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여성들의 반격…“성폭행을 말하라”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3. 9. 17:49

여성들의 반격…“성폭행을 말하라”

등록 :2018-03-09 10:03수정 :2018-03-09 10:09

 

미국 여성주의 활동가 브라운밀러
페미니즘 고전 43년 만에 출간
성폭행의 역사·정의 해체 재구성
“성폭행엔 좌우, 인종 구분 없다”

2008년 콩고민주공화국 북부 키부의 주도인 고마에 있는 한 병원에서 당시 18살인 한 소녀가 진통제 주사를 맞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르완다해방민주세력군(FDLR) 소속 군인 3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사진 정은진
2008년 콩고민주공화국 북부 키부의 주도인 고마에 있는 한 병원에서 당시 18살인 한 소녀가 진통제 주사를 맞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르완다해방민주세력군(FDLR) 소속 군인 3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사진 정은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오월의봄·3만4000원

지금 우리 사회는 혁명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고백 이후로 몰아치기 시작한 미투 운동의 물결이 한달 남짓한 시간 만에 사회 곳곳에서 성폭력을 저질러온 권력들을 연이어 무너뜨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던 여성들은 그 두려움을 남성들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어떤 (성폭력을 저지른) 남성도, 어디에 있든지, 누구든지 간에 안전하지 못하다.

미투 운동을 타오르게 하는 오래 준비된 땔감 중엔 분명 책이 있다. 출판계에선 수년 전부터 페미니즘 서적 출간 붐을 일으켰다. 그렇게 뒤늦게 상륙한 책들이 1991년 출간 사반세기 만에 지난해 말 국내에 번역된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였고, 이번엔 수전 브라운밀러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1975년)가 43년 만에 한국의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1975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출간 직후의 수전 브라운밀러. 사진 AP/수전 블라미스, 오월의봄 제공
1975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출간 직후의 수전 브라운밀러. 사진 AP/수전 블라미스, 오월의봄 제공

지은이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뒤 기자로 일하다 흑인 민권운동을 경험한 뒤 급진 페미니스트 운동에 가담한 활동가였다. 그가 35살이던 1970년, 여성들이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자리에 참여했다가 “계시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는 자신이 성폭행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 성폭행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4년간 도서관들을 수없이 드나들며 성폭행 관련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인터뷰해, 성폭행의 뿌리 깊은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해부한, 한국어판으로 600여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을 내놨다.

지은이는 남녀의 다른 성기 구조가 “강간 이데올로기를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고 말한다. “가장 초기의 남성연대는 무리지어 사냥감을 찾아다니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윤간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고대 바빌론법과 유대의 율법은 성폭행을 남성이 남성의 소유물(여성)에게 저지르는 재산상의 범죄로 봤고,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까지도 발견된다. 여성이 당한 성폭행은 곧 그 여성을 소유한 국가, 민족, 가문, 인종, 남성이 당한 것이며, 그러므로 가해 집단의 소유물인 여성에게 되갚아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인류 전 역사에 걸쳐 전쟁과 폭동, 인종청소, 혁명, 독립, 노예제 등 다양한 모습의 사회 혼란상황에서 예외 없이 성폭행이 이뤄진 길고 어두운 역사를 들여다 본다. 여기에선 점령군과 독립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백인과 흑인과 황인종이라는 다양한 구분들이 무의미하다. 오직 남성과 여성만이 있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독일 나치군만이 아니라 연합군의 소련군도 모두 거대한 규모의 성폭행 가해자였다. 여기에 나란히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벌인 ‘난징 대학살’ 당시 어마어마한 성폭행도 자행됐다는 점도 드러낸다. 콩고의 흑인여성들은 점령국 벨기에 남성들에게 성폭행 당했고, 1960년 7월 콩고가 독립하자 콩고의 남성들은 전역에서 벨기에 백인여성들을 성폭행했다. 반전운동가들은 베트남전쟁을 “반제국주의”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비판했지만, 베트남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베트남 여성 집단강간·살해는 독립적인 주제로 여기지 않고 무관심했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 남성으로서 성공을 보증하는 징표였듯, 여성을 보호하는 일 역시 오랫동안 남성으로서 자부심을 보증하는 징표였다. 그런데 점령군이 벌인 강간은 패배한 쪽 남성의 힘과 소유권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파괴한다. 강간을 통해 여성의 몸은 상징적인 전쟁터가 되며, 승리자가 개선식을 벌이는 광장이 된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이 1637년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수전 브라운밀러는 ”사비니 여성들이 강간당한 사건은 전시에 여자를 약탈한 수많은 사례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데, 로마 건국을 추동한 사건으로 회자되면서 여러 세기에 걸쳐 예술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사로잡힌 사비니 여자들을 육감적이고 나긋나긋하며 즐거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이 1637년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수전 브라운밀러는 ”사비니 여성들이 강간당한 사건은 전시에 여자를 약탈한 수많은 사례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데, 로마 건국을 추동한 사건으로 회자되면서 여러 세기에 걸쳐 예술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사로잡힌 사비니 여자들을 육감적이고 나긋나긋하며 즐거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읽기에도 고통스러운 강간의 역사를 지은이가 쫓아가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남성들의 손에 쥐여진 법제도와 문화, 미디어에 의해 성폭행의 정의는 매우 협소하게 내려지거나, 아니면 성폭행 자체가 부인됐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은이가 책을 쓸 당시에도 법정의 판사나 배심원, 언론은 성폭행 피해 여성이 이전에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는 않았는지, 성폭행을 당하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를 했는지 추궁했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란 개념 때문에 부부 간 성폭행은 인정되지도 않았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강간당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다’는 신화는 여러 문학 작품의 작가나 프로이트 같은 학자들의 이론(‘여성들에겐 고통에 대한 욕정이 있다’)을 통해 강화됐다.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가 그 사악한 재치를 발휘해 “움직이는 바늘에 실을 꿸 수는 없다”라고 말했던 것이 좋은 예다.

최근 피해자가 행태를 폭로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쪽에서 처음엔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고, 강압이나 폭력은 없었다”고 해명했던 것도 이런 오랜 신화의 힘에 기댄 것이었다. 지은이는 이렇게 반박한다. “강도와 폭행의 피해자는 저항 여부와 동의 여부, 의지를 꺾을 만큼 충분히 힘으로 강요당하거나 위협당했는지 여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은 저항했다는 것,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 압도적인 힘과 공포 때문에 의지가 꺾였다는 것을 피해자 자신이 증명해야만 한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17년 미얀마 군인들이 로힝야족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하며 어린아이들까지 살해했다는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으며 국제사회의 대응을 촉구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누리집 갈무리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17년 미얀마 군인들이 로힝야족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하며 어린아이들까지 살해했다는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으며 국제사회의 대응을 촉구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누리집 갈무리



그렇기에 성폭행의 역사와 정의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지은이가 떠맡은 과제였다. 지은이는 성폭행을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 (…) 한 여성이 어떤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남자가 그녀의 의사에 반해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린다. 성폭행에 대한 법적 판단이나 문화적 논의 모든 것이 이 정의에 기반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1970년대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이 일어난 미국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성폭행 피해를 이야기하는 모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여성운동은 강간을 수치스러워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드러내 말할 수 있는 범죄로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문명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전쟁에서 복수의 첫방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2018년 한국에서도 여성들이 함께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의 한 고교 강당에서 여성들이 성폭행의 경험을 말하는 모임은 35살 한 여성의 삶을 뒤흔들었고, 그는 (뉴욕 공립 도서관이 선정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책 100권’으로 꼽히는 대작을 써냈다. 다른 여성들의 성폭행 피해 경험을 들은 수많은 한국의 여성들은 어떤 결과물을 창조해낼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35342.html#csidx3a545b7bcd0cdeabc278c97fbfe8fa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