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인간은 다른 인간의 몸에서 만들어져 태어난다. 탯줄을 통해 그 몸에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가 종국에는 최종적 독립체인 개인이 되어 그 몸과 나란히 존재하는 몸이 된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독립체가 된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최초의 이 관계를 따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벌거벗은 나약한 몸을 서로 기대고 부비며 존재를 확인하고 위로한다. 이 또한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일을 결코 경이롭게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정신적 사고만이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한다고 믿었던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가 있다. 몸을 믿지 않은 데카르트는 감각 또한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우월하고 가치있는 것은 정신이며 몸은 그런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몸이 몸을 만드는 경이, 몸이 몸을 만나 만드는 경이를 믿지 않는 이들일수록 몸의 지위를 폄하한다. 자신의 몸조차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믿는 이들은 다른 사람의 몸쯤은 막 써도 되는 그릇이라 여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이들이 되레 다른 사람의 몸에 철저히 의존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몸을 움직여 생산하는 노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도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남성은 살림을 하여 생활을 유지시키는 노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인간 몸을 만들어내는 인간생산 노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존재하면서도 신은 자궁을 가지지 않은 남성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몸을 함부로 여기는 생각은 도처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결정적 순간에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몸을 간절히 원하게 되는 취약한 순간이 그때이다. 몸을 기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맨살의 온기를 느끼고 싶고 그보다 더 속속들이 서로를 향해 몸을 열고 싶어지게 되는 순간 말이다. 몸을 함부로 여기고 몸을 그저 그릇으로 여겨왔던 그릇된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몸을 그야말로 그릇으로 전락시키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
많은 남성들은 데카르트의 후예들이다. 마르크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기실 데카르트의 후예들이다. 몸을, 다른 사람의 몸을, 특히 여성의 몸을 함부로 여긴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렇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이연)에서 이런 데카르트의 후예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녀는 몸은 결코 정신과 분리될 수 없고 정신은 결코 몸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찬찬히 보여준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다. 안인가 싶을 때 그것은 어느새 밖이고 밖인가 싶을 때 어느새 안을 가리킨다. 안이 곧 밖이 되고 밖이 곧 안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은 곧 정신이 되고 정신은 곧 몸이 된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몸과 정신을 만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몸과 정신을 만질 때 우리의 몸과 정신 또한 그 사람에 의해 만져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몸을 그릇처럼 함부로 만질 때 우리는 우리를 함부로 만져지는 그릇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어떤 경이도 환희도 없다. 타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상황이 바로 타락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는 이들이 천지다. 그들이 그것을 모르는 까닭은 그들이 다만 무지해서가 아니다. 몸에 대해 무지해도 될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무지할 따름이다. 권력자의 적극적 무지에 기대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몰랐다’, ‘그런 의도는 내게 없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알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쓰는 이들은 다른 이들이다. 그들이 그릇처럼 만진 이들, 만져짐으로써 만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생존자라고도 부른다. 그들이 지금 말하고 있다. ‘내가 곧 증거다’라고. #Metoo #Withyou 몸의 경이와 환희를 되찾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