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기의 탄생과 축복
이사야 9:1-7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축복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평화와 사랑의 좋은 소식이 성탄절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8년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3차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한반도에 긴장이 완화되고 북미 정상들이 1차에 이어서 2차 회담을 추진하는 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간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려운 경제상황과 진보와 보수의 갈등,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갈등, 부정과 부패,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나는 각종 사고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저는 최근에 일어난 강원도 강릉 펜션 사고와 화천에 아들을 면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운전하던 아버지가 중태에 빠지고 아내와 두 딸이 죽고 아들의 여자 친구가 죽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이 세상의 일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떻게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주변의 삶을 보면서 야고보 장로가 표현한대로 우리의 삶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 앞에 아기 예수의 탄생이 무슨 의미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이 과연 우리 인생길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도 그렇게 좋은 편이 못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는 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앗수르의 속주로 편입시켜 버리고 맙니다.
졸지에 땅을 빼앗겨 버리고 앗수르를 섬기면서 불안해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그 나라를 회복하고 빼앗겼던 이방의 갈릴리 지방을 영화롭게 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의 등장은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흑암에서 빛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요 희망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과 희망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게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대를 걸고 대통령을 뽑지만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하고 다 연약하고 다 한계가 있기에 우리를 실망시킬 뿐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만큼 실망도 크고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발전된 과학문명과 기술도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결국은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인간을 기계에 예속시키게 됩니다.
더군다나 많은 물질과 돈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제도가 어떤 특정한 문명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세주 메시아인 줄 믿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소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소망이요, 이스라엘의 희망일 뿐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잡혔음을 듣고 갈릴리로 물려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면서 오늘 본문인 이사야 9장1, 2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사모하고 기다렸던 구세주 메시아입니다.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요 소망이요 생명이요 평안이요 길인 줄 믿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는 그 메시야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요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했습니다.
정사를 메었다는 말은 ‘다스린다, 행정 한다.’는 뜻입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분은 지상의 삶에 대하여, 또한 우리의 생애에서 통치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합쳐서 기묘한 모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모사라는 말은 상담자 카운슬러라는 뜻입니다.
기묘한 모사는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로 따라잡을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기기묘묘한 계획들을 세워간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내 삶에 대해서 가장 선하고 좋으신 뜻대로 계획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 이름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조금 어색합니다만 이 말의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에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역할, 생명을 주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그런 기능을 메시아가 오시면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시면 그 분은 평강의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분이 바로 아기로 오시는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신 메시아는 이런 분이십니다.
비록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왕이시며 기묘자요 모사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그 분은 우리에게 희망과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에게 큰 빛을 보게 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일본의 가가와 토요히코(하천풍언)는 시장의 소실 태생으로 본처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는데 형제들이 얼마나 그를 구박했는지 모릅니다.
‘저런 것이 왜 태어나 가지고’ 라며 서자인 그를 무시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고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먹고 입는 것은 넉넉했지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절망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어느 해 성탄절이 가까운 겨울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무룩한 모습으로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토요히코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감옥에 있는 죄수라도 사랑하십니다. 누구나 다 사랑하십니다.”
토요히코는 소망을 가지고 당장 그 대열을 따라 나섰고 마침내 예수를 믿고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러분, 메시아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주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 분은 평강의 왕이시며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줄 믿습니다.
험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세상을 보고 한탄만 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주시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메시아 예수님만이 나의 소망이며 나의 희망임을 믿고 살아갈 때 메시아가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큰 빛이 비추인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했습니다.
지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폭력적인 앗수르의 지배로 인하여 고통과 어둠과 멸시와 사망이 짙게 드리워져있었습니다.
이 어둠속에서, 폭력과 고통 속에서 그들은 신음하며 죽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를 짓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사망의 그늘에 드리워져 온갖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어둠을 따라 살아가고 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어둠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줄 믿습니다.
어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고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빛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나라를 창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성하다’는 말은 ‘힘과 세력이 커지고 일이 번성한다.’는 뜻입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되면 나라가 창성하고 일이 번성하고 가정이 번성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물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심는 대로 거두는 창조의 법칙이기에 이 법칙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번창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번성하고 잘 되는 것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지 못하면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창성하게 될 수 없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정이 흔들리며 무엇을 시도해도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창성함이 있습니다.
창성함을 주시는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즐거움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3절에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즐거움을 농부가 추수할 때의 즐거움과 병사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 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즐거움이 왜 나타납니까?
그들이 무겁게 맨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즐거움을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의 12만 군사를 물리칠 때 기드온 군사는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의 군사적 압박에 농사짓는 것을 다 빼앗기고 숨어서 타작하여 겨우 끼니를 잇고 살아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미디안의 압제를 벗어났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악한 마귀와 사탄의 압제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와 사탄의 압제에 시달리면 우리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우리는 사탄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전쟁을 그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메시아 되시는 아기 예수를 영접하게 될 때 우리 가운데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분명 평화입니다.
천사들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노래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되 마음의 평화를 주시고 가정에 평화를 주시고 국가 간의 평화를 주시고 민족 간에 평화를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메시아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그 분이 주시는 축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위하여 우리가 늘 주님 중심으로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줄 압니다.
우리에게 나신 아기 예수, 우리에게 오신 아들 예수를 믿고 의지하며 그 분 중심으로 살아서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8.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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