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9강) 주를 본 받아 뜻이 같게 하라! (롬 15:1-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10

《제49강》   주를 본 받아 뜻이 같게 하라! (롬15:1-13)  

 

  본문은 14장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덕이란 나 혼자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성가대에서 합창하는 것과 같은 성격을 뜨고 있습니다. ▶합창을 하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①악보를 잘 읽고 소화하는 독보력이 있어야 합니다.
  ②지휘자를 잘 보아야 합니다. 자신은 자신 있다고 악보만 쳐다보고 지휘자의 지휘를 보지 않는다면 좋은 대원이 될 수 없습니다.
  ③옆 사람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파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 맞춰서 내 목소리의 고음과 낮음을 조절해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혼자 독불장군처럼 나갈 수는 없습니다. 나를 인도하는 지도자를 보아야 하고, 옆 사람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합니다.
  벧후1:5-7절에 보면 믿음의 여덟 단계가 나옵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그러니까 믿음의 여덟 단계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으로,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단계적으로 되어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풀라스 덕이 함께 해야 그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은 종교적 관계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종적인 관계이나 이것이 덕으로 이어져서 윤리적 관계로 바로 되지 아니하면 신앙적 관계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바로 서야 하지만 또한 인간관계도 신앙적으로 맺어져서 덕을 이루어야 합니다.
  덕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다같이 평안하고 완전한 덕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토마스 아킴피스란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덕을 세우고 은혜와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기 위해 바울은 "믿음으로 우리를 온전케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제목소개!▶

 

  ▶1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강한 자란 물질이 많은 사람과 권력을 쥔 자를 의미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믿음이 강한 사람, 곧 깨달음을 얻은 자'를 가리킵니다. 또 '강한 자'란 '믿음이 견고한 자'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살고, 명예와 권세를 위하여 살고,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과 자랑을 위하여 삽니다 만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믿/
  성경에 보면 '강하다'는 자들이 있고, '약한 자'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8장에 보면 '간음하던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큰 소리로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러자 사람들은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모두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아는 것을 힘으로 알고 죄를 지은 한 여인을 죽이려고 정죄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눅18장에 보면, 바리세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세인은 성전 앞쪽으로 나아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 뒤쪽에서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엎드려 조용히 기도합니다.
  바리세인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자기 믿음이 최고인양 의시대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뒤에서 엎드려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서 큰 자요, 강한 자입니까? 죄인 세리가 큰 자요 강한 자입니다.
  본문은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를 생각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커버해 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술집에 안가고, 고스톱을 안치고, 나만은 합당한 믿음으로 산다고 그 자체로 자기만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이 강한 자가 덕을 세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덕이란 강한 자만이 세울 수 있습니다. 참는 것은 강한 자가 참는 것이지 약한 자에겐 참는 것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아는 자가 모르는 자보다 덕을 세웁니다. 남을 용서할 때도 내가 강한 자로서 '너를 용서한다'고 해야 용서하는 것이지 약한 자가 무슨 용서를 합니까? 그러므로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강한 자가 되어야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감싸주고 이해하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당당하게' 짐을 지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대신 지라는 채무자의 성격을 가지고 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덕을 세우려면 먼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즉 남을 먼저 생각해야 덕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덕은 깨어지고 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은 교만한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잠18: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옛날 어느 정승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습니다. 술좌석에는 정승의 애첩과 기생들이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부는 바람에 불이 꺼졌습니다.
  이때 정승의 친구 한 사람이 정승의 애첩의 손을 잡았는데, 그 기생이 화를 발끈 내며 어둠 속에서 자기 손을 잡은 사람의 갓끈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빨리 불을 켜세요. 내가 그 사람의 갓끈을 끊었으니 쉽게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정승이 "우리 다같이 갓끈을 끊습니다." 이런 제의를 해서 모두 끈을 끊고 불을 켰다는 야화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존귀의 앞잡이가 된다.'고 잠언서의 기자는 말했습니다.
  성경에 '기뻐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기쁨보다는 남을 더 기쁘게 하라는 메시지가 더 강하게 실려 있습니다. /할/

 

  ▶2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먼저 기쁘게 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에 그 기쁨 속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는 인격이래야 덕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덕은 나 혼자의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을 울려 놓고 기뻐하는 잔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술 인심은 세계에서 최강이랍니다. 서로 먹으라고 상대방에게 권합니다. 이것은 네가 즐겁게 먹어야 나도 즐겁게 마실 수 있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이런 덕은 삶을 잡는 덕입니다.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벧후1:5절에 "믿음에 덕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덕이 없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도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라도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덕을 세우는 일에는 자기가 약간 손해가 되어도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믿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언행심사를 보고 평을 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는 초신 자들이 직분 자들의 신앙을 보고 따라합니다.
  ▶선의 덕을 세우십시오, 자녀들의 행동이 곧 부모의 인격과 교양을 반영하듯이 성도들의 행동은 곧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 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악을 버리고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섬김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섬기기보다는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요13장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섬김의 봉사자들입니다. /믿/

 

  ▶3-4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3절은 남을 위하면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 비방과 멸시를 받으시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네게 미쳤나이다." 시69:9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많은 비방을 받으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성경을 공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기록된 바"에서 전은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역사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바로 섬길 수 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바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요20: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것이요, 그 안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누구나 성경을 대하는 자는 진리를 만나 자유 함을 얻게 됩니다. 또한 성경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시킵니다.
  딤후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위대한 힘을 얻을 수가 있으며 책망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때, 감화력이 나옵니다.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능력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믿어집니까?/
  여러분 어떤 것이 능력입니까? 하나님을 많이 알고 잘 믿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 안에는 욥의 인내가 있고, 요셉의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내할 수도 있고, 소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믿/
  성경은 우리로 소망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환난을 능히 견디는 능력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벤허>를 다 보았습니다. 그 장엄한 스토리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벤허를 쓴 원작자인 '웰레스'라는 사람은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가 군장성으로 있을 때, 자신의 부관과 함께 열차를 타고 전방을 시찰하러 가는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섭게 저주하고 핍박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를 적나라하게 폭로해서 기독교를 박살내자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웰레스 장군은 그 글을 쓰기에 앞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고, 많은 참고 문헌을 읽어내려 가다가 성령의 놀라운 체험을 맛보게 되었으며 자지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진 것을 깨닫고 주 앞에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고 나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할/ 그는 도리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벤허>라는 소설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5-6절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모든 교회가 하나 되는 사랑의 운동이 절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마음을 갖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각 사람의 얼굴에서부터 마음과 생각과 개성이 다 달라서 한 마음 한 입으로 뭉치기는 힘이 듭니다.
  한국 사람은 혼자 있으면 일들인데, 모였다 하면 분쟁이 일어납니다. 같은 부모 밑의 자식들도 아롱이 다롱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르다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고유의 개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기독교가 파(교단)가 많나?"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교단이 나누어지는 일은 긍정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장로교는 장로교 식으로, 감리교도, 순복음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성품에 맞춰서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간혹 교단 분열로 지탄의 소리도 있지만 긍정적으로는 주의 복음이 증거 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다르고, 교파나 교단이 서로 다를지라도 온전하게 하나 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믿/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한 교단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한 피로 구속받은 한 형제요 자매된 사이입니다. /할/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회가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7절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다시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예수를 본 받아야 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받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이 받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는데 우리들도 약한 형제들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받아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아무리 부족한 형제라도 다 받아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으로 자라기까지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4:19절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갈4:15절에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사도 바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바울의 생각에는 그들이 바울 자신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눈까지도 빼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의 믿음입니다. 덕을 이루는 인격이라면 여기까지 도달해야 됩니다. 믿어주는 것이 최고의 덕목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생각할 때도 그가 나를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받쳐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받아드리는 마음입니다. 아내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서로서로 받아서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할/

  ▶'조나단 에드웨드'는 미국이 낳은 저명한 신학자요, 설교자요, 목사입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이 결혼 적령기에 놓여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딸의 성경이 몹시 날카롭고 괴팍스러워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 멋진 어떤 청년이 그의 집에 찾아와서 목사님의 딸에게 청혼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나는 아버지로써 자네의 청혼을 받아 들일수가 없네! 우리 딸과 아예 결혼할 생각을 말게! 자네가 네 딸을 잘 몰라서 그러는 걸세!" 그러자 청년이 의아한 눈초리로 "제가 따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왜 그러십니까?" 목사님은 "자네와 네 딸과는 맞지가 않아!" 청년이 "무엇이 맞지 않는다고 그러십니까? 나도 예수를 잘 믿고 있습니다." 하면서 물러설 기세가 아닙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여보게 청년! 고집부리지 말게! 내 딸의 성격이 너무나 괴팍하고 까다로워서 자네는 내 딸과 평생은커녕 단 일년도 살수가 없네! 만약 내 딸과 동거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래야 할걸세! 자네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떻게 보면 '목사가 감히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에피소드 중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웃을 용납하고 받아 주려면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와 허물이 큰 사람들을 포근히 감사 주려면 네가 작은 예수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믿어집니까? 지금부터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8절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여기 '내가 말하노니'란 말은 어조를 높여서 다음 내용을 말하려는 문장 도입 법입니다. 그러니까 강조하는 어법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바울이 이렇게 힘을 주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기에 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무슨 말씀인가?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인 '진실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므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는데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그의 신약성경 초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할례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믿음의 조상이 된 자입니다. 그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유대인의 혈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수종자"란 '유대인의 수종자'란 의미로,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선민의 긍지입니다. 왜? 그 이유는 할례는 유대인들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을 우습게 본 것입니다. 삼상17:26절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신앙의 깊은 경지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견고케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땅에 오신 예수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9절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인들을 먼저 부르시고, 유대인을 통하여 또 이방을 부르신다.'고 하는 약속이 구약성경에 그렇게 언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희생하신 것은 유대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엡2:1-8절에 보면 "이방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살리셨다."고 하시면서, 2-5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으며,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시18:49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이 오시기 천년 전부터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과 같이 찬송을 부르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모든 예언은 다 이루어 졌고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믿/ 

 

  ▶10절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이 말씀은 구약 신32:43절 '상'반절을 인용한 말로, 모세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이 유대인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을 모세 때에 벌써 노래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데가볼리 지방에도 가셨고, 두로와 시돈 땅에도 가셨습니다. 한 여인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그 당시 극기시 했던 이방인의 땅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도 가셨고, 수로보니게 여인도 주님이 돌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다니신 것입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무슨 뜻인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어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모세 때부터 예언하고 있습니다.

 

  ▶11절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이 말씀도 시117:1절에 있는 말씀인데, 시117편은 신구약을 통해서 가장 짧은 장입니다. 두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시119편은 신구약성경에서 제일 긴장입니다. 176절이나 됩니다. 그 옆에 있는 장이 오늘 본문에 응용되어 있는 시117편입니다. 그런데 가장 짧은 시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모든 열방들아"로 시작됩니다. 글은 짧은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우주를 담았습니다.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짤막한 절인데도 거기에 최고의 찬양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열방이 주님을 찬양하고, 백성이 주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2절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여기 "이사야가 가로되"란 말은 사11:10절을 인용한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다는 뜻입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인데 이새의 뿌리에서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에서 열방은 모든 민족인데,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둘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12절의 결론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소망을 갖도록 축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차고 넘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다른 축복보다 '소망'이 차고 넘치는 것이 가장 큰복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먼 훗날에 대한 기대입니다. 오늘 당장 내가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육적인 것에 대한 기대가 아니고 영적 세계에 대한 기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기대가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소망이 가득 차고 넘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뜻을 순종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⑴하늘에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은 현실에 집착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도 모르고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그의 모든 소망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일생을 투자합니다.
  큰집에서 온갖 것 다 갖추어 놓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하며, 부족함이 없이 무엇이든지 할만한 재물을 쌓으며, 동시에 권력과 명예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식 값이 오르내리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환율이 어떻게 되는지 이자가 어떻게 되는지 살피면서 울고 웃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신문들은 아예 매일같이 그 변동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알려줍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관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화려한 것, 큰 것, 일등 하는 것, 권력의 상좌에 앉는 것 등입니다. 이들의 행복은 바로 이런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모두가 대통령이 되려하고 모두가 부자가 되려하며, 모두가 일등을 하려고 하니까 자연 이 사회가 경쟁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 사회란 참으로 냉엄하기 짝이 없는 세계입니다. 거기에서는 승자만이 살아남고 패자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⑵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우선 이 땅의 욕심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 살고 있던 땅 하란을 떠나게 하신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며, 그의 뜻을 깨닫는 것이며, 그가 만들어 가시는 그의 나라에 대한 소망(천국)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소망적인 일보다 절망적인 일이 더 많은 세상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세상 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도 생태계 문제, 식량문제 등' 너무 절망적인 사건들이 많습니다.
  일본의 어떤 작가는 <지금 이 시대는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시대요, 소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는 사냥총으로 자살 직전에 <나는 고독하다>고 외치며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헤밍웨이는 소망의 하나님, 생명의 구주 되시는 주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절규하다가 자살하여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소망의 줄이 끊어지면 그때부터 낙심과 타락뿐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좇기면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39:7절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할/
  다윗이 고백한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 믿는 자들의 기초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쁨의 기초가 됩니다. 평강의 기초가 됩니다.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능력의 기초가 됩니다. 은혜의 기초가 됩니다.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가? 이 기초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바램은 모든 성도들이 강해지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성도가 비슬거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십자가의 군병으로, 강한 용사가 되어서 세상을 호령하고 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믿/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엡6: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막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고, 강력한 목사가 되기를 원하시고, 강력한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몇몇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원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는 소원입니다. /믿/
  눅10:19절의 말씀을 한 절 읽고 말씀을 마칩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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