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왈드 챔버스 366일 묵상집(영한)

번역은 회색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5. 25. 17:13

번역은 회색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등록 :2018-05-24 19:48수정 :2018-05-24 20:20

 

대표적 전문번역가 정영목 첫 저작
번역론과 작가론 각각 모아서 출간
“잘 읽히는 번역 나쁜 번역일 수 있다”
필립 로스 사망에 “큰산 사라진 듯”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문학동네·1만2500원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문학동네·1만4000원


처음 들어보는 외국 작가의 이름이라 그냥 넘어가려다가 번역자의 이름을 보고 다시 책을 살펴볼 때가 있다. 이 번역자가 옮겼다면 분명 중요한 작품이겠거니 싶어서다. 베르베르와 움베르토 에코의 번역자 이세욱, 과학책 번역가 김명남, 그리고 필립 로스와 커트 보니것 등의 영문학 번역가 정영목이 그런 이름들이다. 신뢰할 만한 번역자의 이름은 유명인의 추천사보다 갑절은 더 무게가 나간다.

항상 누군가의 뒤에 자신의 이름을 뒀던 27년차 번역가 정영목(사진)이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한 칸 앞으로 옮겼다. 그가 그동안 발표한 번역론을 모아 낸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소설을 번역하고 쓴 옮긴이의 말과 작가론, 칼럼들을 묶은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이 같이 나왔다. 정영목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로서 번역에 대해 발언을 할 기회가 많았다. 지난 2014년부터는 매년 황현산, 고종석, 정재승 같은 전문가들을 초대해 번역을 주제로 토론하는 ‘번역대담'의 대담자로서, 한국 번역가들의 얼굴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을 그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번역가가 자신이 아닌 작가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밥벌이를 위해 부업으로 번역을 시작했으며, 지금도 자신은 생업에 충실할 뿐이라며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번역이 예술이 아닌 장인의 기술과 같은 것이라 담담히 말한다.

번역을 두고 제기되는 ‘직역이냐 의역이냐’ 같은 문제는 그에게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반복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번역다운 번역은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이라는 모순적 인식이 지배하는 현 상황이다. 그는 번역을 판단하는 기준이 이런 식으로 획일화되면 ‘번역 냄새가 나지 않는, 매끄럽게 잘 읽히는 가독성 높은 글'로 번역이 규격화되고 보수화될 것이라 걱정한다.

그렇다면 번역가가 추구해야 하는 번역은 뭘까. 그는 번역이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제3의 언어, 회색의 언어를 생성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번역의 중요한 역할이란 곧, 번역된 작가가 한국의 독자들이 읽는 문학에 전에 없던 새로운 목소리를 보태도록 하는 것이라 말한다. “외국어 번역의 충격으로 등장한 제3의 언어, 회색의 언어가 기존 한국어의 변경에 자리를 잡으면서 한국어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번역이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라는 것이다. “어색하고 낯설고 생경한 면을 통해 우리의 현실 속에 어떤 것이 없음을 알려주고, 또 바깥에서 온 언어가 우리의 현실과 어딘가 어긋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번역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번역가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문학동네 제공
번역가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문학동네 제공

 
그가 여기서 사례로 드는 것이 ‘자유 간접 화법’이다. “철수는 영희가 좋다고 말했다”는 간접 화법, 독백으로 말하는 “나는 영희가 좋다”는 자유 직접 화법이라면, “철수는 영희가 좋다”가 바로 자유 간접 화법이다. 이 화법은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문체로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말이 서술자의 말과 겹치기에 서술자의 주관이 개입할 수 있어 현대 소설에서 즐겨 사용됐다. “이런 충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번역으로 자국어의 영역을 확대하는 작업, 다른 언어와 우리 언어의 혼종에 의해 제3의 언어, 순수하고 절대적인 언어를 지향하는 작업은 언어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제3의 언어를 창조하는 번역, 회색 지대를 향하는 번역은 적어도 그에게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무섭게 뒤따라오는 인공지능 번역의 파도 앞에서도 번역가라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이 휩쓸려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주는 뿌리 깊은 나무 같은 것이다. “우리의 번역 작업은 불완전한 양쪽 언어에서 어떤 완전한 언어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점에서 우리보다 기술적으로 나은 기계가 나온다 해도 그 기계에게 다 맡기기 힘들다. 이런 완전한 언어의 상상은 번역의 본령에 해당하는 인간적 영역과 직결된다. 현재 우리의 언어는 성기고, 번역의 반은 상상인 것이다.”

또 다른 책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정영목이 번역만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 소개에도 뛰어난 사람임을 보여준다. 한 번도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더라도 글 읽는 재미에 빠져 계속 읽어 나가다 보면, 읽어야 할 소설 목록이 대거 늘어난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다루는 작가는 당연히 필립 로스. <포트노이의 불평>, <미국의 목가>, <에브리맨> 같은 로스의 초·중·후기 걸작을 모두 번역한 그만큼 작가와 각별한 번역가는 국내엔 없을 것이다. 정 번역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설로 진실의 바닥까지 가겠다는 차가운 강철 같은 의지야말로 그를 평생 발전하는 작가로 만든 힘이자 독자에게 서늘한 전율을 일으키는 매력”이라고 로스 문학의 핵심을 명료하게 짚는다.

공교롭게도 그의 책이 출간된 직후인 22일(현지시각) 필립 로스가 85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3일 통화에서 정 번역가는 “늘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걸 보여주는 큰 산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온종일 착잡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로스에 비유하는 걸 그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번역의 진실을 찾아 바닥까지 가겠다는 그의 의지가 식지 않는 한 그는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번역가로 남아 있지 않을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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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6153.html?_fr=mt0#csidxf50285ac4551256a9af040db36cecf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