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유기성*신우인목사설교+칼럼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9. 2. 3. 주일 [주님 한 분 만으로(빌3:7-1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3. 6. 02:15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9. 2. 3. 주일|김동호목사의 페이스북

스티그마 | 조회 39 |추천 0 |2019.02.03. 09:18 http://cafe.daum.net/stigma50/Dhpk/2476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9. 2. 3. 주일


오늘도 치앙마이에서 출석하고 있는 드림교회에서 설교합니다. 한국에서 단기선교팀들이 와서 그 팀들을 섬기는라 분주했던 담임목사 쬐끔 도와드리는 마음으로 섬깁니다. 이를테면 보조목사가 된 셈입니다. 늘 후배 목사들의 도움을 받고 섬김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반대로 후배 목사 돕고 섬기는 일을 하는 흉내라도 낼 수 있어 마음이 좋습니다. 설교 원고 먼저 올립니다. 복된 주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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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한 분 만으로
3:7-11


1.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이고 선포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세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과 모든 생명들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지만 세상에 그것처럼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우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우연의 확율과
그 우연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제한적입니다.


생명을 고사하고
질서 정연하게
법칙에 따라 정교하게 움직이는 우주와 세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고사하고
우연히
집이 지어진 적도 없고
우연히
시계 하나 만들어진 적이 없고
우연히
볼펜 한 자루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이
시계가
볼펜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거나 생겨났다고하면
대번
제 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하려 들 겁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과
생명들과
기가막힌 우주는 우연히 생겨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제 정신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2.
우리의 유한한 이성과 지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이 어마엄청나고
기가막힌 세상과 생명들을 창조하신 분이 계십니다.
창조주가 계십니다.
그 분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중요하고 위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하시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완벽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풍부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 때
'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우주와 세상과 생명과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는 하루를 쉬셔야만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하신 힘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창조에 쏟아 부으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걸까요?


사람입니다.
우리 사람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완벽한 세상을 말입니다.


4.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를 그곳으로 다시 불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성경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 한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21:2)
그곳은
눈물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는 완벽한 나라입니다. ( 21:4)


5.
유교와 불교에는 청빈 사상이 있습니다.
불의한 부요함과 타협하지 않고
욕심없이 차라리 가난할지언정 깨끗하게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정신은 우리 기독교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부요함과 타협하지 않고 욕심없이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청빈이지
가난 그 자체가 청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함을 훌륭함 그 자체로 무조건 받아 들이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부요함을 무조건 죄악과 타락 그 자체로 받아 들이면 안 됩니다.
그러면 큰 문제가 생기고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세상의 모든 자랑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세상의 모든 자랑은 다 배설물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뜻이 아니라
세상의 자랑에 욕심 없다는 말씀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 12절에서
"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왜곡된 청빈논자들은
사도바울이 비천에 처할 줄 안다는 고백에만 포커스를 맞추지만
사도바울은
풍부에도 처할 줄 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 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저를 가르쳐 주신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제게 해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난 가난이 싫어'
'
그런데 무섭진 않아'


저는 이게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
가난'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당당하게
비굴하지 않게
주 안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고백이 믿음의 실상입니다.


비천에 처할 줄 모르면
비굴해 지거나
삐뚤어 지거나
시기와 원망과 불평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비천에 처할 줄 몰라
비천과 가난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 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풍부와 같은 세상적인 가치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것을 누릴 줄도 알지만
그것이 자신의 최상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혼자만 누리려 하지 않고
혼자만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베풀며
그것을 통하여 세상의 복이 되는 삶을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요?


6.
말은 쉽지만
참 그대로 살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가난을 좋아하지 않지만
가난하다고 하여도
그 가난함에 함몰되지 않고
떳떳하게
남 시기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무조건 부한 사람 욕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좀 부족한 가운데서도
은혜를 느끼며
사랑하며
박수쳐주며
자기 삶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부요함과
세상적인 성공에 매몰되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부요함과
풍요함과
기회들을 감사하고 잘 누릴 줄도 알고
즐길 줄도 알고
그것을
자신만을 위한 기회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은사와 달란트로 여기고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장사를 열심히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도구로 삼고 산다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7.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오래 전 후배 하나가 저를 찾아와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끈 떨어진 연'과 같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그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네가 이야기하는 끈은 끈이 아니다'
'
끊어 진게 아니라 처음부터 끈이 아니니 붙어 있지 않았었다'
'
그걸 끈이라고 믿고 있으니 네 삶의 끈 떨어진 연같은 꼴이 된 것이다'
'
세상에 끈은 하나 밖에 없어'
'
그 끈 붙어잡고 살어'


세상을 끈인 줄 알고
붙잡고 살면
비천함에도 처할 줄 모르게 되고
풍부함에도 처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정말 끈 인 줄 알고
그 끈을 확실하게 붙잡고 산다면


끈 아닌 세상
비천하든
풍부하든
영향 받지 않고
당당하게
떳떳하게
근사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8.
저는 어렸을 적에 설탕을 그렇게 좋아했었습니다.
과일이든
떡이든
커피든
심지어도 밥에도 설탕을 넣어 먹을 정도였습니다.


당뇨병에 걸리면서
설탕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아에 설탕이 없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30년 넘게 당뇨 때문에 설탕을 피하며 살았더니
덕분에
과일 맛을 알게 되었고
커피 맛을 알게 되었고
떡 맛을 알게 되었고
음식 고유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9.
우리의 삶에도
저의 삶에도 
설탕 같은 것이 있습니다.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입니다.


제법
큰 교회를 목회했었기 때무네
그런게 어느 정도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좋았습니다.
달콤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거기에 중독되고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은퇴를 기점으로
조금은 과감하게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떠나고
내려가고
버리고
줄이고


제법 열심히 했습니다.


치앙마이에서
서울에서 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전에 누리던 많은 것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원룸에서
아내와 소꿉 장난하듯 삽니다.
생활이 단순합니다.
출근할 곳도 없습니다.
알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글도 읽을 줄 모르고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리버리한 영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만 합니다.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던 없던
삶이 풍부하던
비천하든
별 상관 없습니다.


내 삶은
내 삶의 연은
세상에 연결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싫은게 아니지만
세상이 꼭 나쁜게 아니지만
그래서
감사함으로 누리고 즐기기도 하지만
욕심 없습니다.


내 삶의 만족은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하면 부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여유있게
멋있게
근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0.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떠십니까?
풍부하십니까?
가난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지금 현재 그와 같은 세상에 묶여 있으십니까?
아니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만족과 행복은 세상으로부터 오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오십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고
훈련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하면 부한대로
가난한대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