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강좌시리즈 2권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을 요약정리하였습니다. 교리공부 자료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제 13장 회개 Repentance
1. 회개의 의미 - 라틴어에서 온 단어 repent의 의미는 ‘다시 생각하다’의 뜻.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신약 성경 원어인 헬라어 단어는 metanoia (메타노이아)인데 이 단어는 ‘다시 생각하다’ 외에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다’라는 의미가 추가되어 있다. - 회개에는 ‘후회’하는 요소도 있지만 ‘행동의 변화’도 반드시 포함된다.
2. 회개의 근원 2.1. 하나님의 은혜 - 무엇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가? : 효력 있는 부르심 - 회개는 사람들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물 -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스가랴 12:10) 이 은총과 간구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 -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2.2. 말씀을 통한 복음 전파 -하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말씀 선포, 교육)과 전파하는 것(전도)을 통해 이 일(회개)을 이루심. -예) 요나의 설교를 통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한 유대인의 회개 “나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살전 1:9)
3. 회개에 관여하는 영역 -오늘날 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회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 사람들이 회개의 의미 를 모르면서 서둘러 결정을 내리고 있다. 3.1. 회개에는 전인격이 관여한다 1)지성 -청교도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적용하기에 앞서 소위 “철저한 율법의 작용(law-work)"이 행하는 것의 가치를 믿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정말로 죄를 자각했는지에 대하여 꼼꼼히 확인했다. -“율법의 작용”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은 죄의 넘치는 죄성을 보여 주기 위해 주어졌다.(롬 7:13) -회개에 대한 설교는 지성(intellect)과 오성(understanding)으로부터 출발한다. -지성과 마음을 배제한다면 율법 역시 배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2)감정 -회개에는 언제나 감정이 개입한다. -회개에는 언제나 감정이라고 하는 강력한 요소가 언제나 있어야 한다. 감정이 없다면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다만 가슴을 치며”(눅 18:1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고후 7: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10)
3)의지 -뭔가 행하라. 죄를 인식하고, 율법의 작용이 일어나고, 마음이 변화되고, 생각했다면 이제 행하십시오! -너무 활기차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탄식해 본 일도 없고, 그런 감정을 느껴 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너무 가볍다. 그것이 교회의 문제이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사 55:7)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눅 3:8)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이르되 부과된 것 이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0, 12, 14)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살전 1:9)
4. 회개의 주제 4.1. 하나님 자신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 변화된 견해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4.2.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걱정할 것 없고, 만사가 잘 될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회개 할 때 이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삶 자체와 삶의 목적,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됨. -죽음과 영원을 바라보는 관점에 커다란 변화가 생김 -회개는 전인뿐 아니라, 이생과 이 세상에서 가치 있고 관심을 가질 만한 모든 것에 대해 그 사람이 가진 견해 전체를 포함.
5. 회개의 결과 5.1. 하나님에 대한 견해와 생각의 변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진정으로 알게 됨.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생긴다>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행한다. 사도행전에 신자들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행 9:31) 행했다고 기록됨. -신약성경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히 12:28)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함. -경건한 두려움 : 주님을 기뻐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경외하는 것.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알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도 안다. 공의와 자비가 한데 만난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공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둘은 같이 만난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공의가 온전히 만족되고 사랑이 흘러넘친다.
5.2. 죄의식과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시 51:5-7)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이전에 이런 더러움을 느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일이 있습니까? -위대한 성도일수록 그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더 깊이 회개한다. -산상수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 이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자들입니다.
5.3. 인생에 대한 관점의 변화: 거룩함의 추구 -죄에 대한 미움을 느낀다. 죄 된 행동들과 죄 된 본성을 알 뿐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합니다. -거룩함의 아름다움, 의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본다. -그들은 세상과 가까이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거룩해지기를 소망한다. 5.4. 구원을 열망하여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함 -회개는 죄로 인한 슬픔과 비탄을 낳아야 한다. 회개는 자기 혐오, 즉 자신의 죄된 본성에 대한 미움을 포함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자기혐오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고, 이어서 구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도록 만든다. -이어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을 갖게 된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여.........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다. 그 순간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간구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회개의 정의이다.
6. 회개와 후회의 차이 -회개는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회개에 이르지 않은 근심도 있을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바로 이것이다.]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고후 7:9-11)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으며 그분께 상처를 입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회개는 우리가 더러워졌으며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나는 하나님을 슬퍼하시게 만든 죄들을 미워합니다. 그 죄는 하나님을 나의 가슴에서 멀리 몰아 냈습니다.” -윌리엄 쿠퍼- -회개는 죄를 없이하고자 하는 열망과 결단을 줍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를 바라고 의롭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기를 갈망하게 만든다.
-후회는 소극적이지만 회개는 적극적이다. 오 내 마음이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마음 그처럼 값없이 나를 위해 흘려 주신 당신의 피를 언제나 느끼는 마음 -찰스 웨슬리- 0 공감 0 이 글에 공감한 블로거 열고 닫기 댓글쓰기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운다. 백금산 목사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 일반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마지막 청교도’,‘마지막 웨일즈 칼빈주의 메도디스트’,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 ‘20세기 복음주의 지도자 5인(로이드 존스, 제임스 팩커, 존 스타트, 프란시스 쉐퍼, 빌리 그래함) 가운데 한 사람’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마다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로이드 존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1)는 우리로 하여금 로이드 존스를 연구하고,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충분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
로이드 존스가 미친 영향력의 핵심 로이드 존스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로이드 존스는 이레네우스와 오리겐 같은 교부도 아니요, 루터와 낙스처럼 위대한 개혁자도 아니요, 존 웨슬리나 도슨 트로트맨처럼 어떤 교파나 선교단체를 창설한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어거스틴이나 칼빈같은 뛰어난 신학자도 아니었으며, 윌리암 케리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위대한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일까? 물론 로이드 존스가 당대의 영국 복음주의 교회에 미친 영향은 다양했다. 그는 1950년부터 시작된 매해 크리스마스 전 화.수 이틀간 6개의 강의 토론을 하는 모임인 웨스트 민스트 대회를 통해서 개혁신학 특히 청교도 신학에 대한 관심을 영국에 새롭게 불러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1달에 한 번 모이는 웨스트 민스트 목회자 모임을 통해 영국의 400여 목사들의 목사로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I.V.F로 많이 알려진 국제 복음주의 학생단체의 설립과 기초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뿐만아니라 영국의 젊은 목회자들이 ‘우리는 진리의 깃발사(배너오브트루스)의 자식들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청교도 신학의 원전들을 수없이 많이 복간해낸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 ‘배너오브트루스’(Banner of truth)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런던신학교와 청교도 신학의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복음주의 도서관 설립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러한 많은 공헌은 이중 한가지만 하더라도 훌륭한 업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로이드 존스가 미친 영향력은 근본적으로 그의 설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로이드 존스와 또한 그의 설교만이 아니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에게서 더 많은 것들을 교훈받을 수 있다.
나와 로이드 존스와의 만남, 나는 로이드 존스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또한 한 번도 직접 그의 설교를 들어 본 적도 없다. 그가 활동했던 무대는 영국이었고, 그의 생존연대(1899-1981)는 거의 20세기와 더불어 시작되어 20세기의 끝무렵에 마감되었으니 나와는 두 세대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막 대학생활을 시작한 때였으므로 그 때 아직 나는 로이드 존스의 이름을 듣지도 못했었다. 내가 처음 로이드 존스를 접하게 된 것은 신학 대학원 3학년 시절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였다. 로마서 강해를 몇장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너무 논리적이고 딱딱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짧은 본문을 가지고 너무나 길게 설교해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설교집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못했던 나는 곧 그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이드 존스의 부흥을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왔던 교회의 모습과는 다른 교회의 모습이 그 책에 그려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부흥된 교회의 모습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새로운 신앙세계였고, 너무나 놀라운 교회의 모습이었다. 로이드 존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변했다. ‘이런 설교를 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 단순히 지적인 놀음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로마서 강해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2권씩 로마서 강해 8권과 에베소서 강해 8권을 독파해 나갔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감동, 감격, 희열, 감사... 나에게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에 로이드 존스가 쓴 모든 책을 구해서 읽게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복음과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나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목회와 설교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신학대학원 3년간 배운 것보다 더 크고 심오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와같이 나는 로이드 존스를 읽으면서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 중의 중요한 몇가지는 다음의 다섯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목회자인 우리 모두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첫째.설교에 목회자로서의 목숨을 걸라 우리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설교의 중요성과 우선성에 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에서 제일 큰 개혁주의 교회가운데 하나인 웨스트 민스트 채플에서 약 30여년간 행한 설교를 통하여 설교가 무엇인지를 20세기 교회에 보여주었다. 목사로서의 목회사역가운데 설교는 다른 것과는 대체할 수 없는 목사의 고유한 직무이며, 가장 최우선적인 직무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로이드 존스이래 20세기 후반의 교회는 성경의 한 책을 연속 강해하는 설교 붐이 일어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목회설교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목회는 분명 설교하는 것 이상의 많은 영역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우선순위는 무엇보다도 설교사역이라는 것을 로이드 존스는 우리에게 아주 웅변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설교를 듣는 사람도 설교를 통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설교시간에 임하는 것이 오늘의 많은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변화시켜오셨는지에 대한 확신을 교회역사를 통해서 또한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로이드 존스는 오늘날 설교에 대한 불신과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설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설교자로 부름받은 자신의 소명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또한 설교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확신가운데 이 세대의 수많은 방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설교사역에 자신을 전력 투구하도록 격려한다. . 둘째.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로이드 존스를 통해 우리는 부흥에 대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도전받게 된다. 로이드 존스는 작게나마 그의 에버라본 시절 목회현장에서 부흥을 경험했고, 평생토록 부흥이 다시금 자기시대의 교회위에 임하기를 기도했다. 그는 자기를 18세기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8세기는 그에게 있어 부흥과 각성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영광스러운 경험을 한 시대였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휘트필드, 하월 해리스, 다니엘 로랜드,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였다. 존스가 말하는 부흥이란 소위 ‘부흥회’나 ‘전도집회’ 또한 ‘교회성장’이나 ‘교회개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부흥은 한마디로 오순절 성령부으심의 반복이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이 볼수 있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하심이기도 했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고 있는 부흥에 대한 시각을 통해 그동안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던 여러 가지 운동들 즉 제자훈련, 귀납적 성경공부, 강해설교, 전도폭발, 경배와 찬양, 은사집회등등 끝없는 각종 프로그램과 방법과 수단들을 통해서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했던 우리를 노력들을 정직하게재평가하고,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또한 교회의 문제에 대한 피상적인 진단과 피상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책에 대한 시사를 받게 된다.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이 난무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부흥은 죽은 교회를 살리고, 잠든 교회를 깨우며, 무기력한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로이드 존스의 강조점은 우리가 충분히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통해 부흥을 위해 기도할 분명한 이유와 목표를 배우게 된다.
세째,교회사를 읽어라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로이드 존스의 해박한 교회사에 대한 지식 특히 청교도와 부흥사와 신앙위인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사는 신학교 다닐 때 배우던 과목의 하나이거나 교회사 교수만이 독점적으로 공부하는 분야로 남기 쉽다. 그러나 목회일선에 있는 목회자 자신이 교회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형편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형편을 다른 시대의 교회와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비교시각을 가질 수 있게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 현실의 장. 단점을 깨닫게 되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또한 무엇인 전통적인 것인지를 분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역사하신 시대의 교회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목표와 방향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면에서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고 있는 교회사의 중요성 특히 모든 시대의 교회의 모범이 되는 청교도 시대와 부흥시대의 교회모습을 우리가 잘 아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통하여 오늘의 현실을 해석하고, 나아가서 내일의 한국교회를 만들어가는 가장 좋은 자원이자 이정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넷째, 조직신학의 기초를 닦아라 우리는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목회자와 설교자에게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된다. 로이드 존스가 로마서 강해와 같은 엄청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직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 로마서 강해는 조직신학을 로마서 본문을 통해서 가르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직신학은 성경전체를 하나로 통일시켜주고, 성경전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교리는 사실 성경해석의 열쇠요, 우리 경험의 지표가 된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회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실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조직신학의 중요성에대해서 그리고 교리공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무시하고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교리는 지루하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말고, 성도들의 생활에 관련된 흥미있는 주제를 설교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 결과 성도들의 신앙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편협하게 흐르는 한편 교리와 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성도들에게는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또 한편 인류역사 전체를 주관해가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일하심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성경론,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등의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주제들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야 할 필수적인 내용들이다. 이러한 교리적 내용들은 사실 성경이해와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본기와 뼈대라 할 수 있다. 모든 분야에 있어 기본기가 튼튼해야 하듯이 이렇듯 신앙과 삶에 있어서도 기본기와 같은 그리고 뼈대와 같은 교리적 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사역들을 통해서 이러한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되고 전통적인 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배우게 된다.
다섯째.균형잡힌 독서를 하라 20세기 최고의 목사요,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는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영국의 제일 촉망받는 의사로서 인정받고 있던 중 목회자로서의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곧바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목회 일선에 뛰어들게 되었고, 장로교 계통의 한 노회에서 많은 논란 끝에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과정을 초월한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어떻게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유산과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 교회의 가장 탁월한 목회자요 설교자요 신학자로 우뚝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가? 이는 매우 궁금하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질문이다. 이 비밀은 로이드 존스의 독서생활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신학교나 마찬가지였고, 그가 읽은 책의 저자들은 그에게 스승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교에서 살아있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었으나, 책을 통해서 2000년 교회사의 가장 훌륭한 신학스승들로부터 자신의 신학과 목회를 배웠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독서는 분량과 분야에 있어서 놀라운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그중에서도 교회의 부흥사와 부흥시대의 중심인물들 그리고 청교도신학과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전집등이 로이드 존스가 가장 애독한 책의 목록들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딸이 자기 아버지를 기억할 때, 독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로이드 존스는 독서를 많이했다. “부친하면 우리는 독서를 연상합니다. 물론 저의 부친은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책을 읽었습니다. 읽어도 애독을 하였고, 정규적으로 읽었으며, 많이 읽었습니다”.2) 책이란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느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자들에게 균형잡힌 독서를 권한다. 그가 말하는 균형있는 독서가 무엇인지 그의 말을 직접들어보자. “균형있는 독서를 하십시오. 균형이 깨진 독서처럼 거짓된 지식을 낳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신학서적만 읽는다면 이러한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균형있는 식사를 하듯이 독서에서도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제가 겸손하게 말씀드린다면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신학서적과 전기 읽는 것을 서로 균형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렇게 했습니다. 항상 휴일에 그랬고, 매일같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특히 휴일 아침에는 신학책을 읽고 밤에는 전기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3) 목회자에게 있어서 독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신의 목회사역에 정말 유익되도록 독서를 잘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편식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만을 골라 읽기 쉽고, 정말 자신의 신학과 목회에 뿌리와 뼈대가 되는 책을 꾸준히 읽기 보다는 당장 급하게 써먹을 수 있는 책들만을 읽기가 얼마나 쉬운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가슴을 위해서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제시하는 경건서적과 신학서적을 균형있게 읽는 지혜가 있어야함을 배우게 된다.
어떻게 로이드 존스를 접근할 것인가? 로이드 존스를 접근하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1600개이상 남아있는 그의 설교 테이프를 통해서 그를 이해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병행해서 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간적, 금전적, 어학의 문제등 여러 가지로 인해 그의 테이프를 듣고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그래서 본고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는 아직까지 로이드 존스를 접해보지 못한 독자나 로이드 존스를 체계적으로 알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다음의 순서를 제안한다.
먼저, 먼저 로이드 존스에 대한 전기를 읽어라.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서전이나 전기 읽기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먼저 로이드 존스의 전기를 읽어보라. 전기를 통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고, 그의 삶과 사역을 이해하는 배경을 알게 되며, 그의 신앙과 신학의 성장과정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는 그의 외손자인 캐서우드(Catherwood)가 쓴 전기4)와 로이드 존스 밑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후에 ‘베너오브트루스’출판사를 이끌며 전기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이안 머레이(Iainh Murray)가 쓴 전기5)가 있다. 캐서우드의 전기는 간략한 것이 특징이고,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친밀성을 가졌던 경험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장점이 있다. 이에반해 머레이의 전기는 두권으로 된 아주 방대한 분량이 특징이며,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사역을 아주 상세하고도 밀도있게 그려낸다는 장점이 있다.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해서 볼 수 있으나 두 종류의 것을 다 본다면 더욱 도움이 되겠다.
다음으로,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다음 4권의 책을 먼저 읽어라. 이 4권의 책들은 로이드 존스의 중심사상을 바로 이해하고, 그의 다양한 면모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입문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목사와 설교6)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는 설교에 관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이미 고전에 속한다. 이 책은 로이드 존스가 1968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트 채플의 설교사역을 마감한 후, 1969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6주 동안 행한 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20세기 최고 설교자의 44년간의 설교사역의 진수가 들어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온 설교에 관한 책들 가운데서도 이 책이 다른 설교학 책들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움을 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다음의 2가지다. 하나는 이 책의 진가가 설교의 기법과 방법을 가르쳐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로 하여금 참된 설교가 무엇이며, 목회사역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설교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에서 무엇보다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 즉 인간의 준비와 노력이상의 신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감동적으로 제시하는데 있다. 따라서 20세기 교회에 설교가 무엇인가?를 산증인으로서 보여주었던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고, 그의 설교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2.부흥7) 로이드 존스의 사상과 사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의 성령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의 부흥관을 이해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열망은 웨일즈의 에버라본에서의 초기사역(1927-1938)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트 채플에서의 후기사역(1939-1968)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과 목회사역에 있어 그의 일관된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관심사였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부흥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격이 된다. 반대로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을 파악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당대 교회 문제의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부흥’이라고 믿었다. 즉 부흥은 교회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가장 긴급하고 필요하고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로이드 존스는 기본적으로 부흥을 교회사에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부흥의 핵심을 ‘동시에 많은 사람(교회, 지역, 국가전체)위에 성령이 임하심, 찾아오심, 부어주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은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부흥관을 1959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시간에 약 6개월동안 연속적으로 설교한 것을 모은 책이다. 이 부흥에 대한 연속설교가 행해지게 된 배경은 1859년 즉 이 설교들이 선포되기 100여년 전에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미국등 영어권 사용의 전 지역에서 대규모 부흥이 있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100년 뒤에 돌아보는 시점에서, 자신이 처해 있는 영국교회의 상황과 전세계교회의 상황이 다시 한번 1859부흥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이에 대한 부담으로 이 부흥에 대한 연속설교를 토해놓게 되었다. 교회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부흥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과 부흥신학에 대한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로이드 존스의 부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흥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부흥역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로이드 존스의 가슴에서 이글거리고 있던 ‘부흥의 대한 열망의 불씨’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옮겨 붙게 될 것이다.
3)성령세례8)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는 부흥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다. 부흥이 교회적인 문맥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을 다루고있다면, 성령세례는 좀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 두 권의 책을 자매편으로 생각해서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성령세례는 1964-5년 사이에 행해진 요한복음 강해 설교의 한 부분을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존스는 이 책에서 크게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존스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성령의 부으심’,‘성령 충만’,‘성령의 능력을 옷입음’,‘성령의 임하심’,‘성령의 내리심’,‘성령을 받음’등의 용어와 같은 사건을 달리 표현하는 동의어라고 이해하면서, 기본적으로 성령세례를 ‘중생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또한 체험적, 의식적인 면에서 받는 사람과 다른 사람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명백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세례의 증거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이해 등의 주관적인 증거와 얼굴의 표정이나 전도나 설교의 능력 등으로 나타나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강하게 역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러한 성령세례를 주시기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성령 세례관은 오순절의 성령세례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관은 20세기 오순절 교단의 성령세례관이 나오기 훨씬 이전의 교회의 부흥의 역사에 그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의 부흥관과 동전의 앞 뒤면과 같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을 제대로 추적하기 위해서는 로이드 존스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는 16세기 개혁자인 칼빈, 17세기 청교도였던 리차드 백스터, 토마스 굳윈, 존 오웬 그리고 18세기 부흥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성령관을 참고로 해야 하고, 넓게는 부흥역사자체를 고려해야한다. 9)
4)청교도 신앙10)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운데 하나는 그와 청교도와의 관련성을 아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가슴이 부흥에 대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었다면 로이드 존스의 머리는 청교도 신학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설교와 목회는 청교도적인 색채로 물들어있다. 그래서 그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부르기도한다. 그만큼 그는 청교도를 사랑했고, 청교도를 잘 이해했고, 청교도를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복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청교도에 대한 연구와 적용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해마다 ‘청교도 대회’의 주강사로서 후배들에게 청교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했고, 청교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접근하게 하기위해 ‘베너오브트르스’사를 통해 청교도 원전들이 복간되는 것을 도왔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청교도에 대한 박식한 이해와 청교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청교도 신앙이다. 이 책은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트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19회분의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다. 즉 한해에 1회씩 그때 그때의 영국교회의 상황과 교회역사에 비추어 청교도가 그들에게 주는 실제적 도움을 받고자 의도된 강의다. 그러기에 그 체제와 내용은 통일성이 없고 산만하다. 따라서 이 책은 학위논문이나 연구논문처럼 학문적으로 체계 있게 청교도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교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역시 청교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주는 청교도들과 그들의 선배와 후배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 책보다 좋은 책이 없다. 이 책은 비단 청교도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존낙스, 휘트필드, 하월 해리스, 조나단 에드워드등의 교회사의 중요한 영적 거장들에 대한 전기적 관심과 좀 더 넓게는 부흥사와 교회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발시켜준다.
마지막으로, 로이드 존스의 방대한 설교집들을 보라. 지금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들은 50여권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있다. 이미 발간된 그의 설교집들은 거의 다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내용에 따라 설교를 생활체험설교와 교리설교 그리고 전도설교로 구분한다. 또한 이러한 구분에 따라 실제로 웨스트민스트 채플시절 주일오전에는 주로 성도들의 삶의 체험을 다루는 설교를, 주일오후에는 전도설교를 그리고 주중에는 교리설교를 했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파악하려고 하면, 이 세가지 유형의 설교 모두를 고려해야 그의 설교자로서의 전체를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히 그의 출판된 설교집들은 위의 3가지 유형의 설교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되며, 그의 설교집을 읽을 때는 이 설교가 어떤 유형의 설교인가를 알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만일 이러한 구분을 잘하지 않고 그의 설교유형중의 어느 한 부류만의 설교집을 통해 그를 단정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오류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로마서강해」는 교리설교의 대표적인 경우이고, 「에베소서 강해]」는 생활설교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초기 웨일즈 사역기간동안 행해진 전도설교를 모아놓은 「전도설교」를 통해서 로이드 존스 전도설교의 특징을 잘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의 설교진면목은 어떤면에서 그의 전도설교에서 더 잘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로이드 존스의 어떤 설교들도 실제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나의 멘토, 나의 평생 스승 로이드 존스 우리 시대에는 참된 영적인 스승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영적인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목회에 있어 스승을 꼭 살아있는 사람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동시대의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전시대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우리의 멘토요, 우리의 평생스승으로 삼고 그들에게서부터 진정한 목회와 신학을 배울 수 있다. 이런의미에서 로이드 존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요 스승가운데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가운데 하나며, 또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가운데 하나다. 목사로서의 나의 신앙과 신학, 설교와 목회는 로이드 존스를 알게 되므로 전환점을 맞이했고, 평생 공부와 목회에 목표와 방향설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로이드 존스를 만나고 난후 그를 길잡이로 해서 내게 큰 도움을 주는 더 많은 스승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서 어거스틴(5세기), 칼빈(16세기), 존 오웬(17세기), 조나단 에드워드(18세기), 스펄젼(19세기), 로이드 존스(20세기)를 나의 멘토요, 나의 평생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로이드 존스는 여기 한국 교회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평생 배울 수 있는 영적 거인이요, 스승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또한 그의 대부분의 책이 번역되어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다. 로이드 존스를 만나 그에게서 배워 보라. 그는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아니 참으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로이드 존스의 여러 모습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보기 위해서는 크리스토프 캐서우드가 편집한 다음의 책을 보라. Christopher Catherwood, Martyn Lloyd-Jones: Chosen by God. (Westchesrer: Crossway Books, 1986).
2.프레데릭 캐서우드, 엘리자베스 캐서우드,「마틴로이드 존스와 그의 독서생활」이중수 옮김 (서울:양무리서원, 1993), p.32.
3.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서문강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54.
4.Christopher Catherwood, Martyn Lloyd-Jones: A Family Portrate, (Grand Rapids: Baker BooKs, 1994).
5. Iain H. Murry, Martyn Lloyd-Jones: The First Forty Years 1899-1939.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2). 이안 머레이의 전기 2권중 제1권은 번역되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안 머레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초기 40년」서문강 옮김 (서울:청교도신앙사, 1990). Iain H. Murry,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2).
6.마틴 로이드 존스,「목사와 설교」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로이드 존스의 설교관에 대한 좋은 연구서로서 2권의 책이 있다. Tony Sargent, The Sacred Anointing: The Preaching of Dr.Martyn Lloyd-Jones (Wheaton:Crossway Books,1994), 정근두,「로이드 존스의 설교론: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서울: 여수룬,1993).
7.마틴 로이드 존스,「부흥」서문강역 (서울:생명의 말씀사,1988).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이 체계적으로 잘 요약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려면 1959년 청교도 대회에서 행한 ‘부흥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연구’라는 강의를 참고하라. 로이드 존스,「청교도 신앙」pp.13-35.
8.마틴 로이드 존스,「성령세례」정원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9.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에 대한 좋은 분석서로서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Michael A. Eaton, Baptism with The Spirit: The Teaching of Martyn Lloyd-Jones. ( Leicester: Inter-Varsty Press, 1989).
10. 주 4번참고. |
<딸인 엘리자베스 캐서우드가 쓴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독서에 관한 글의 요약 입니다. 출처는 다음블로그 푸우도사자료실입니다.>
로이드존스가 강조한 독서습관들
1. 부친이 우리들에게 항상 강조해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서가 마약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남편 프레데릭은 항상 코를 책 속에 박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 자신이나 혹은 앤, 아니면 우리 둘다를 가리켜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이지 한때 저는 옷을 벗거나 입으면서도 계속 책을 볼 정도였습니다! 이런 것이 저의 부친을 다소 염려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2. 책 읽기와 관련해서 부친이 분명히 지적해주었던 또 하나의 충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독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독서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러나 너희 독서 동기가 네 지식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분명히 그릇된 일이다."
3. 부친은 '앵무새가 되기 위해서 책 읽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축음기나 녹음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친은 여러 강사들이 17,18,19세기의 저술가들에게 도취되어 그들의 사상을 옛 표현 그대로 가져다 옮기는 것을 염려하곤 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야, 참 말씀 잘 하신다"라고 감탄하면 부친은 가끔 이렇게 대꾸하셨습니다. "그렇긴 해, 그러나 그저 좋은 학생일 뿐이야."
4. 또 부친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이디어를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책들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야 한다. 독서의 기능은 우리들의 생각을 자극시켜서 스스로 사고하게 하는 데 있다. 그래서 책은 읽으면서도 철저하게 소화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5.부친의 일반 서적 분야에 관한 독서는 분량과 분야에 있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분야의 책을 다 감당하는지 알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부친은 실로 광범위하게 읽었습니다. 부친은 독서의 기능을 정신적 자극으로 보았는데,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정보 제공의 기능이었습니다. 그는 관련 분야의 책들을 통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받았습니다.
6. 부친은 특히 '기본적인 사실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분야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장남인 크리스토퍼가 눈앓이를 하여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무엇인가 읽을 때 항상 노트와 연필을 준비하고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메모하는 여느 때의 습관처럼 부친은 그것을 읽으며 메모하였습니다. 부친은 담당 의사와의 협의가 끝난 후 자신의 노트를 만드시고 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친은 귀가하자마자 자신이 메모한 노트를 옆에 놓고, 매년 나오는 모든 약품들에 대한 방대한 의학 책을 펼쳤습니다. 부친은 늘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이 약품 의약서에서 크리스토퍼에게 투약된 약을 찾아내었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에 자주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 철이 들면 다 잊어버릴거야." 그러나 저의 부친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요나단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읽은 책을 세밀히 검토한 후, 무엇이 좋은 점이고 무엇이 위험한지를 지적하였습니다. 부친은 그 책을 읽었기에 요나단보다 그 내용을 훨씬 더 잘 알았습니다. 그 결과 부친이 얻은 정보를 가지고 요나단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부친에게 있어서 정보를 위한 책 읽기는 독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넓게 읽고 많이 일었습니다. 그는 각종 전기도 읽었는데, 상세하게 서술한 두꺼운 전기들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는 저 위대하고 탁월하며 비극적인 인물이었던 19세기 Newman 주교의 전기를 매우 즐겨 읽었습니다.
8. 부친은 대단히 열정적인 분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열심을 함께 나누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는 아담과 레슬링 시합 점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엘리자베스와 리아논의 학교 문제, 또는 요나단과 미국 정치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며 즐겼습니다. 부친의 이러한 자질이 그를 훌륭한 독서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관심과 열심에 합세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부친이 그들을 위해 설교하러 가는 것을 언제나 환영하였습니다. 부친은 그들의 열심에 합세하였습니다. 그 열심히 어떤 것이든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9. 부친의 독서에는 긴장 완화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책을 많이 보아 정신이 피곤해지면 이런식으로 조언합니다. "나가서 산보를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아니면 텔레비젼을 좀 보아요." 그러나 저의 부친은 달랐습니다. "정신은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적 휴식이 독서의 중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종류의 책을 바꾸어 읽도록 해라." 10. 부친은 또한 변증서들도 읽었습니다.
저는 렉섬의 하이웰 존스(Hywel Jones)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에 의하면, 저의 부친은 독서에 있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약 10년은 앞섰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저는 지난주 웨일스어로 나오는 웨일스 복음주의 운동 잡지에 실린 한 서평을 보았는데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로우렌틴이라는 사람이 쓴 가톨릭 성령 운동에 대한 훌륭한 책인데 1982년 6월에 출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스 큉을 모르다가 갑자기 그가 두각을 나타내자 그의 책을 사느라고 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부친은 다소 재미있어 하였습니다. 부친은 한스 큉을 읽고 이해했으며 동시에 그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과 그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예견하였습니다. 11. 저의 모친에 의하면 부친은 철학 서적과 같은 일반 독서를 할 때에 상대방의 생각을 본인들보다 더 잘 알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저는 위에서 이 점을 요나단과 초월 명상자와의 예시에서 지적했었습니다. 부친은 다른 저술가들을 매우 철저히 읽었기 때문에 우리들을 잘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저자가 ABCDE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부친은 그 저자가 FGHIH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곤 했었습니다.
12. 한편 부친은 일반 독서의 위험도 언급했는데 한쪽으로 편중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어떤 부분에 빠져서 그쪽 책만 계속 읽느라고 시간을 너무 쓰게 되면 스스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책들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해." 부친 자신이 늘 그렇게 하였습니다. |
로이드 존스의 저작 목록 1982년에 로이드 존스 박사의 저서들과 팜플렛의 목록이 “진리의 기수”(Banner of Truth)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그것들은 영국에서 출판된 시대순으로 되어 있고, 책의 주제와 발행자, 그리고 페이지수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로이든 존스 박사의 글이 그의 저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저술활동은 다양하여서 “진리의 기수”(Banner of Truth), “웨일즈의 복음주의지”(the Evangelical Magazine of Wales), 그리고 “크리스천 그레쥬잇”(Christian Graduate) 등과 같은 정기 간행물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연구회나 대회 보고서, 신문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찾아 볼 수 있는 저술 활동은 1929년 웨일즈 말로 된 정기 간행물인 “복음주의”(Yr Efengylydd)지에 쇼필드의 작품인 「건전한 그리스도인」(Christian Sanity)에 대한 서평, 혹은 찰스 페리의 저서인「심장 내막염 세균」(Bacterial Endocarditis, 1936)의 부록에서도 볼 수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 생존시에는 그런 글들을 모두 모아둔 저술 몰록은 만들지 못했고, 단지 저서와 소책자들만의 목록만 만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실려 있는 자료들은 모두 중히 여겨 “진리의 기수”에서 출판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는 매년 12월에 ‘교회사 연구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특별히 청교도 시대의 신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1950년 ‘교회사 연구회’가 발족되면서부터 회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폐회 연설은 반드시 그가 하였다. 1958년 이후부터는 그 ‘교회사 연구회’의 보고서들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1978년 연구지의 제목이 「존 번연으로부터의 조명」(Light from John Bunyan)이며, 그때까지 지난 20년 동안의 색인이 그 책에 실렸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또 다른 저술활동의 터전은 “웨스트민스터 레코드”(Westminster Record) 월간지였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발간하는 것이다. 그 월간지를 통해서 웨스트민스터 목사로 재직하는 기간(1938-68) 동안 행한 300편 이상의 설교가 실렸으며, 그의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시리즈가 책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그 월간지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런던에 있는 ‘복음주의 도서관’(Evangelical Library)의 대표로서 창립 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재직하였다. 1955년부터 그 도서관의 정기회합 보고서가 소책자로 나왔는데 거기에는 로이든 존스 목사의 연설이 항상 실렸다. 1969년부터는 「복음서적 도서가 회보(The Evangelical Library Bulletin)라는 소책자가 나왔는데, 그가 매해 행한 설교들이 계속 실렸다. 물론 그 도서관의 그런 활동에는 로이드 존스 박사의 역할이 막대하였다. 그는 좋은 책들을 제작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결혼선물로서 칼빈과 존 오웬의 전집을 권유하였다. 그는 자신이 독서를 열심히 한 것처럼 좋은 책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양서들을 선정하고 제작하는 분야에서도 그의 활동은 대단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웨일즈 이외의 다른 지방 출신들도 웨일즈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남긴 훌륭한 유산인 18세기의 감리교 목회자들에 관해서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감동받기를 크게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유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웨일즈의 복음주의지”(Evangelical Magazine) of Wales, 1969)에서 출판된 가이우스 데이비스 박사의 「민족주의, 전통과 언어」에서 그와의 회견 내용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박사 자신이 강의한 시리즈에 판티셀른의 찬송가 작가인 윌리암 윌리암스에 관한 것(1968)과 호웰 해리스에 관한 것(1973)이 있는데, 그 둘은 초기 웨일즈 감리교도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강의들을 통해서 “웨일즈의 신앙”을 계속 취급하였고, 랑게이토의 위대한 감리교 설교가인 다니엘 로울란드에 관해서도 적지 않게 취급하였다. 그 외에도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있는 동안 웨일즈를 테마로 하여 강의하였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한 강의들이다. 그런 것들은 “복음서적 도서관 회보”와 “진리의 기수” 같은 출판물은 통해서 볼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부인에게 판티셀른의 찬송가 작가인 윌리암스의 작품인 「경험의 만남」을 영어로 번역하게 하고 서론을 자기가 쓰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리차드 벤네트의 「호웰 해리스의 초기 생애」와 에이피온 에반번스의 「1904년의 웨일즈 부흥」, 그리고 마리 존스의 「아란의 그늘에서」의 번역서들에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04년 대부흥에 영향을 크게 끼쳤던 케리 에반스의 영적 자서전 출판에도 참여하였었고 그 후에 다시 그 책을 글린 토마스로 하여금 영어로 번역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외에도 로이드 존스 박사는 다른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엘브트 루이스가 지은 유명한 웨일즈 찬송가인 “Rho im yr hedd ”를 번역한 것인데, “복음서적 도서관 회보” 1942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요한 기독교 세계를 소개하려고 애썼으며, 또한 그 자신이 직접 큰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책들은 주문이 끊이지 않고, 계속 증판을 하고있다. 예를 들면 하박국 강해인 「두려움에서 신앙으로」(From Fear to Faith)는 13판째, 그리고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는 11판째 출판되었다. 그의 많은 책들이 미국에서도 출판되고 있으며, 그 외 다른 언어들로도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웨스트민스터 교회 시절에 출판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되어진 것이다. 1968년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사임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설교집 출판에 신경을 쏟기 위함이었다. 그의 출판활동을 1970년부터 활발하여졌고, 1970년 후에 나온 책들은 그 전에 나온 책들보다 본질적으로 폭이 넓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후기 저술이 전반적으로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시리즈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의 많은 저서들이 출판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또한 아직도 녹음 테이프에 감겨 있거나 출판되지 않은 그의 글들이 빠른 시일 내에 출판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박사님의 말처럼 인쇄 매체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의 저서 목록을 보면서 그의 저술활동은 의도적으로 쓴 책이나 논문이 아닌 연설들이나 강의들, 그리고 설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존 번연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번연을 그저 작가로만 생각해왔지만, 존 번연은 자신을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그리고 한 삶의 목사로서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그 책을 쓰게 된 것은 자신이 목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올 세대에 대해서도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향력 있고 감동을 주는 작가로서 알려지겠지만, 그 보다도 그는 본질적으로 설교가이며 목사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 저작 목록> 1. 『은혜의 기적』. 마틴 로이드 존스. (아가페문화사, 2002) 2. 『요한복음 강해』.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3. 『영적침체와 치유』.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4. 『로마서 강해 전12권』.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2001) 5. 『이사야 1장 강해』.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6. 『하나님의 나라』.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7. 『산상수훈강해 상,하』.마틴 로이드 존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8. 『영적광명(에베소서 강해5)』.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9.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장 강해)』.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1997) 10. 『회심』.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샘, 1994) 11.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실까?』.마틴 로이드 존스. (목회자료사, 1991) 12. 『크리스챤의 싸움(에베소서 6장 강해)』.마틴 로이드 존스. (마라나다) 13.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평가』.마틴 로이드 존스. (말씀과 만남, 2003) 14. 『마틴 로이드 존스(중기1939-1959)』.이안 머레이. (청교도신앙사, 2002) 15. 『마틴 로이드 존스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사, 2001) 16. 『마틴 로이드 존스의 의인의 길 죄인의 길』.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사, 2000) 17.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두란노, 1999) 18.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세상의 유일한 희망』. 마틴 로이드 존스. (나침반, 2003) 19. 『마틴 로이드 존스와 그의 독서생활』. 프레데릭캐서우드 외. (양무리서원) 20. 『마틴 로이드 존스 베스트 설교』. 크리스토퍼 캐서우드. (두란노) 21. 『담대한 기독교 (사도행정 강해)』. 마틴 로이드 존스. (복 있는 사람, 2003) 22. 『진정한 기독교 (사도행전 강해)』. 마틴 로이드 존스. (복 있는 사람, 2003) 23. 『의학과 치유』.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2003) 24.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25. 『구약을 사용한 복음 설교』.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1998) 26. 『세상이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행복』.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사, 2000) 27. 『영적화해 (에베소서 강해2)』.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28. 『하박국 강해』. 마틴 로이드 존스. (목회자료사, 1992) 29. 『부흥』.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2002) 30. 『교회 부흥의 원동력』. 마틴 로이드 존스. (첨탑, 2004) 31. 『영적군사 (에베소서 강해 8)』.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32. 『복음의 핵심』. 마틴 로이드 존스. (양무리서원, 1992) 33. 『항상 기뻐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1992) 34. 『항상 평안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1992) 35. 『시대의 표적』.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36.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2003) 37. 『성령하나님(성경교리 강해2)』.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38.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2002) 39.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성경교리 강해3』.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40. 『권위』. 마틴 로이드 존스. (생명의 말씀사, 2002) 41. 『십자가는 하나님의 입증』. 마틴 로이드 존스. (나침반, 2003) 42. 『요한복음 강해 제3권:영적축복』.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
Ⅲ. 로이드 존스의 사상 (2) 칼빈주의 감리교의 영향 사역 초기에 로이드 존스는 여름휴가 때에도 오전에는 주요한 신학 저작들을 읽곤 했다. 그는 성경에 파묻혀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로이드 존스는 문고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약된 글이나 백과사전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시간낭비라는 이유로 소설도 즐기지 않았다. 박영호. 『로이드 존스의 생애』. p95-97
(3)교회론
(4)청교도에 관하여 로이드 존스가 청교도 정신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개혁정신이 |
마틴 로이드 존스의 생애 (박영호. 『로이드 존스의 생애』기독교문서선교회. 서울. 2002.)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1899년 12월 20일 부친 헨리 로이드 존스와 모친 막달렌 사이에 둘째 아들로 웨일즈 지방 카르디프(Cardiff)주의 도날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06년 봄에 부모님과 형 해롤드(Harold), 동생 빈센트(Vincent)와 함께 랑게이토(Liangeitho) 마을로 이사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38년에 웨일즈를 떠나 런던으로 왔다. 그의 아버지 헨리 로이드 존스는 성격이 낙천적이면서도 반면에 도덕적으로는 아주 곧고 영예심이 강직하였고 공상적인 낙천주의자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마틴은 아버지를 곁에서 칼빈파 감리교회(Calvinistic Methodist)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당시 웨일즈 칼빈파 감리교회는 알미니안파 감리교회와는 전혀 다른 신앙적 형태 칼빈파 감리교회의 특징은 찬송이었다. 옛 곡조와 발라드에 맞춰 찬송시를 노래로 불렀다.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는 랑게이토에서 4마일 떨어진 트레가론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학생 수는 120명이었으며, 그중 로이드 존스가 가장 어렸으나 차석으로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시는 포웰(Powell)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포웰은 로이드 존스에게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게 하였으며, 학생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도록 유도하였다. 특히 그가 주말에 내주는 숙제는 자기 발견을 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이 많았다. “여러분이 참석하는 교회의 예배가 시작된 것이 언제인가?”, 또는 “회당은 언제 세워졌는가?”, 또는 “윌리암 윌리암스의 찬송시에서 그가 어떤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지 알아올 것”등의 내용이었다. 윌리암스는 본래 의학도였는데 1730의 부흥 운동 때에 그의 삶에 변화를 일으켜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1913년 그에게 의미를 주었던 사건은 그의 교회가 칼빈파 감리교 소속 봉사단 단체를 랑게이토에 초대한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로이드 존스는 전에는 들어볼 수 없었던 폭넓은 설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한번은 토마스 윌리암스(T. C. Williams)박사와 존 윌리암스 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그들의 장엄한 설교뿐 아니라, 그들의 훌륭한 인품에 매료당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정치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역사와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일찍부터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1916년에 치른 시험 결과는 그의 생애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 즉, 웨일즈 신문에 머리기사로, ‘랑게이토 소년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 런던대학교 고등부 시험에 6개 과목 통과, 그중 5개 과목은 최고득점’이라고 실렸던 것이다. 그런 결과로 비록 16세의 어린 나이지만 기초 시험과 학장과의 면접에서 당당히 통과하여 1916년 10월 6일에 82명의 학생과 함께 의학 학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 가정과 병원생활 다음으로 로이드 존스에게 중요한 일은 채링크로스 교회였으며, 또한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사람으로 후일 장인이 된 톰 필립스 박사가 있었다. 그는 로이드 존스를 1917년 교회 주일학교에 가입시켰고 곧이어 그를 필립스 박사 자신이 인도하는 신앙토론 대화의 광장에 참여시켰는다. 그곳에서의 논쟁은 날카로워 매 주일 오후마다 격렬하였다. 물론 필립스 박사와 로이드 존스는 가장 중요한 발언자였다. 로이드 존스는 1921년 의학공부의 첫 관문인 M.R.C.S.와 L.R.C.P 학위를 6월에 받았고 10월 M.B.B.S(의학박사)를 받았다. 당시 로이드 존스는 1923-1924년, 2년간 하더 병원의 제1의 임상의학조교로서 봉직하였다. 하더 경의 사상과 가르침 속에서 로이드 존스는 큰 영향을 받았다. 하더는 소크라테스적인 교육 전통으로 주도면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학생들이 정확하게 사고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도록 가르쳤다. 로이드 존스는 1927년 1월에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54년이나 지속되었으며, 금술이 좋았고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결혼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그의 아내 베단은 신앙이 없는 명목적 그리스도인이었다. 허나 그녀의 할어버지 에반 필립스는 웨일즈 출신 중 가장 탁월한 목사님들 가운데 한 분이셨다. 그는 이미 목회자가 되라는 소명과 오랫동안 씨름했으며,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도 오랫동안 씨름하고 있는 터였다. 로이드 존스가 다니고 있었던 채링 크로스 교회(Charing Cross Chapel)의 목사인 피터 휴거 그립피츠(P.H. Griffiths)는 랑게이토의 목사보다도 더욱 복음적인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1923년 초에 복음적인 설교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의 궁금증에 도움을 주는 설교들을 듣기 시작하였다. 로이드 존스의 철저한 변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죄의 문제였다. 그는 자기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를 발견하였는데 그 원리는 무척이나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이익주의라는 것이었다. 그 후 로이드 존스는 1924년과 1925년에 문학토론협회의 금요집회에서 “영적 각성”에 대한 연설을 두 번하였다. 첫 연설은“현대 교육”이란 제목이었고 1924년 3월 집회에서 한 연설은 “현시대의 징조”로서, 그 시대의 도덕적 무질서에 관한 지적이었다. 그는 도덕적 무질서로 8가지를 들었는데, 즉 남자와 여자들의 구분 없는 의상, 목욕탕에서의 빈둥거림, 학위를 따기 위한 경쟁, 신문과 광고, 무선 전신과 방송의 유행, 여권주의자들, 민족주의, 그리고 끝으로 교회의 위치에 관한 무질서 등을 꼬집어 놓았다. 강단이 부패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채용의 문제로서 현 교회의 절반이 비어 있음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설교자를 믿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추악한 면은 설교 정치가의 출현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심리학적인 설교를 끝내고 참 기독교를 설교해야 하며, 구원과 예정에 대해 두려운 마음으로 설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스펄전(Spurgeon)의 글에 매료되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 그것을 하십시오. 목회를 안 하고도 견뎌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십시오.” 라는 말에 로이드 존스는 소명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청교도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포윅(F. J. Powicke)이 쓴 『리차드 박스터의 생애』(The Autobiography of Richard Baxter)였다. 그 책은 로이드 존스에게 청교도에 관해 첫 지식을 주는 것이었지만, 박스터의 진지한 신앙심은 로이드 존스를 더욱 흔들어 놓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절대적인 의무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은총만이 자유와 용기와 평화와 능력, 행복과 구원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3월에 채링 크로스 교회의 문학토론협회 모임에서 “청교도 정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는 그 강연에서 존 번연의 『천로역정』, 『리차드 박스터의 생애』그리고 『조오지 폭스의 생애』를 통하여 발견한 청교도 정신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청교도는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청교도는 지극히 약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 강함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약합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를 영혼의 구원에 대한 열정을 품은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10월 이스트 엔드에 있는 포플라 선교회에서 처음으로 강단에 섰고, 채링 크로스 교회에서의 설교는 10월 10일에 웨일즈에서는 11월 11일에 첫 설교를 하였지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927년 2월 4일 아베라본에서 로이드 존스는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부임예배에 참석한 여러 목사들은 20세기 청교도 목사가 탄생하였다고 말했고, 그는 불타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 한편을 썼다. 오 그리스도여! 주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주님 안에는 그보다 더 풍성함이 넘치나이다. 타락한 자를 일으키시고 힘이 없는 자를 붙잡으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눈먼 자를 인도하소서.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의로우시나 저는 불의뿐입니다. 저는 거짓되고 죄로 가득 찼으나 주님은 진리와 은혜로 가득하십니다. 로이든 존스는 1927년 2월 6일 주일에 아베라본의 샌드필드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목사로서 첫 설교를 하였다. 그의 첫 목회시절(1927-1938)의 설교는 전도설교(Evangelistic Sermons)였다. 그의 10년간의 목회기간동안 한 설교를 일주일 내내 몸소 손으로 쓰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고, 그 원고가 1981년에 그의 부인에 의해 발견되어 출판되었다. 그의 전도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양심을 향하여 선포되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사역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를 초대하기 원하는 단체들은 모두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1904-1905년 당시 영적 부흥 축복으로 가득 찼었던 웨일즈로 다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부흥기간 동안의 결과는 여러 교파가 혼합되었고 많은 곳에서 기성교회 내에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칼빈파 감리교회는 그런 흐름에서 탈출하려고 진통을 겪었으며 침례교와 플리머드 형제교회 Plymouth Breathren, 1820년대에 영국사람 존 다비가 창시한 칼빈파의 종파는 수적으로 증가하였고, 오순절파는 새로운 부흥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튀어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냉냉한 교회의 힘없는 예배로부터 많은 성도들을 끌고 나갔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는 1904년 이후에 웨일즈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당시의 설교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죄를 회개케 하는 것인데, 강단에서는 그런 면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해주고, 위로해 주며, 즐겁게 해주는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알고 있었다. 복음 앞에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 그것은 1892년 스펄전이 죽은 후 로이드 존스를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6월 11일 쉘부른 교회에서 ‘목사와의 대화’라는 시간에 참석했었는데, 약 30명정도 회중이 참석하였고 같은 날 저녁에는 복음주의 신앙을 비판하는 침례교 신학 교수와 열띤 논쟁을 하였다. 지치고 쓸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면서 아아직 왓츠의 간증을 받아들였다. 나의 하나님 내가 단 한 번만 하나님을 본다면 이 세상의 나라들과 사람들은 금방 사라질 것이니이다. 나는 그것들의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반짝이는 촛불이 정오에 무색해 지듯이 하나님은 단 한 번만 보면 나라들과 사람들이 금방 사라질 것이니이다. 1932 당시 웨일즈에는 두 종류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는 두 운동 모두에 적대적이었다. 하나는, ‘옥스포드 그룹운동’(Oxford Group Movement) 이 운동은 후에 ‘도덕 재무장 운동’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미국에서 건너온 루터교 목사인 프랭크 부크맨(Frank Buchman)의 영향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옥스포드 그룹 운동’은 진리 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찾자는 것이다. 이 단체는 ‘성령’을 강조하며, 꿈이나 황홀경 같은 신비한 체험들을 중시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운동을 외롭게 저지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확신하는 것은 진리가 먼저이지, 경험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닥쳐온 두 번째의 논쟁거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가르침에 관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초자연주의와 개혁신앙을 요구하였다. 대서양의 양쪽에서 바르트를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목회자 모임 때마다 ‘왜 바르트주의는 정통 기독교가 아닌가’라는 사실을 논증하기 시작했다. 이어1937년 로이드 존스 목사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피츠버그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당시 장로교회 교단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그 흐름은 계속해서 성경주의자들을 공격했으며, 자유주의 타도의 선봉이었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박사의 목회생활을 정지시키고 제명했던 사건이 있었다. 1936년 총회에서는 자유주의피츠버그의 근처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그에게 총회 순서중 4번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6월 3일 “장로교”(The Presbyterian)신문에서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총회 진행중에 초석(key note)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을 꺾고, 기독교의 진리를 바로 선포하였다. 특별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한 나머지 불편한 심기를 보인 사람도 있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초교파운동이었다. 그 운동들은 어느 교회의 통제도 받지 않는 초교파적인 운동이었다. 그것은 각 기구마다 조직이 되어 있고 도시마다 각각 책임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로이드 존스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IVF 정기집회에서 주강사의 역할을 했다. 런던의 복음주의 도서관(Evangelical Library) 관장직은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1938년부터 그가 사망한 1981년까지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 분야도 다양했다. 그는 요약된 글을 싫어했고, 소설과 같은 종류의 글도 좋아하지 않았다. 19세기의 추기경 뉴만(Newman)의 전기를 애독하였고, 렉스함의 하이웰 존스(Hywel Jones)목사와 한스 큉(Hans Kung)의 책과 같은 변증학 책도 읽었으며, 특히 교회사와 전기를 사랑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경건주의자이지만, 감상적인 경건주의는 아주 싫어했다. 특별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는 로버트 머레이 맥케인(Robert Murray Mcheyne)의 매일 성경읽기표에 따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었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와 그의 부인 베단은 53년동안 읽어왔고 신양성경은 적어도 110번 정도 읽었다. 놀라운 사실은 1981년 3월 1일에 눈을 감았는데 2월 28일까지 고린도전서의 ‘부활’장을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어왔다는 것이다. 1968년에 마틴 로이든 존스는 암으로 건강이 아주 나빠졌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또 다른 계획하심이라는 믿음으로 교회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목회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로이든 존스가 이전에 했던 일들이 계속 되었다. 그는 은퇴한 교회의 웨스트 민스터 친교회에 참여하고, 교회의 상태와 부흥의 필요성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69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그의 설교 사역에 대한 명강의는 「목사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은퇴 후 또다른 사역은 1966년 자신들의 교단들을 떠났거나 미흡하지만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들에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1980년에 그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 예배를 드린 곳은 바르콤(Barcombe)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니 나를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아라.” 크리스토퍼 캐서우드, 『마틴 로이드 존스베스트 설교:20세기 복음주의의 거장』, 서울 , 엠마오 ,1997.p140 그는 아베라본 베들레헴 교회에서 11년동안 그리고 30년동안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그중 5년은 켐벨 몰간과 협동사역을 했고 25년동안은 단독목회를 했다. 웨일즈에 있는 그의 무덤의 비석에는 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이 메시지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일생동안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
로이드 존스의 사상적 배경
첫째,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바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뛰어난 천재이며 가장 학식 있는 바리새인, 가장 박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영성과 지성과 삶을 본받으려 애썼고, 그의 설교 가운데서도 바울의 가르침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교육 방식도 바울 사도를 모방했으며, 바울 서신의 가장 위대한 강해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둘째, 청교도의 영향이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71년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이라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웨일즈 칼빈파 감리교회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5년 우연히 리처드 백스터의 최신판 전기를 읽은 후부터 청교도와 청교도 저작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이러한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청교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가 볼 때에 어느 설교자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교도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러한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청교도 신앙 : 그 기원과 계승자들>, p.248-249).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워필드를 가리켜 지난 70년 동안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는 워필드의 신학에 심취했다. 그것은 그의 신학이 성경에 기초했고 주해적으로 정확할 뿐 아니라 뜨거운 영성이 겸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휫필드의 설교를 자신의 설교 모델로 생각했으며 언제나 그에게 용기를 얻었다. “나는 용기를 잃거나 지쳐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18세기로 돌아갑니다. 조지 휫필드가 나의 용기를 일깨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18세기에 있었던 성령 운동과 그 커다란 부흥의 조류를 읽으십시오. 그 일은 설교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합니다”(<목사와 설교>, p.130).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하고 나서 교만해지려고 할 때마다 휫필드를 대하면서 겸손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의 영적 스승이다. 만약 자신에게 권위가 주어진다면,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권의 전집을 모든 목사들의 필독서로 만들고 싶다고 공언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로이드 존스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측량하기 어렵다. 로이드 존스의 목회는 에드워즈에 의해 통제되어 왔다고 고백할 정도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성령이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과 부흥의 요소를 발견했다.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의 강력한 필요성을 깨우쳐주었고, 그 부흥이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결론을 얻게 했다. 그 밖에 로이드 존스는 존 번연(John Bunyan),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존 오웬(John Owen) 등 17세기의 청교도들을 사랑했고, 18세기 설교자들을 존경했다. 그와 같은 청교도주의는 일생 동안 그의 신학적 사고와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칼빈주의 메서디즘의 영향이다. 18세기 초 웨일즈의 상황은 영적인 면에서 매우 낮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죽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부도덕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 위대한 각성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에 있어서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1714년 1월에 태어난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이다. 그는 18세기 웨일즈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였다.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학을 개혁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실천적 신앙생활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웨일즈의 메서디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설교가 있었고, 위대한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열정과 부흥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래서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죽은 칼빈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칼빈주의’를 산출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차갑고, 서글프고 음울하고 침체된 칼빈주의가 아니었다. 감정, 열정, 뜨거움, 찬양, 감사로 나아가는 진정한 칼빈주의라고 고백한다. 로이드 존스는 13세에 하웰 해리스의 목회에 관한 소책자를 읽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자라난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의 역사에 대한 이 첫 책은 역사에 관해서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일깨웠다. 위대한 부흥 시기의 교회사와 위대한 성도들과 설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관심을 평생토록 갖게 했다. (출처 : 교회와 신앙) |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부친 헨리 로이드 존스(Henry Lloyd-Jones)와 모친 막달렌(Magdalene) 사이에서 3남 가운데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9세기가 저물어가고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는 성품이 온유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반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유년시절 그가 다니던 학교의 포웰(S. M. Powell) 선생은 마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한 그는 어린 마틴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고, 찬송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포웰은 로이드 존스로 하여금 윌리암스(William Williams)의 찬송시에 깊은 신앙고백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었다. 16세세 때 그는 부모님의 격려로 의학공부를 결심했고, 성바돌로매 부속 의학교에 입학했다. 런던대학교 의과시험에는 탁월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웨일즈 신문에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그 후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왕립의과대학 병원에 봉직하면서 토마스 호더(Thomas Hoder)경의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호더는 진단의 명수였다. 로이드 존스는 그에게서 요점을 생각하는 것, 원리를 설명하는 것, 정확하게 사고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등 전문의적인 의료행위의 요점들을 배웠다. 그는 내과의사가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해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설교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휴톤(John A. Hutton)의 설교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존 휴톤의 설교는 로이드 존스에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그 능력은 곧 죄에 대한 인식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런던의 빈민가와 바돌로매 병원에서 환자를 만날 때마다 그들의 보이는 병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원인인 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호더(T. Hoder)경의 카드에 적혀있는 논평이 의학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문제도 아닌 영적인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27살의 나이에 설교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의학을 포기하기까지 그는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가 선택한 의사 직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설교자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전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는 이 부르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설교자로서 어떠한 권위를 가지든지 간에 그것은 내 편에서 결정한 어느 무엇의 결과도 아닙니다. 나를 붙잡으시고 나를 이끌어내시어 이 사역을 위하여 구별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영적 선택> p.156에서). 로이드 존스는 교단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헬라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의 신학이 지나치게 고등 비평적이고 자유주의적이어서 자신의 복음적인 신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동료 내과의사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하여, 그의 고향인 남웨일즈 아베라본에서 설교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첫 목회시절(1927-1938)의 설교는 주로 전도설교(Evangelistic Sermon)였다. 죄 의식과 복음의 놀라움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설교했다. 첫 10년간의 목회 기간에는 한 설교를 일주일 내내 몸소 손으로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아베라본에서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당시에 충격을 주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던 1920년대 중반에 웨일즈 지역 목회자들 사이의 신학적 기류는 역사적 칼빈주의가 아닌 낙천적인 자유주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경 말씀을 정확무오한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설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가 부임한 즉시, 그가 시무한 웨일즈의 한 장로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회심을 통해서 몇몇 악명 높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그의 아내도 포함된다. 그의 사역 초기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 그 후 1938년부터는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 목사의 제의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의 30년간의 목회가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얼마 안 되어 폭탄이 예배당에 투하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약 500명의 성도들로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약 2,500명이 출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캠벨 몰간의 역사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강해설교의 왕자’라는 그의 칭호를 계승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그의 독특한 설교 방식을 발전시켰다. 성경 한 책에 대한 연속 강해설교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다. 그는 이 설교를 시작해서 무려 21년 동안, 계속해서 연속 설교를 했다.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에 걸친 <로마서 강해설교>,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관한 강해설교 등으로 이 모든 설교들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또한 그가 실제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진리의 깃발사’와 ‘런던 복음주의 도서관’과 ‘런던 신학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기독학생회(IVF: Inter Varsity Fellowship)와 기독의사협희(CMF: Christian Medical Fellowship)의 성장은 설득력 있는 능력의 증거요 로이드 존스가 행한 사역의 열매였다. 1968년, 로이드 존스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자 목회 사역에서 은퇴했다. 그 후에도 12년 이상을 계속해서 설교했지만, 주된 사역은 책을 쓰는 일이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13권으로 된 주요 설교집 시리즈와<목사와 설교>를 출판했다. 1981년 3월 1일, 그는 설교자로서의 삶을 다하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출처 : 교회와 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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