 로비에 전시됐습니다. 우수상으로는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는 작품도 선정됐습니다. 이 사건 이후 촛불집회에 다녀왔다고 손을 드는 전경련 부회장과 이 사건 이전 전경련에서 태극기 사진을 게시한 전경련. 이 사건 이전에는 정권 코드에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입장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한때는 센터를 개소하고 함께 박수치는 사이였지만 정권이 지나고 나서는 그 센터를 해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다 억지로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다 억지로 했다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전경련은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 당시 기업들에 출연금을 분배하는 실무를 맡았다. ‘국정농단’ 의혹이 터지자 전경련 관계자들은 입 모아 청와대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전경련이나 출연 기업은 피해자가 아니라 ‘동반자’였다고 강조했다.
10여분 뒤, 법정 모니터에 두 번째 사진이 떴다. 이번엔 파란 하늘에 뜬 무지개였다.
“통상 무지개를 그릴 때 색깔을 구분해서 그립니다. 하지만 실제 무지개를 보면 그 경계가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빨간색을 처벌하기로 약속했다고 합시다. 그림에서는 빨간색 경계를 찾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무지개를 보면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 정말 빨강만 처벌해야 합니다. 여기(경계지점)까지 빨강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편하게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실제 무지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빨강에 머물러야 합니다.”
비유의 종착점을 못 찾은 방청객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박 변호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 사건에서 협박이 분명했고, 두려워서 (출연) 의사결정이 이뤄진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일의 실체는 강요도, 뇌물도 아니라고 봅니다. 민관협력, 나쁘게 얘기하면 정경유착의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경유착이 일어났다고 해도 강요나 뇌물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해당해야 충격에 빠진 사람들 마음이 편하겠지만 이는 ‘편한 진실’일 뿐입니다. 실체적 진실은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 피고인이 강요로 처벌받아야 적폐가 청산되고 사회가 발전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전경련, 기업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피고인이 왜 그래야 합니까?”
박 변호사는 20분 만에 울먹이며 말을 마쳤다. 바통을 넘겨받은 김혜영 변호사는 ‘속사포 변론’을 펼쳤다. 김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최서원)씨에게 이권을 주도록 개별 기업을 압박했다는 혐의(직권남용·강요) 관련 변론을 맡았다. 공범으로 기소돼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최순실씨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피고인은 미혼이고 부양할 자식도 없고, 위법 행위를 하면서 공모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 피고인에게 경제적 이익이 귀속된 사실도 없습니다. 공소사실에는 무수한 고난을 딛고 당선된 피고인이 최서원과 공모해 대통령의 명예를 한순간에 저버리는 위법행위를 했다고 돼 있습니다. 최서원이 대통령과 오랜 시간 알아왔기 때문에 국정기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과 한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시간 노력을 쏟아왔던 피고인이 단순히 최서원의 이익을 위해 명예와 가치를 한순간에 저버릴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오후 3시50분, 김 변호사 변론을 끝으로 재판이 15분간 휴정하자 일부 방청객은 검찰 구형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대통령이 한 게 왜 다 범죄가 되는 거지”, “다 범죄자지 범죄자”, “30년이라니, 30년이 뭐야!”
각종 포털사이트에는 ‘박근혜 나이’가 ‘실시간 검색어’로 등장했다.
오후 6시30분, 변호인단 중 선임인 조현권 변호사가 장장 4시간의 변론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은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고 형사재판까지 간 역사적이고 중대한 재판입니다. 피고인이 처벌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고 반대로 정치적 판단이라는 여론, 이미 앞서 많은 판결이 있어서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여론도 있습니다. 훗날 역사에서 평가할 때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과연 현명한 판단을 했구나’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앞서 판결과 관계없이 세세한 부분까지 면밀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여론에 휘둘리지 않은 현명한 판단’은 내려질 수 있을까.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수사와 재판에서의 태도는 형을 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줄곧 혐의를 부인하고 국회나 검찰 출석 요구에 불응한 국정농단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여기에 사법절차를 농락했다는 점까지 더해질 가능성이 크다.
최순실씨의 경우, 재판부가 유리한 양형 사유로 꼽은 부분은 24년간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는 점, 롯데 뇌물을 반환했고 에스케이(SK) 뇌물을 실제 받지는 않았다는 점 정도에 그친다. 다음달 6일 나올 박 전 대통령 판결에서 ‘유리한 양형 이유’로 언급될 부분은 무엇일까.
“피고인은 형사처벌 전력이 없고….”
지난해 10월 이후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마지막 결심공판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달 6일 선고공판이 열린다. 공동취재사진
최선은 다하겠지만…
지난해 11월27일 처음 등판하며 기자들에게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국선변호인들은 “아무튼 저희는 최선을 다했다”면서 마지막 변론을 끝냈다. 재판 중간에 투입돼 재판을 넘겨받은 ‘국정농단’ 사건 변호인들은 그나마 사정이 양호한 편이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재판과 ‘새누리당 공천개입’ 재판의 국선변호인들은 피고인을 못 만나 재판 초장부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준비절차에서 혐의를 인정하는지,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동의하는지, 어떤 증거를 신청할 예정인지 여부가 정리돼야 재판부가 심리 계획을 세울 수 있는데, 두 재판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접견조차 거부하고 있어 이런 내용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특활비 상납’ 재판을 맡은 정원일(64·31기) 변호사는 두 차례 재판 공전 끝에 혐의를 모두 부인하는 것으로 결론냈다.
“직전 대통령인 피고인과 접견이 이뤄지지 않아서, 혐의를 인정하는 것은 변호인의 권한상 종속적 대리권에 속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건 종속대리권에 반한 것으로 허용될 수 없고, 형사소송법 36조에 규정된 독립대리권에 따라 부인 다투는 경우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독립대리권에 근거해 공소사실을 전부 부인합니다.”
형사32부(재판장 성창호)는 “피고인의 기본적 입장이 명확하게 정리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절차 진행상 쉽지 않다. 피고인이 혐의도 부인하고, 증거관계도 불리할 수 있는 부분은 부동의나 부적격 의견이라는 것을 전제로 향후 재판을 진행하는 게 불가피하다”며 신문이 예상되는 증인을 31명으로 제시했다. 진술증거는 진술자가 재판에 나와 직접 확인해줘야 하기 때문에, 이 증인들이 모두 소환될 가능성이 있다. 국선변호인들이 별도로 증인을 신청할 수도 있다.
이 재판부는 애초 오는 27일 네 번째 준비절차 날짜를 잡았지만, 다른 국정원 사건에 비해 속도가 뒤처진다는 이유로 16일로 일정을 당겼다. 이에 따라 정식재판도 조만간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 재판도 궐석재판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입을 다문 박 전 대통령과 달리, 이미 1심 선고를 받은 최순실씨는 바지런히 항소심 대응에 나섰다. 최씨 항소심은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조영철)에 배당됐다. 조 부장판사는 앞서 이화여대 ‘학사비리’ 사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을 맡은 바 있다. 최씨는 조 부장판사가 ‘학사비리’ 판결에서 편견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재판장을 바꿔달라는 기피 신청을 냈다. 그는 당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