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기다림<에세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4. 4. 16:51

기다림<에세이>|소설, 콩트, 에새이, 칼럼

은혜 | 조회 26 |추천 0 |2019.03.19. 15:22 http://cafe.daum.net/seungjaeoh/J74U/73  
      

    기다림은 삶의 일부다. 아니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 삶도 끝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세계적인 묵상집 다락방을 통해 기다림을 배운다. 내가 다락방을 대한 것은 1960년 봄부터였다. 그때부터 이 책은 나의 동반자였고 우리 가정예배의 지침서이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생명의 말씀이나 QT 집 등 전문인이 평신도의 묵상을 돕기 위해 만든 책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런 지침서보다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평신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유하기 위해 써 놓은 간증의 글들을 더 좋아한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락방은 교단, 인종, 민족을 초월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신앙고백을 담은 매일 묵상집이다. 현재 세계33개 언어로 번역되어 100여 개국에 150만 부가 배포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각 교회에서 개발해서 추천하는 책들이 많아 지금은 다락방의 판매부수가 많이 줄고 한글판과 한·영 대조판을 합해도 10,000부가 못 된다고 한다.


다락방을 읽으면서 나는 세계선교와 전도를 그렇게 좋아 하는 우리나라 신자들의 이름은 왜 이 책에서는 볼 수 없을까를 생각한다. 다락방 편집자들의 사역 목표는 ‘1) 개인의 영적 생활을 풍성하게 한다. 2)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하는 열망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 우리는 세계 100여 국에 왜 자기의 증인된 삶을 전할 열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나의 결론은 우리 민족은 기다리는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기독교인이라도 점쟁이를 찾아가 당선 될 것이지 아닌지 빨리 알고 싶어 한다. 당선이 되고 안 되는 것을 주의 손에 맡기고 기도하며 오래 참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다락방에 기고자가 없는 것도 기다릴 수 없는 조급함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락방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내면 옛날에는 반년 쯤 걸렸다. 그러나 요즘은 전산화가 되어 1개월 내에 원고를 받았다는 회신이 온다. <간증을 보내 주어 고맙다. 4-6주 사이에 검토하고 연락을 줄 것이다. 3 개월 동안 아무 연락이 없으면 채택 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이번에 채택이 되지 않더라도 믿음을 간증하려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다면 다락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다시 한 번 시도해 주길 기대한다.> 이런 서신이 온다. 3개월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 동안 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보며 실망해야 한다.


만일 거절 편지가 아니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받게 된다. <우린 당시의 묵상을 채택하려고 원고를 보관 중이다. 최종 결정은 일 년 또는 그 이상을 기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정되면 편지와 서류를 보낼 테니 작성해서 보내주기 바란다. 이것은 당신의 묵상이 확정적으로 출판된다는 뜻이다.> 이것도 채택을 고려한다고 했으니 채택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위해 또 일 년 가까이를 기다려야 한다. 빨리 빨리를 즐기는 한국인이 어떻게 자기 원고를 내놓고, 그것이 뭐라고 1년 이상을 기다리겠는가? 나는 그것이 다락방에 우리나라 저자가 거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늘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기다리는 일이 끝나면 인생은 끝난다. 요즘은 휴대폰이 생겨서 더욱 기다리는 것을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일차 채택이 되면 나는 다시 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기다림을 시작한다. 너무 여러 번 실망한다. 나는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지 못하고 교회만 출석하지,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자책한다. 친구인 한의사가 집에 놀러 와서 내 진맥을 하면서 요즘 숙면을 못하느냐고 물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듣고 있던 아내는 코를 골며 잘 잔다며, 스트레스는 말도 안 된다고 대신 대답해 준다. 내 속내는 모르고. 정말 인생은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과정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사뮈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이 있다. 나무 한 구루가 서 있는 시골길, 저녁. 두 방랑자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갖 행동, 말을 계속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제 가자고 한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놀라서 무슨 소리냐며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고도가 아니고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이다. 소년은 고도가 오늘 밤에는 오지 못하며 내일엔 꼭 오겠다고 했다는 전갈만 남기고 사라지면서 1막이 끝난다. 2막도 마찬가지다. 만일 3막이 있었다 하더라도 같았을 것이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라고 있었다. 오직 기다림으로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또 언제 올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다. 답답한 연출자 한 사람이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때 작가는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그렇게 지루하고, 무료하고,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고통을 누가 참아내겠는가?


조병화 시인의 기다림이라는 시에는

과녁은 피를 토할 때까지

예리한 화살을 기다린다.

로 시작되는 것이 있다. 피를 토할지라도 기다림의 열매가 와주기를 인내하고 기다리는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A4 용지 반장짜리 원고를 써서 다락방에 보내고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회신이 왔다. 원고료로 $25.00과 함께 저작권 양도서류와 몇 가지 내용을 기재하여 서명해 보내라는 엽서였다. 이제 고도는 온 것일까? 아니다. 나는 또 기다려야 한다.


원고는 격월제 잡지의 3,4월 호, 416일에 실릴 것이라는 회신이었다. 나는 3월을 기다린다. 3월을 기다려서 아내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416일을 기다린다. 짝수 날은 아내가 본문을 읽고 기도하는 날이다. 416일 아내는 성경 본문을 읽어가면서

이거 당신 이야기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래? 저자를 확인해 봐야지.”

아내는 저자를 확인하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기다렸지.”

아내는 나란히 앉은 내 왼 다리를 철석 때렸다. 기다림의 열매를 보는 순간이다. , 드디어 고도가 온 것일까? 아니다. 나는 아직도 기다려야 한다. 성경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책을 마치면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마지막 주님의 음성을 전하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요한은 화답하고 있다. 그분은 언제 오실지, 어떤 형태로 오실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요한처럼 아직도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내 이웃에게 기다리자고 권해야 한다. 자기를 반대하는 원수를 보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다리자. 아니면 공정한 재판에 맡기고 기다리자. 재판도 믿지 못하고 힘과 권력으로 원수를 짓밟으면 이것은 폭력 집단이다. ‘같이 고도를 기다리자라고 성급한 그들에게 간절히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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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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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세이>
                                  

 
영진 19.03.27. 17:33
기다리지를 못하는 급한 성미가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힘껏 밟습니다. 여유가 없고, 가진 것이 적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 속에서 성도의 모범을 보이는 신앙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은혜 19.03.30. 17:12
늘 들어와 읽어주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