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문턱도 밟은 적이 없는 우리 앞세대 산골 아낙이 절기를 어떻게 느끼고 이웃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이처럼 잘 보여줄 수 없다. 우리 제도 교육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들로 채워져 왔는가를 반증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조은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연말이 가까우면 서점을 한 번씩 둘러보게 된다. 올해는 좀 일찍 서점에 들렀다. 뭔가 막막함에 부닥칠 때는 서점으로 가는 발걸음이 발동했다. 대형 서점에는 현란한 제목의 책들이 그득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넘쳐난 한 해답게 정치·경제·역사 쪽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즐비했고 인문학 쪽에도 촘촘한 사유의 책들이 빼곡했다. 한 권만 사서 서점을 나왔다. 이옥남 할머니가 쓴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책이다. 들춰보다 “낮에는 뻐꾹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하고 밤에는 솟종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 같은 단순한 몇 구절에 끌렸다. 맞춤법이 여기저기 틀린 것도, 여백이 많은 것도 마음이 갔다. 1988년부터 글자 좀 반듯하게 써볼 셈으로 그날그날 몇 자 적다가 30년이 되었다.(할머니의 글자 연습 공책을 사다 준 손자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할머니 일기를 묶었다.)
어느 봄날에는 “오늘은 망태 세 개 매고 삼태미 두 개 매고 밭에 풀 좀 매고 어찌나 춥든지 얼른 들어왔지. 앞마당 끝에 해당화 꽃나무는 봄을 재촉하는 이때 잎이 뾔족뾔족하게 파랗게 나면서 빛을 띄운다. 각색 풀잎도 때를 찾아 피우기 바쁘다. 사람은 춥다지만 풀과 꽃은 때를 놓칠까 바쁘게 서둔다”고 쓰고, 어느 여름 일기에서 콩밭을 매면서 “풀 아니면 내가 뭣을 벗을 삼고 이 햇볕에 나와 앉아있겠나” 하며 콩밭에 난 풀에 고마워한다. 가을 어느 날 일기는 “중국 갔던 막내가 왔다 가고 혼자 남아 있어 고요한 밤에 풀벌레 우는 소리만 쟁쟁하게 나는구나”라는 단 두 줄이다. 눈 내린 겨울에 “눈이 허연데 새들은 뭣을 먹고 사는지 괜히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느라고 잠을 설칠 때도 있다”며 “그것도 목숨 가진 짐승인데 뭣을 먹어야 살지”라고 걱정한다. 출판계에서는 ‘100세 시대’를 바라보며 등장한 노년들의 글쓰기 장르쯤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이 듦에서 나오는 어떤 지혜를 나누겠다고 생각해서 쓴 글이 아니다. 군대 간 아들이나 타지로 간 딸에게 삐뚤삐뚤 편지 보낸 게 걸려 글자 연습 삼아 그날그날 생각나는 몇 자를 적었을 뿐이다.
도라지를 팔아 글자 연습 공책을 사고는 했던 이 할머니 글에는 돈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여러 가지 여운을 남긴다. 삼천 원에 나물 팔고 기분 좋아하거나, 사위가 와서 오만 원을 어디에 슬쩍 놓고 간 데 감동하고, 이웃 새댁이 놓고 간 고등어 세 마리에 고마워 어쩔 줄 모른다. 봄이 오자 앞밭에서 “나생이, 쑥, 달래, 고들빼기 네 가지 나물을 캐서 아침 7시 차를 타고 장에 나가 신문지 깔고 몇 무더기를 만들어” 만오천원쯤 만들 생각이었는데 장사꾼 여자가 오더니 덮어놓고 주워 담고는 만 원 주고 가버린 것을 놓고 “앉아 팔면 만오천 원은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덜 받으면 장사꾼 여자가 좀 이문이 더 남을 거고 나는 집에서 일하고 내가 받을 것을 다 받으면 내가 일 못 하고 장사꾼은 뭣을 남기랴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고 쓴다. 2018년에 아흔일곱이니 2003년 3월 여든둘에 쓴 글이다. 미국의 초월주의 사색가 헨리 소로가 24년간 쓴 일기 〈매사추세츠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잠깐 떠올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읽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사유를 정리한 글과는 다르다. 일기를 쓰는 데는 오만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순히 글자 연습 하느라 쓴 일기는 처음 본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록물로서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학교 문턱도 밟은 적이 없는 우리 앞세대 산골 아낙이 절기를 어떻게 느끼고 이웃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이처럼 잘 보여줄 수 없다. 우리 제도 교육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들로 채워져 왔는가를 반증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아흔일곱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여태껏 꺼내본 적이 없는 내 어떤 기억도 소환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보내주셨던 편지 봉투가 그렇게 떠올랐다. 고1 때부터 3년간 국어를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내가 대학 갔을 때 첫 편지에 우표를 수북이 넣어 보내셨다. 편지를 열었을 때 햇살처럼 쏟아졌던 우표들! 내가 대학 다니는 동안 썼던 모든 편지에는 그 선생님의 우표가 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서울로 대학 간 지방 학생에겐 우표 값도 아껴야 했던 때다. 선생님은 내게 서울대 문리대 여학생들은 너무 진지해서 소리 내어 웃지도 않는다는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신 분이다. 그 선생님은 동숭동 교정(옛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정을 붙이기도 전에 6·25가 터져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니셨다. 영어 선생님 생각도 함께 따라왔다. 영어 선생님은 휴전협정이 되어 동숭동 교정에 복귀해서 대학을 다니셨는데 두 분은 함께 나를 불러 그런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셨다. 대학에 와보니 크게 웃지 않는 여학생이 없어 일순 당황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확정된 해에 대학에 입학한 우리들은 물질적 풍요를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캠퍼스는 화사한 옷차림의 여학생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군홧발이 대학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영국 문화 연구자 리처드 호가트가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를 쓴 책 〈The Uses of Literacy〉는 우리말로 〈읽고 쓰기의 효용〉 또는 〈교양의 효용〉으로 번역된다. 읽고 쓰는 문해력이 교양의 영역임에 동의하지만 이 할머니 일기를 읽으면서 ‘읽고 쓰기’라는 말에 ‘쓸모’를 붙여 써본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 국정감사에서 ‘경제위기’라는 용어 사용을 놓고 때아닌 ‘문해력’ 논쟁에 주먹다짐까지 가는 뉴스 화면을 보았다. 우리 사회 식자층에서 ‘문해력’의 수준이 우려할 수준임은 분명하다. 얼마 전 토요일 오후 광화문에서 약속을 잡았는데 후배가 오는 길이 바빴지만 인류학자로서 놓칠 수 없는 팻말이어서 찍었다며 사진 몇장을 보여줬다. 내 눈길을 끈 한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 자식은 미국 유학 니 자식은 촛불 데모.” 흠잡을 데 없는 옷차림에 당당하게 든 팻말 그리고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선글라스도 모자도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잠깐 심호흡을 하면서 읽고 쓰기의 쓸모를 생각했다. 마침 사무실에 들른 제자한테 그 팻말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게 자랑이라고 들고 있을까요 창피한 건데” 하며 한심해했다. 그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에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내 막막함의 정체는 우리 사회가 무엇이 자랑할 일인지, 무엇을 감춰야 하는 일인지 분별력을 잃은 데서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가 이 할머니의 책을 집어든 것은 내 안의 낭패감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남북 회담이 열리고 북-미 회담도 열렸고 남북 정상이 분단선을 넘나들고 있는데도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 이상한 열패감에 묶인 불안도 한 축에 있지만 그보다도 30여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는데 최근 연이어 터지는 교육계 사건들을 보면서 가르치는 업에 대한 낭패감이 막막함으로 전이된 불안감도 한몫한 듯하다.
한 해의 마무리에 이런 글이 어떻게 책이 되냐고 묻는 이옥남 할머니의 책을 집어든 것은 뻔뻔함에 오염된 눈과 귀를 정화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도 읽고 쓰기의 교양적 효용을 잃어가는 사회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순박한 삶에 바치는 헌사로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소소(昭昭)한 글쓰기의 여백에 우리는 어떻게 빚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이 글을 끝내가는 시점에 <1991, 봄>이라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거기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쓴다’는 말이 아프게 폐부를 찔렀다. 읽고 쓰기의 쓸모를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