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8강)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자! (롬 14:13-2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9

《제48강》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자! (롬 14:13-23)

 

  세상에는 그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모호한 행동이 많이 있습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모호한 문제를 놓고 '아디아포라'라고 불렀습니다. 즉 '구별하기 힘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떤 손잡이를 집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령 반나체의 여인의 그림을 한 폭 놓고 한 쪽에서는 예술품이 뛰어난 걸작품으로 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외설적인 저질 상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먹는 문제와 날의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1-12절에서 어떤 특별한 교리 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마음에 거리끼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었습니다. 특히 먹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채소만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당시 우상의 제물로 놓았던 고기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것을 보고 마음속에 거리껴서 저 사람이 저렇게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어찌 우상에 놓인 재물을 먹을 수 있느냐 하면서 고집하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는 것도 먹지 않는 것도 다 주를 위해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날을 지키는 것도 주를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위해 내가 먹는다면 그 먹는 것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 주님을 위해 먹지 않는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자기의 공로를 위하여 날을 지킨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라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모든 날을 주일처럼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산다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
  바울은 권면하기를 "서로 판단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지 못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또 먹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서로 받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아주 단호한 표현을 썼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하라고 했습니다. /믿/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의 연속인데, 1-12절까지는 주로 믿음이 약한 자들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교훈을 했지만, 본문 13절부터는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이 장성한 자는 자기 좋은 대로만 살지 말고 믿음이 약한 형제가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그를 위해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믿/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살고 믿음을 쫓아 살아야 합니다. ◀제목 소개!▶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본문은 1-12절의 권면을 다시 요약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 권면은 믿음이 약한 자, 강한 자 둘 다 주어진 교훈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22:35-39절에 보면, 어느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믿는 이웃을 위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요,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서로 통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일4:20절에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서로 판단하지 말고" 우리는 4절에서 또 10절에서 형제를 함부로 판단 못할 이유를 배웠습니다.
  ▶4절을 보자!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우리에게는 형제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또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왜 우리가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까? 나 자신이 판단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를 판단하면 나도 판단을 받습니다.
  주님은 마7:1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8:15절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판단에 앞서 사랑으로 덮어주고 감싸주는 귀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부부가 한 가정에 살면서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 줄 때 더욱 사랑이 깊어 갈 줄 믿습니다. /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여기서 '부딪힐 것이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칠 것'은 '범죄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고 범죄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형제가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하고 은혜 받도록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상처를 받아 그냥 있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양보해 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길가에 놓여 있는 돌부리나 나무토막 때문에 넘어졌다고 해서 야단을 치거나 핀잔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히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미리 치워 넘어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할/
  옛날 유명한 교부이신 '크리스소톰'과 '에피파뉴스' 이 두 사람이 사소한 문제로 서로 감정이 격하여 분을 내고 혈기를 부렸다고 합니다. '에피파뉴스'는 '크리스소톰'을 향하여 "네까짓 것이 감독 직을 계속 하는가 보자!"고 흥분하여 말했고, '크리스소톰'은 맞받아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객사하고 말 거야!"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툼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크리스소톰'은 감독직을 빼앗기고 정배 가서 죽었으며, '에피파뉴스'는 '구브로'로 가는 노상에서 정말 객사하고 말았답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바울은 갈5:15절에서 당부하기를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14절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스스로 속된 것이 없고 속되게 여기는 자에게만 속되다'는 이 말이 바울의 윤리학의 중요한 명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먹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람이 과용하거나 악용했을 때 나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음식 자체를 속되다고 생각한다면 객관적으로 그것 자체가 속된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그 생각이 속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음식이 신앙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이 되면 먹지 않으면 됩니다.
  또 하나님이 특별히 명령하거나 금하지 않은 이상은 자기 양심에 따라서 먹어도 속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바울은 '예수 충만,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마15:10-20절에서, 또 막7:15-23절을 요약해 보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인데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 창1:3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원리를 기초에 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15절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본문은 먹는 식물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보다도 사랑을 더 강조한 메시지입니다. 한마디로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이 중심이 돼야지 식물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요13:35절에서 우리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된 형제들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먹는 음식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따지는 사람처럼 치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판단하지 말아야 되는데 사람이 말보다는 실천이 더 어렵습니다. 신앙은 행함이 더 우선입니다.

  ▶그런데 왜 그 행함이 그 실천이 더 어렵습니까?
  ①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자기를 포기하는 삶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②희생된 삶은 주객이 전도된 삶입니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의 삶의 주체는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모든 가치 기준도, 판단도, 자기 즉 나에게 맞춥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고, 반대로 내가 좋으면 다른 사람이 다 싫어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해합니다. 양보합니다. 배려합니다. 남을 위해 생각합니다.
  여러분!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성숙된 인격입니다. 이런 인격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인격'이라고 합니다. /할/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무슨 말씀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16: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사49:5절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할/ 우리는 굉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까짓 먹는 문제 때문에 망하면 되겠습니까? 여기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식물 때문에 근심했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생활을 방해했다는 말이요 믿음의 생활을, 승리의 생활을 실패로 만들었다는 이야깁니다.
  이 말씀의 더 깊은 영적 의미는 "예수께서 그를 위하여 가장 귀한 생명까지도 지불했는데 너는 그 형제를 위해 조그마한 것도 지불할 수 없단 말이냐?"는 말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여기서 선한 것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인데 여기 선한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나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사건을 왜 율법의 틀에 묶으려고 하는가?' 자신 만만합니다.
  그러나 선한 것이라도 잘 못 쓰면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방 받으면 선한 것도 선하게 나타나지 못합니다. 선한 것을 바로 쓰면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전제로 하여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비방을 듣지 않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자기 믿음만 앞세우고 일을 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해 못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자기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약한 자의 눈높이에 맞추면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17절이 중요합니다.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상은 먹기 위해 삽니다. 먹기 위해 돈을 법니다. 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인류는 이 지구 위에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국력은 높아지고 소유가 넉넉해졌습니다. 그런데 반비례하여 인간성은 상실되고 동물적 삶이 되어 버린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인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흔히들 나는 좋은 교회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사실 좋은 교회에 우선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날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믿음이 자구 성장되고, 성장되다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도 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만 좋은 교회고, 작은 교회는 나쁜 교회냐?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무리들의 회중입니다. 이 무리들에게 말씀의 선포가 바로 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나타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할/ 그렇습니다. 교회는 먹고 마시는 일로 시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 나야' 합니다. 이런 회중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안 생깁니다.
  ▶권위 있는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제일 불편하고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재미있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1위는 '40일 금식한 사람'이고, 2위는 '철야기도 잘 하는 사람'이고, 3위가 '신학 공부한 장로님'이라고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사실 <금식, 철야, 신학>은 개인적인 영적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는 귀중한 길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자기의 신앙성장에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하고 내려와서 하는 말이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없어!, 우리 장로님들 더 기도해야 돼!, 우리 남전도회가 어떻고, 여전도회가 어떻고-" 눈이 세모꼴이 되어서 누구를 칠까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그런 문제로 다투는 곳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고, 사람들 앞에서는 화평이 있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는 신령한 기쁨이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병들었느냐? 건강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믿/ 남과 원수 맺고 비난받아 가면서 잘 살고 출세하기보다는 다소 어려운 환경에서지만 서로서로 화해하고 화목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이 다스려 주시고, 성령이 감동해 주시고, 그 은혜 속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①의는 무엇인가? 이 의는 우리가 잘 나고 많이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빌3:9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
  이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너 의롭다'고 인정하신 의입니다. 선과 의는 다릅니다. 가령 "당신 한 시간 일하면 만원 주겠소!" 만원을 주었으면 의입니다. 약속을 했고 주었으니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 않으면 불의입니다. 오천 원을 주어도 불의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약속도 없이 그 사람에게 1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다.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의나 선은 변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의 표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은 표준 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의롭다 하셨으니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은 의롭게 살아야 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온갖 불의와 거짓이 난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세상 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이 때때로 고난이 따라오지만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②평강은 평안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불안하면 아직 신앙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예수를 믿으면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불안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할/
  이 평안을 가지십시오! 이 평안을 가진 자는 이웃과도 화목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가 깨어질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강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에 평화가 넘칠 때는 양심에 가책이 없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입니다.
  무엇인가 거리낌이 있고 남들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을 하고 정직하지 못할 때에는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새로운 믿음의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빌4:6-7).
  ▶영국의 여왕이 계시는 런던의 버킹검 궁전에 가보면 여왕이 궁전에 있을 때는 깃발을 올려놓는다고 합니다. '궁전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면 여왕이 있구나! 알고 깃발이 없으면 여왕이 계시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만 왕의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계신다면 언제나 우리의 삶에 평화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한대로 우리의 심령 속에 평화의 왕 되신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하고 즐거움의 생활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의 삶이 고달프고 외로워도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에게 항상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에게 딴 근심 있으랴> 그렇습니다. 주안에 영생이요 주밖에 멸망이요 주안에 평화요 주밖에 근심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모시고 의롭게 살 때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③희락은 기쁨을 말합니다. 이 희락은 '의와 평강'의 결과로서 오는 구원받은 성도가 느끼는 신령한 기쁨을 말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적인 기쁨은 절대로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즐거움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근심하게 하고, 비탄케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남에게 자유를 주고 평안을 줄 때 참 기쁨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항상 네 이웃에게 기쁨을 선사하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줄 때, 그 진리가 더 높은 것처럼 내 마음 속에 기쁨을 찾는 것보다 남에게 기쁨을 선사할 때의 그 기쁨은 한 차원 더 높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이 있습니다. /믿/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으로 교제했습니다. 주의 길을 평판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세례 요한은 기쁨으로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기쁨을 가지고 나누어주고 서로 통용하는 역사를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기쁨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건강하면 기쁘고 병들면 슬픕니다. 환경은 수시로 바꾸어지고 변함으로 이런 외적인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고난 중에서도, 흐린 날에도 기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은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환경이 이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기쁨을 간직한 채,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고, 장작더미 위에서 재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쁨을 간직한 채 거꾸로 십자가를 받았고, 야고보 장로님은 목이 잘리면서도 이 기쁨을 찬양했습니다. /믿/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입니다. /아멘!/
  여러분! 정말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18절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잘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심을 받고, 자기 마음도 기쁘고, 또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믿는 사람이 더 비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산 위에 드러난 동네입니다. 다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19절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믿음이 장성한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하나는 화평하는 일에 힘쓰고, 또 하나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중심의 생각과 편견을 가지고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대신 화목을 도모하며 덕을 세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잇고, 파벌이 있는 곳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가면 화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화목동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엡2: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6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화목의 통로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세상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합니다. 화목을 연결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연합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2:21-22절에서 "그(예수)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일은 지식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돈 가지고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고전8:1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그렇습니다. 덕을 세우는 첫째비결은 사랑 안에 있습니다. 형제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며 그 사람의 편에 서서 이해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덕은 화평으로 세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약한 저도 있고 강한 자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화목이 제일입니다.

 

  ▶20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하나님의 사업이란 교회 일을 말하고 구령운동을 말합니다. 즉 내 믿음을 통하여 간접적인 전도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을 보고 삶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믿는 자의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빛으로 살라! 소금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성도가 술이 취해 난리를 피우면 그 일로 인해 "저런 인간이 교회를 다녀! 저게 무슨 집사야!" 교회까지, 하나님까지 싸잡아 욕을 합니다. /믿/
  ▶어느 술주정뱅이 청년이 술을 끊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 그를 교회의 장로가 초대해서 식사자리에서 포도주 한 잔을 권합니다. 청년이 "저는 술을 끊었습니다."고 하자, 장로가 하는 말이 "괜찮아 포도주 한 잔 쯤은 약으로 할 수 있어!" 권함으로 마시게 되었고, 그 후 청년은 옛날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청년은 술만 취하면 "나를 이 꼴로 남든 사람은 아무개 장로야! 그가 나를 책임져야 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면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깊은 뜻은 먹는 문제로 사람을 넘어지게 말라는 것과 먹는 문제로 믿음을 시험 들지 못하게 하라는 두 가지의 의미입니다. 하나는 아까 장로님처럼 술로 사람을 넘어지게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재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었느니 말았느니 시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이 말씀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의 압력을 받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누가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믿/

 

  ▶21절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쉽게 표현하면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믿음이 작은 자들 앞에서 절제하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8:13절에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할/

 

  ▶22절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안 먹어도 괜찮다는 믿음을 가졌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나타내지 않아도 괜찮으니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을 주님께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것이 바른 신앙관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내 마음의 중심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고 보십니다. 시33:1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할/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십니다. 그 사건의 원인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 '네게 있는 믿음'이란 '자기 신앙 양심에 옳다고, 깨달은 대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옳다고 깨달은 것은 밀고 나가야지 어기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신앙 양심을 지키는 자가 산 믿음이 있는 자요, 복을 받은 자입니다.

 

  ▶23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결론부분입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과감하게 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우상 앞에 놓인 음식이라도 예수님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 믿음 가지고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의심하면 안 됩니다. 의심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의심은 나누어지는 마음이요 분리시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분리시킵니다.
  약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결론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 순종하고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 믿음이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씀의 원리를 깨닫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로마서의 주제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봅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삽시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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