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종말론과 소선지서의 종말론적 비교 연구
Ⅰ. 서론
1. 종말론의 어원
성경이 우리들 개인의 미래와 세계 및 인류의 미래 일반에 관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준 것에 대한 조직적인 연구를 “종말론”이라 한다.
“종말론”이란 용어는 헬라어 에스카토스(마지막)와 로고스(말씀, 강화)의 합성어로써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이 명칭은 “말일들”(사 2:2, 미 4:1), “말세”(벧전 1:20), “마지막 때”(요일 2:18)등의 성구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
2. 구약에서의 종말론의 개념
“종말론”이란 성경 중 어느 한 부분이나,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Jurgen Moltmann)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가 아니라, 소망이며, 앞을 바라다 보며,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를 혁신하고,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이란 단순히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매개체이며, 관건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놓여 있다.”
자유주의 견해를 가진 어떤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기를 구약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구약의 저자들이 현재 우리가 “미래의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죽은 후의 생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이런 주제들에 관하여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는 않지만, 좀더 넓은 의미에서 살펴볼 때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인 성향을 띠고 있음을 본다.
1) 장차 오실 메시야(Messiah,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과 형태로써 장차 자기 백성과 아울러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려 미래(마지막 날들 : 구약적 표현)에 나타나실 한 메시야를 바라보았다.
베드로는 이 메시야 대망사실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벧전1:10-11)
구약의 종말론에서 첫째로 중요한 개념은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메시야 사상이다. 창세기 3:15에 장차 구속자가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계시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할지라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장차 계속될 모든 구속의 역사는 이미 이 原 約束속에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구약의 구원 계시는 미래 지향적이고, 결국 약속된 구속자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인의 후손 : 창세기3:15에서 기록하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일명 “어머니 약속”으로 알려진 이 구절은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을 정해놓고 있는데,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것이라는 예언 속에서 이미 메시야 대망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여인의 후손(창3:15)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장차 오실 이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후손(창22:18)으로 유다지파의 후손(창49:10)이요, 더 구체적으로 다윗의 후손(삼하7:12-13)으로 명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는 여인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리고 유다 지파를 통해서, 구약의 후반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타나고 있다.
왕 : 장차 오실 메시야는 자기 백성에게 위대한 왕이어야 했다. 특히 메시야의 왕권에 관해 성경은 구체적으로 그가 다윗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 : 장차 오실 메시야는 동시에 영원한 제사장이어야 했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왕이요, 제사장인 동시에 또한 위대한 선지자이어야 했다.
또한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원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호시는 것으로 동일시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사야 7:14에서 장차 오실 구속자를 특별히 ‘임마누엘’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이사야 9:6절에서는 약속된 구속주의 이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메시야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내려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현현은 메시야로 말미암아 나타내진 바 되고 실현되었으며, 하나님은 메시야적 왕을 통해서 구속의 목적들을 이루시며 자기 자신을 재현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고귀한 메시야에 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구원자를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난받는 종”이란 개념은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다.
2)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구약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계시사상이 흐르고 있다.
다니엘서는 장차 올 왕국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는 하나님이 장차 어느 날엔가 세우실 왕국이고, 결코 파괴되지 아니할 왕국, 모든 세상 왕국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뜨릴 왕국, 그리고 영원히 견고하게 설 왕국으로 발전되었다.
3)새 언약
“언약”이란 개념은 구약계시의 중심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려 저주와 심판이 선언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과 “새언약”을 맺을 것을 잊지 않으셨다. 많은 구약 학자들이 보여주듯이 언약이란 개념은 구약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다.
4)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신, 배약으로 말미암은 포로 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소식이다.(렘 23:3, 사 11:11)
선지자들이 남북 왕국 모두가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열방 국가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온 천지가 뿔뿔히 흩어질 것이라 했지만, 이러한 암담한 예언 속에서도 구원에 관한 예언들이 속속히 선포되었다.
5) 주의 날
“주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심판과 구속을 가져다 줄 최후의 종말론적 날을 가리키고 있다. 이사야 13장에서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곧 일어날 주의 날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13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묘사들 가운데 많은 시간적 공간적 간격들을 발견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묘사들은 장차 먼 훗날 미래에 발생할 종말론적 주의 날로서 기록되어지고 있다.(사 13:9-11) 즉 “예언적 전망”의 한 예로서 한 개의 환상 속에 가까운 “주의 날”과 먼 “주의 날”이 함께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다. 오바댜는 에돔의 불운의 날을 주의 날의 도래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란 이스라엘과 이방 백성 모두에게 심판과 구속을 가져다 줄 최후의 종말론적 날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의 날은 단지 심판과 재난만을 가져 오지는 않는다. 종종 그 날은 구원도 가져온다. 즉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과 분노의 날로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의 날로 나타난다.(욜 2:31-32, 말 4:1-2)
6) 새 하늘과 새 땅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좀더 밝은 면을 보여주는 단어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구약에 나타난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은 이사야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사 65:17, 참고: 사66:22) 이사야서의 다른 부분들은 덧붙여 말하기를 땅이 새롭게 될 때 함께 이루어질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이 보여주고 있는 종말론적 전망을 정리해 보면 인류의 창조 시기로부터 뱀의 머리를 부스러뜨릴 한 구속자가 오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종말론적 기대가 점점 충만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대가 담고 있었던 많은 다양한 내용들이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성취된 것은 아니었고 여러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곤 했다.
구약의 신자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혹은 머나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을 기대하고 바라다 보았다. 이 내용의 대표적인 메시지는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선포되었음을 볼 수 있다.
Ⅱ. 이사야의 종말론 연구
1. 이사야의 종말론의 주제들
(1) 여호와의 날(הוהי מוֹי)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우주 만물 가운데 이와같은 이가 없다”라고 외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오, 바벨론 신은 우상에 불과하다고 조롱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과는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호와의 종말론적 행위는 그 내용에 있어서 “심판”과 “구원” 두가지를 포함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만”이란 용어는 법적 행위와 같은 좁은 의미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하심, 즉 벌하시며 멸하시는 행위라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의 “심판”을 가리킨다. 심판의 예언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인데, 그 근거는 바로 “הוהי מוֹי”이다.
또한 “구원”이란 의미 역시 단순히 구원의 의미보다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이렇게 두 용어의 개념인 “심판의 선포”와 “구원의 선포”는 그 본질상 서로 밀접히 결보되어 있다. 단순히 재난을 위한 심판의 선포가 아니요, 또한 단순히 구원을 위한 선포가 아니다. 그러므로 “הוהי מוֹי”은 모든 불신앙적 세력들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호와에게 충성스러운 자들, 즉 남은 자들의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הוהי מוֹי” 개념은 이사야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본문의 내용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들이다. 그 심판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첫째는 2:12-17로서 비인격적인 것들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심판 날에 그의 심판이 비인격적인 것들에게 나타나고, 둘째는 2:18-22로 앞의 것과 동일한 일들이 인격적인 인간과 그 이상의 존재들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사상 : 하나님은 역동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목적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역사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의해서 언젠가는 그 목적을 달성된다고 보았을때, 이사야가 이해한 “여호와의 날”은 이 목적을 이루어 가는 과정의 절정에 일어나는 날로서, 바로 여호와가 역사에 개입한 날이라 말할 수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심판과 구원 행위의 주체는 이사야 63:5에서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라고 말한 것처럼 여호와 홀로이시며,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인간역사에 개입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사야가 이해한 여호와의 날은 내용면에서 볼 때 심판과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심판의 날이었다. 이 심판은 백성들의 도덕성 상태와 또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대적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
심판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사야의 이해는 몇 가지 특징들을 보여 준다. 첫째, 이 심판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적 위에 임하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여호와의 날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이방,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한다. 둘째, 이스라엘은 물론 모든 열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곧 심판의 기준이 이스라엘이냐 비이스라엘인이냐에 있지 않고, 또한 종교 의식을 잘 이행했느냐에 있지 않고, 오직 도덕적 율법에 있음을 가르쳐 주는데 여기서 여호와의 날이 단순한 심판의 날이 아니라, 윤리적인 심판의 날이라는 의미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또한 여호와이 날의 심판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초인적인 개입으로 집행된다.
이사야가 이해한 이와 같은 여호와의 날의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파멸자체가 그 목적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를 확립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구원으로의 길을 만들어 주는 전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해한 또 하나의 여호와의 날 사상은 시간성에서 볼 때 그의 임박성과 종말성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다른 예언자들과 같이 “주의 날”을 임박한 날로 여겼다. 이사야 2:12에서도 거만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에게 임박한 미래에 심판이 있을 것을 선포했다. 또 이사야 13:6에도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이를 것임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임박한 심판이다. 이와같이 이사야가 심판의 임박성을 예언하게 되었던 동기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에 대한 예언자의 기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의 의미가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의미 : 이사야는 여호와의 심판을 막거나 또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대한 깊은 자각을 갖게 하는데 있었다. 이는 그들의 패배와 포로의 경험속에서 그들의 과거의 죄를 뉘우치는 회복된 계약들의 은혜로운 약속들의 성취됨을 역정적으로 받게 하는 그러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있었다. 이사야의 종말사상은 역사안에서의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회복과 거룩한 공동체 형성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의도는 단순히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건강을 회복시켜 왕을 섬길 수 있는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용서함으로 정화시켰듯이 당신 백성을 불로써 정화시키려고 했다.이것은 계약에 의거한 것으로서 이사야는 특히 이 계약에 대해 책임성을 강조했는데, 그 목적은 먼저는 이스라엘 계약공동체의 조화를 가져오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서는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곧 이 세상에 대한 이스라엘의 사명의 인식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③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해 : 결론적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여호와의 날을 정리하여 보면 첫째, 이사야는 여호와의 날을 창조, 보존, 그리고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역사 궤도 속에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대적하는 인간의 죄는 가차없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심판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적들 위에 임하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는 심판으로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우주, 온 세상을 포함하는 종말론적 시판이다.
여호와의 날에 임하는 심판과 구원 행위는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요 역사의 주 되심을 밝혀주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요, 그의 강권적 주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여호와께서 선포한 그 날을 통해서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셋째, 여호와의 날을 통한 종말론적 공동체 형성이다. 이사야가 이해한 여호와의 날은 약속과 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만드는데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는 어떠한 사회구조에도 동화될 수 없고 그 속에 안주할 수도 없다. 언제나 이 공동체는 희망과 과정 속에서 그 고유한 색채를 유지하며 또 항상 출애굽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그의 시대의 사회구조에 안주하지 않고 항거하고 변혁시키며, 그의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서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2) 새 출애굽과 옛 출애굽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출애굽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의 표출이자 그들 역사의 초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출애굽이란 곧 구원을 의미하였으며, 구원이라는 용어는 바로 출애굽과 같은 말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형성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예언서에서는 거의 어디에서나 옛날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상기시키거나, 출애굽 때에 보여 주신 하나님의 승리를 회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의 구원과 목적의 성취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의 창조 사역과 연결시켜 강조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창조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후반부의 예언에서 창조사역은 구원 사역과 불가불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그 구원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었다.
①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의 종말론적 전망 : 이사야 43:18에 새 출애굽을 강조하기 위하여 옛 출애굽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지만 이사야 46:9은 최초의 신앙고백인 출애굽 전승을 앞으로 새로 행하실 하나님의 새로운 행동인 새 출애굽과 결합시켜서 회사하고 기억하는 일이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구원적 행위와 연결을 맺는 적극적인 신앙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고 있고 탄식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새 출애굽의 구원을 주제로 보여 주려고 이사야는 옛 출애굽의 구원사건과 동기를 모형적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②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의 정리 : 출애굽 전승은 이스라엘의 “본래 신앙의 고백”으로서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 출애굽 전승은 주로 찬가 형태에 의존해 있으며 이러한 출애굽 전승의 표현이 응집되어 나타나고 있는 곳은 신명기 26:5-9의 신조적 표현이다. 이러한 출애굽을 주도하시는 자가 바로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곧 구속주이시다.
Anderson에 의하면 이사야의 유형론적 역사 이해에서 두가지 점에 관심이 모아진다. 첫째, “태초”와 “종말” 그리고 “이전 일”과 “새 일” 사이의 상관 관계인데, 여기서는 예언자의 관심은 다시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의 관계로 발전된다. 그러나 이 평행은 단순히 시적인 유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역동적인 의지 가운데 나타난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둘째,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에 대한 이사야의 유형론에는 점진적인 발전 현상을 보인다.
이사야는 역사적 의미의 고조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옛 출애굽과 광야 유랑 때에 여호와는 강한 손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신 다음, 홍해를 가르시고 길 없는 광야를 통과하도록 이끄시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셨다. 그러나 새 출애굽에서는 역사적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즉 여호와는 모든 이방인의 목전에서 거룩한 팔을 펴시고 광야를 가로지르는 초자연적인 대로를 내시며 사막을 에덴동산같이 만드실 것이다.
이사야 40-55장에서 이사야는 출애굽 전승을 많은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이사야가 출애굽 전승을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인용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이스라엘이 지금 처해 있는 고난의 환경 때문일 것이다. 바벨론 포로의 상황 속에서 좌절과 고난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옛 출애굽 때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신 것처럼 지금 또 다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선포하여,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출애굽 전승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사야에 의해서 선포되고 있는 출애굽 전승은 궁극적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새 하늘과 새 땅”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다. 이사야의 선포는 예언적으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입장에서 새로운 출애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그의 종말론은 그 당대의 메시지와 연결하여 미래의 도래할 나라를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일”을 기억하는 것은 옛 출애굽으로 인해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는 “새 일”로서 종말론적 전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이전 일”은 “새 일”과 연속정을 가지며, 이 “새 일”로 인해 이사야는 구원의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3) 이전 일과 새 일
주제를 해석해 본 바에 따르면 첫째, “이전 일”이나 그와 관련된 “옛 일”에서, 이사야 41:22 “תוׁנשׂארה”, 42:9 “תוׁנשׂארה”, 3:9 “תוׁנשׂאר”, 48:3 “תֳנשׂארה”는 고래스가 등극하면서 리디아 왕 크로에수스를 무찌르고 사르디스를 정복하기까지 행한 초기 승리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전 일”을 미리 선포하셨던 하나님은 특히 이사야 41:22, 42:9, 43:9에서 바벨론 우상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둘째, “이전 일”에서 이사야 45:21 “םדקמ תאז”의 “옛적부터 있는 이 일”은 바벨론을 포함한 이방 모든 나라에 하나님의 공의(심판)를 나타내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43:20)이 영적 속박에서 완전한 자유를 향유하는 일은 고레스의 정치적 역량 이상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종의 새로운 사역의 발전을 49, 50, 53장에서 더듬어 볼 때,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확연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40-48장에 나타난 “이전 일과 새 일”의 의미는 위기에 처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하나님의 계시로 볼 수 있는데, 이 “새 일”은 Young 박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아직 느껴보지 못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들을 미래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실 사건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이 사건은 “이사야의 종의 노래”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새 일”은 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는 구원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메시야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구속의 사건을 다 포함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고 있다.
셋째, 당시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더불어서 종말론적으로 이 세상 끝날에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 이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그 결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영원히 살아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이라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4)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께서 종말에 시온을 높이시고 그곳에 영광을 드러내시면,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우상들과 무기들을 버리고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시온에 몰려와 여호와를 섬기고 이스라엘과 함께 평화에 참여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태초의 낙원의 평화를 회복하실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 주제는 이사야의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이방에 이 세상의 종국의 심판 날인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옛 출애굽”의 사건은 곧 “새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표현으로 “이전 일”과 “새 일”이라는 주제로 강조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 종말론적 비젼을 주는 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 주제는 이사야의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에 이 세상의 종국의 심판 날인,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옛 출애굽”의 사건은 곧 “새 출애굽”사건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는 이사야 65장과 66장, 베드로후서 3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 나타난 것이 전부이다. 이 주제에 대한 의미와 그 시기는 학자들마다 다르나 성경의 전체 문맥을 따라서 살펴볼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종국의 날에 새롭게 창조하실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사야 종말론의 정리
(1) 이사야 종말론의 특징
① 다양한 주제로 선포 : 이사야의 종말론이 이사야 전체를 통해서 다양한 주제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여호와의 날, 출애굽 유형론, 새 하늘과 새 땅 등이다.
② 여호와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 : 이사야는 여호와의 날을 창조, 보존 그리고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역사 궤도 속에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대적하는 인간의 죄는 가차없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심판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적들 위에 임하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는 심판으로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우주, 온 세상을 포함하는 종말론적 심판이다.
③ 세계 질서 확립 : 여호와께서 선포한 그 날을 통해서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해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세계의 관계회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으로 하나님과 그의 영적 백성과 세계와 관계 확립이요, 구원을 통한 새 창조요, 회복이다.
④ 종말론적 공동체 형성 : 여호와의 날을 통한 종말론적 공동체 형성이다. 이사야가 이해한 여호와의 날은 약속과 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만드는데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는 어떠한 사회구조에도 동화될 수 없고 그 속에 안주할 수도 없다. 언제나 이 공동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징을 유지하며 또 항상 출애굽해야 되는 것이다.
(2) 이사야 종말론의 한계성
① 계시의 점진성에 의한 차이점 : 이사야에 나타난 종말론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의 회복과 예수님의 초림과 그리고 이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사건으로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종말론을 명확하게 이사야 본문을 통해서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입장과 함께 이해할 때 그의 종말론은 어느 정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신약의 계시는 이사야 시대의 역사적 상황들이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고, 예수님의 초림을 보았고, 그리고 그의 재림도 신약의 말씀들을 통해서 그래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결국 계시의 점진성이며, 계시의 점진적 발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성경의 명확하지 않은 언급 : 그 시기적인 것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기란 어려운 것 같다. 단지 학자들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실제적 사건이 아닌데 신앙을 통해서 그대로 믿으려는 식의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Ⅲ. 소선지서의 종말론 연구
1. 요엘의 종말론
1)주의 날
주의 날이란 심판과 구속을 가져다 줄 취후의 종말론적 날을 가리키고 있다. “예언적 전망”의 또 하나의 예가 되겠지만, 한 개의 환상 속에 가까운 주의 날과 먼 주의 날이 함께 보여지는 예를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의 외침 가운데서 “주의 날”이란 표현은 신의 심판이 도래할 최후의 종말론적 심판을 지칭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 날은 단지 심판과 재난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종종 그 날은 구원도 가져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요엘 2:32은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예언된 “주의 날”은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과 분노의 날로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의 날로 나타난다. 비록 주의 날의 개념이 종종 암울한 어두움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만들곤 하지만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좀 더 밝은 면을 보여주는 말이 있으니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으로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소망은 항상 땅에 관한 구절과 자주 연관되어진다.
2) 성령의 부으심
요엘 2:28절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강조를 놓치지 않고 있다.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예언은 마지막 날, 새 시대에 이루어질 것이며 그 어떤 중간매체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이 새 창조의 실제를 향한 원대한 기대 속에 극히 상반된 영을 서로 하나로 역어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육체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지각을 부여받을 때,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될 때, 모든 사회적 분열과 장벽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29절)
30-31절은 메뚜기 재앙을 넘어 분명하게도 우주적인 언약을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섬멸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마지막 절은 예루살렘과 시온산의 남은 자를 위한 구원을 예언한다.(32절)
3)심판과 회복
요엘 3장에 나오는 심판과 축복은 성령의 부으심을 예언하고 있는 이 본문의 문맥을 성취시킨다. 1-1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열국을 향해 평화의 도구로 전쟁의 무기를 삼으시는 그분께 대적하여 성스런 전쟁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신다.
요엘 3장 15절은 2장 10절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반복을 통해 요엘 3:15은 메뚜기 재앙이 실로 종말의 심판이 될 것임을 나타내 준다.
2. 아모스의 종말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것은 그들을 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함이다.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9:9)하신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여 그들을 정결케 한 후 ‘남은 자’, ‘알갱이’를 얻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보편적이다. 우리는 여호와 심판의 보편성을 보는 동시에 그의 윤리적인 요구는 이스라엘에만 국한 되어 있지 않음을 본다. 비록 저들이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율법과 율례를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은 양심의 법을 따라야 했었다. 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는 결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었다.
이방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와 같이 역사하셨음을 보지만 그러나 그 역사의 흐름의 중심은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있음을 본다.
아모스가 말하는 ‘그 날’, 즉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이요,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라고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으 선지자는 경고했다. 그렇게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결코 구원의 날이 아니요, 오히려 멸망의 말임을 선포했다.(5:18; 8:9)
아모스가 말하는 ‘여호와의 날’은 결코 육신의 이스라엘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날이었다. ‘그 날’에는 ‘에돔의 남은 자’도 이방의 ‘남은 사람들’도 다 구원을 받아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의 날’임을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그 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3. 오바댜의 종말론
오바댜 선지자는 성전의 파괴, 포로생활과 같은 그 시대의 암울한 역사적인 소개들을 소개하는 한편,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가 안전함을 선포한다. 오바댜는 일련의 사건들과 갈등들을 숙고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멈추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 이해한다.
오바댜는 15절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면서 종말의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에돔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자들은 심판의 팔로서 그 사역을 수행한다(17-20절). 더불어 오바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통치를 예언하였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21절).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 이방인을 향한 심판 그리고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의 과정을 그려주는 오바댜의 예언은 포로기 예언적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실례를 제공해 준다.
4. 요나서의 종말론
1) 이방인에 대한 구원 : 구원사적 종말론의 목표
요나와 니느웨라는 이스라엘 선지와 이방성읍과의 관계에서 이방민족 그들 스스로를 위해 그들에게 쏟는 하나님의 지대하신 관심을 강조하여 재선포 한다는 점과, 이스라엘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광의에서 볼 때 이방인들에게도 축복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들 중에 위치한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구원역사 속에서 모든 이방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방들에게 확대 되는 것은 구원사의 종말론적 목표 중 하나이다.
요나서 가운데 구체적으로, 요나는 상징적인 방법 가운데 이방나라와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입장을 선언하고, 모형적이고 상징적으로 이방이 신적은혜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뜻에 관해 이스라엘의 행동을 보여주는 사명을 받았다. 이런 요나를 통한 상징이나 모형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을 이방을 향해 열릴 구원사의 발전적 단계에서 중요한 연관 내용으로 간주 된다.
2) 오실 메시야에 대한 상징
요나의 대표적 경험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들은 실제적인 죽음을 봐야만 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는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표적과 그 자신들의 새로운 생명의 참됨과 그 소망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요나의 상징을 성취시키는 표적이다. 우선 그 표적은 구원사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특수한 역할을 따라 이스라엘에 주는 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 나라와... 약속의 언약들”(엡2:11)에 가까워진 모든 이방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요나의 이러한 역사적 상징의 행위들은 그 자체의 목적도 있지만, 종말론적으로 메시야 사역에 대한 예언과 그 결과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나훔서의 종말론
구약의 종말론에서 첫째로 중요한 개념은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메시야 사상이다. 둘째는 구약의 종말론적 개관을 표현해 주는 또 다른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왕국이다”.
셋째는 구약의 종말론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또 하나의 개념이 “새 언약”이다. 언약이란 개념은 구약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넷째는 구약에 암시되고 있는 많은 종말론적 개념들 중에서 돋보이는 것과 반역과 불순종과 우상 섬김에 깊이 빠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이다. 다섯째, 종말론의 개념은 “주의 날”이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다. 나훔서는 니느웨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
이렇게 종말론적 사상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심판과 회복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 심판과 회복 그리고 새 언약에 대한 메시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나훔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하나님의 정의와 구분의 절대적인 능력이 그 분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1) 나훔 1:2-15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
본문의 예언은 1차적으로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과 남유다에 대한 구원 예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당신의 구속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억압하는 악의 세력을 진멸하시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최후 심판을 예언적으로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2) 나훔 2:1-13 니느웨 멸망의 참상 예언
앗수르의 멸망은 장차 최후의 심판 날에 있을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악한 세력의 박해로 인해 갖은 고난 가운데 처한 성도들에게 귀한 위로의 말씀이 된다.
3) 나훔 3:1-19 니느웨 멸망의 원인과 필요성
앗수르의 죄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살육과 궤휼과 강포로 대변되는 그들의 포악성이며(1), 또 하나는 마술, 음행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간교함이다(4). 이어 이러한 죄악을 범한 니느웨의 멸망이 필연적인 사실임을 선포하는데(8-19) 먼저는 니느웨가 아무리 부유하고 강성하다 할 지라도 그들의 죄악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노아몬의 멸망 사건을 실례로 들어 선포하고, 이어 떨어지기 쉬운 무화과 열매와 메뚜기의 비유를 통해 니느웨가 어떠한 자구적 노력을 한다 해도 결국 자신들의 행한 죄악이 결과로 인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신 이후에 그 백성을 구원해 주시고 그 가운데 새로운 언약을 세워 하나님의 구원서정을 이루어 가신다. 나훔서의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통해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6. 스바냐서의 종말론
1) 여호와의 큰 날(습 1:14)
심판의 날로 분노의 날이며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로 표현되어 있다.
대상은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이며, 둘째 이방민족들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2:7에 나오는데,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이는 유다가 하나님의 법을 거스려 돌아오지 않고 악을 행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고통의 날들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의 때일 것이다.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강퍅케 하시사 그들로 심판을 받게 하시며 그것을 사용하셔서 더 많은 은혜가 넘치도록 작용케 하셨다.
죄를 지을 당시 곧 바로 그에 상응하는 댓가가 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점차 무뎌져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실제로 역사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보응하신다.
2) 그 때(습 3:9)
여호와의 날이 무서운 심판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스바냐 선지자는 이번에는 축복된 날, 기쁨의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며, 제한적이고,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때”는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어서 구약이 모형론, 즉 그림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감안해서 또한 어느 한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 시간을 이야기한다.
스바냐는 예루살렘과 이방민족들이 심판을 받고 그 이후에 열리게 되는 종말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종말의 때는 희망의 때이며, 여호와께서 먼저 움직이는 때이다. 여호와께서는 죄에 대해 형벌을 받을 사람들을 고치시고, 그들을 높이 들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7. 학개서의 종말론
1) 성전 재건의 의의 : 학개의 예언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긴밀하게 결합되었는데, 학개에 있어서 성전의 재건은 여호와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한 필수 전체에 해당하였다. 학개는 먹고사는 문제로 성전재건을 등한시하는 이스라엘의 게으름을 질타하고, 과감하게 성전재건과 이스라엘 신앙의 재건이라는 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다.
2) 기름부음 받은 자 : 하나님의 구원 해동이 이루어질 특정한 역사적 자리를 학개는 성전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이 두 번째 집중되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들을 실천에 옮길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것이었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의 노력은 여호와의 구원 사업을 돕는 하나님의 종일 수밖에 없으며, 고레스의 칙령이나 포로의 귀환도 단순한 것이 아닌 구원 사업의 일환이었다.
3) 종말론적 성도 예루살렘 : 종말론적인 성도 예루살렘에 관한 표상은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점에서 심판 예언과 구별된다. 그리고 종말론적 사건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공간적인 변화는 종말의 때를 알리는 것이 되었다. ‘여호와의 날’에 세상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학개는 말하고 있다.
학개는 1:4-11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언약의 갱신 즉 새 언약의 약속을 받게 된다. 그리고 2:1-9에서 보면 새 언약의 두 번째 출애굽의 축복과 약속의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되는 축복은 계속 체험될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예루살렘 성전이 종말론적인 세계 중심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학개에 나타난 종말론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소규모의 각성한 포로귀환 공동체와 함께 이스라엘과 맺은 당신의 놀라운 약속들을 멋지게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것이다.
8. 스가랴의 종말론
스가랴의 장르는 대체적으로 묵시문학에 대한 정의에 따라 결정된다. 환상, 하늘 해석자의 존재, 그리고 고도의 상징적 언어 등과 같은 보다 일반적인 특징들 외에도, 세대의 명백한 구조가 묵시문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스가랴 12-14장은 마지막 때 있을 전투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이 장들로 향하게 한다. 비록 예루살렘이 이 전투에 휘말리게 된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12장은 성령을 영접함과 이로 인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백성의 변화된 성품들을 언급하면서 끝맺는다. 우리가 13장에서 모든 공동체 지도자들이 정화될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척결과 결부되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강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불변하는 예루살렘의 안전과 아울러, 언약의 저주가 예루살렘의 대적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9. 말라기의 종말론
1) 하나님의 사랑 :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기 전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근거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다. 이는 인간의 행위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악 : 말라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형식적이고도 불성실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편협한 율법교육으로 백성들을 미혹한 제사장들의 불의와 죄악을 규탄하였다.
3) 주의 오심 : 말라기의 마지막은 주의 오심을 예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약속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라기는 그리스도의 수난 뿐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예언한다.
말라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은 아모스나 스바냐를 의존한 듯 하다. 그 날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축복의 날이요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또한 의인의 행위가 기념 책에 기록되는 사상과 엘리야가 나타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종말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 된 자를 해방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정리한다.
Ⅳ. 결론 - 구약성경의 종말론의 특성 및 정리
1) 구약성경의 종말론은 현세적인 소망이다. 구약성경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이 세상의 생명을 경멸하거나 무시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 후에 대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으며, 죽음 전에 이 세상에서 명상이나 영적인 경험들을 통해서 인간 존재가 좀더 좋은 다른 장소나 형태로 변화될 가능성에 대하여 역시 사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구약성경의 종말론이 영지주의의 종말론이나 기독교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내세적인 강조,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개념과 매우 날카롭게 대조되는 것을 보여 주는 요소들이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소망보다 좋든지 또는 진실되든지 또는 교정 될 수 없는 “비영적인 것”이든지 그 여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믿음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성경적 소망의 특성은 진실로 그 관심에 있어서 동등하게 세속적인 이 세대에 반드시 권해야만 할 견해일 것이다.
2) 구약성경의 종말론은 미래가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이해한다. 세속주의와 같다고 할 수 있는 앞에서 방금 말한 현재의 “현세성”을 생각해 볼 때, 이와는 전혀 다른 현세적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하여 이 점은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소망의 기본적인 것은 인간적인 과정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과거에 실패하였고 또한 앞으로도 이루지 못할 그 새로운 일을 도입하실 다가오는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의 소망이 인류의 본질적인 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 대신에 그들의 소망은 인간의 실패가 이 땅에서 인생을 너무나 타락하게 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 분에 의한 급격한 변혁만이 모든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자라났다.
구약성경은 하나 이상의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동참을 강하게 강조한다. 이상적인 미래에 대하여 구약성경이 묘사하면서 인간 편의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인간 존재를 상상한 때가 한 번도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 신세계에 능동적으로 동참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3) 구약성경의 종말론은 개인적인 구원보다는 인간 공동체를 더 강조한다. 이것은 현재의 기독교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나 현대 개인주의에서 강하게 강조되는 가르침과 대조되는 입장이다. 우리는 기독교 종말론이 죽음 후의 개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에 반하여, 구약성경은 그러한 관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주 이스라엘의 종교인 구약의 단점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이 포로 후 기간 동안에 일어나 오늘날까지도 계속 느껴지는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분명히 불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문제를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구약성경이 삶의 문제들을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 불충분성은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은 개인의 구원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의 삶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라는 진리를 강하게 강조한다.
4) 구약성경의 종말론은 포괄적인 소망이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지금 빠져있는 이러한 혼란을 창조한 바로 그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 구조를 개량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구원이 어떻게든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이사야의 종말론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강조한다.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처소와 거룩한 백성을 결합시키면서, 예배 중심지와 이 예배 중심지에 거하는 백성들을 서로 연합시켜 주는 하나의 상징임이 분명하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먼저 시온의 회복이 선행되지 않은 채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오직 여호와의 현존만이 이스라엘을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 새 이스라엘로 창조하신다. 주로 이사야 40-66장이 최종적인 종말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왕이나 성전에 대해 언급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사야가 바로본 시온의 이상은 의로운 백성들의 온전한 공동체-온 열방이 깃발을 향해 몰려오게 될 것이다-를 향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었다. 하나님의 적당하신 때에 정체 모를 한 종이 나타나 그의 죽음을 통해 새 시대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사야서나 소선지서의 종말론적 형태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예루살렘을 향한 시온의 갈망과 소망이 창조와 구원에 이르는 모티브가 형성되는 것이다. 시온으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에 대한 시온의 전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말론의 형태가 이사야서에서는 역사적인 형태로서 여러 부분에서 민족적 멸망과 쇄퇴를 거듭하면서 멸망을 보여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왕국, 그 날, 옛출애굽과 새출애굽, 새 하늘과 새 땅, 이전 일과 새 일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역사적인 멸망과 더불어 하나님의 시온에 대한 열망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도래가 메시야적 예언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선지서의 경우에는 이사야서와 같은 내용으로 동일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예언적인 종말론의 형태로 시온에 대한 갈망과 소망, 구원을 같이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소개가 종말론적으로 나타내어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들에게 멸망이 주어져 있지만 또한 이들에게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언약이 주어져 있는 것이 종말론의 전재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본 글은 교수하시는 황건영교수님의 책을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발췌하여 정리하고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른 참고도서들을 찾아보기는 하였지만 충분한 자료가 되지 않아 교수님의 책을 통하여 이사야와 소선지서의 종말론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종말론적인 신앙의자세 (0) | 2018.09.06 |
---|---|
[스크랩] 재림 신앙 (0) | 2018.09.06 |
[스크랩] 바울 윤리의 기초 (0) | 2018.09.06 |
[스크랩] 창골산 칼럼 제3685호 / 믿음이란 무엇인가? (0) | 2018.09.05 |
[스크랩] 창골산 칼럼 제3683호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두가지 (0) | 2018.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