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디터“밝고 힘차게, 원더우먼처럼 찍어주세요.”<한겨레21>(1241호) 표지이야기의 맨 첫줄에 나온 서지현 검사의 말을 읽고 가슴을 한대 퍽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눈물 바람으로 방구석에 처박혀 해결의 손길을 기다려야 한다는 통념을 깨기 위해 그가 지금도 얼마나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는가 느껴져서다. 지난 22일 개그우먼 이영자가 <한국방송>(KBS) 연예대상 수상자로 호명되어 무대에 올라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서 검사의 인터뷰 대목이 다시 떠올랐다. 어쩐지 연초 서 검사의 그 놀라운 폭로가 연말 이씨의 수상으로 이어진 것만 같았다. 여성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피해 폭로와 개그우먼의 연예대상 수상.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점에서 점 잇기지만 정말 두 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을까. “살아, 살아, 내 살들아~” 1990년대 초 데뷔한 이영자는 이 유행어로 떴다. 뚱뚱한 자신의 몸을 훑으며 외치는 이 절규(?)는 이씨를 단박에 스타로 올려놨다. 자연스럽게 개그우먼 이영자에게는 뚱뚱한 여자, 물색없이 남자들에게 들이대는 여자라는 캐릭터가 자리잡았다. 그는 이런 캐릭터 구축을 위해 이유미라는 본명 대신 이영자라는 가명을 썼다. 데뷔하기 전 거친 밤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입담이 방송가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영자는 유재석이나 강호동처럼 웃기고 센스 있게 진행도 잘하면서 주변 사람을 잘 이끄는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없었다. 사회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오죽하면 남자들끼리만 끌어주고 밀어주는 풍토를 견디지 못해 그는 선배인 이경규를 치받고 방송에서 하차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다이어트 광고 논란 등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이영자는 10년 동안 가라앉았다. 물론 그의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건 사고에서 그는 그가 한 잘못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비난받고 놀림감이 되었다. 여자, 뚱뚱한 여자, 물색없이 들이대는 여자는 누구에게든 너무나 씹기 쉬운 안줏거리였다. 이후 바닥부터 다시 명성을 쌓아올린 데는 그의 뛰어난 실력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특히 올해 들어 ‘#미투’를 통해 확 피어난 여성들의 연대를 빼놓을 수 없다. 올여름 한 방송에서 이영자의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공개됐다. 그의 몸은 여전히 건장했다. 그러나 그걸 두고 “살아, 살아, 내 살들아”라고 철 지난 유행어를 되새긴 사람은 없었다. 여성의 신체를 눈요깃거리로만 소비하는 풍토는 남아 있지만, 적어도 그걸 떠벌리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미투 이후 많은 이들이 자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 장면이 공개된 프로그램은 이영자와 그의 친구인 김숙, 송은이, 최화정이 진행하는 <밥블레스유>였다. 사회생활을 겪을 만큼 겪은 40대 이상의 여성들이 ‘남이 해주는 (식당) 밥’을 먹으며 나누는 유쾌하고, 때론 신랄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이 프로그램은 올해 여성들의 대표 힐링 프로그램이었다. 남자들의 시선이나 평가, 맨스플레인을 말끔히 거둬낸 프로그램에서 이영자의 솔직한 노출은 그 자체로 짜릿한 쾌감을 줬다.이영자는 몸으로 웃음을 만들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몸매로 이제 많은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이나 강호동에게만 허락된 것 같았던 역할을 한다. 많은 여성이 회식 자리에서 나이 든 남자 상사 옆에 앉아 술을 따르며 때로 허리나 허벅지를 잡혀도 그저 사회생활이려니, 동료 남성들이 동료 여성들의 몸을 노골적으로 품평하고 성희롱을 해도 그저 농담이려니 넘어가야 했던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서지현 검사는 아직도 싸우고 있지만, 그의 싸움이 많은 여성에게 ‘밝고 힘참’을 선물한 2018년이었다.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