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고입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중학교 졸업자격증을 주는 고등공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초등학교 배구 대표선수였고 반에서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지만 집에 돈이 없으니 친구들이 모두 가는 일반 중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중학교가 의무교육이라 학비가 없지만 그때는 학비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달 학비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 그래서 일반 중학교 학비의 1/3 가격에 다닐 수 있는 고등공민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다.
그 당시 고등공민학교의 한 달 학비가 3,2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 혼자서 애를 쓰고 벌어도 어린 6형제의 뒷바라지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돈을 벌기위해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그 당시 한 달 동안 신문배달을 하면 3,400원의 월급이 나왔다. 나는 그 돈을 벌기 위해 새벽 5시 30분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문배달을 위해 일어나야 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나보다 3살 많은 형과 함께였다.
처음 신문배달을 시작한 날이었다.바람이 몹시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둑어둑한 새벽거리를 달려야 했다.
그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신문배달을 나보다 먼저 시작한 형은 아직 어린 내가 항상 걱정이었다. 형은 내가 신문배달을 할 가정이 150가정이라면 정확하게 152부의 신문을 내 품에 안겨주면서 말했다.
“신문배달을 모두 끝내면 너한테 신문이 2부만 남아야 한다. 3부가 남으면 1가정을 배달하지 않은 것이고, 4부가 남으면 2가정을 배달하지 않은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배달해야 한다..”
형으로부터 이렇게 세심한 주의를 받았지만 신문배달이 모두 끝나고 나면 내 손에는 어김없이 3부 이상의 신문이 남았다. 몇 가정을 빼먹고 배달한 것이다. 14살의 나에게는 처음부터 한 집도 빼먹지 않고 배달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렇게 빼 먹은 집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신문사 지국으로 전화가 왔다. 그러면 그 다음 날 새벽에 나는 국장으로부터 심한 야단을 맞아야 했다. 그 야단을 맞고 나는 또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내 배달구역은 여수역 앞에서 시작해 종화동의 해양공원을 지나 지금의 중앙동 로터리 부근에서 끝나는 코스였다 . 당시 17살이었던 형은 그런 동생이 항상 걱정되어 나보다 배달 부수가 많았음에도 중앙동 로터리에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형은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으려고 아마도 부지런히 뛰면서 배달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 내 손에 남아 있는 신문부수를 확인하고 어느 가정이 빠졌는지 항상 복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는 남은 신문으로 버스비를 대신하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