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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노래가 없다면, 꿈마저 없다면…[흰 밤에 꿈꾸다 / 정희승 지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5. 3. 16:08

내게 노래가 없다면, 꿈마저 없다면…

등록 :2019-05-03 06:01수정 :2019-05-03 13:33

 

흰 밤에 꿈꾸다

정희성 지음/창비·9000원

정희성(사진) 시인은 1970년 신춘문예에 당선해 올해로 등단 50년째를 맞았다. <흰 밤에 꿈꾸다>는 그의 일곱 번째 시집이니, 시집 한 권을 내는 데 평균 잡아 7년이 조금 넘게 걸린 셈이다.

과묵한 사람은 말도 짧은 편이라, 시집에 묶인 시들은 짧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정처 없어라// 구정물통에/ 박씨 하나”(‘박씨’ 전문)

“그대 떠나도/ 거기 있을 거야 나는// 산이니까”(‘이별 1’ 전문)

정희성 시인 ⓒ조문호
정희성 시인 ⓒ조문호
시인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별 1’은 일본의 단시 하이쿠와 같은 17자로 이루어졌고, ‘박씨’는 아예 그보다도 더 짧다. 그는 앞선 시집들 후기에서 시 쓰기를 일러 ‘말 줄이기’라 했거니와, 이렇듯 극단적으로 짧은 시들은 깎고 다듬음으로써 언어의 밀도를 높인다는 시작(詩作)의 핵심에 충실한 결과라 하겠다.

“시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데/ 나는 남과 너무 오래 싸워왔다/ 시가 세상을 바꿀 줄 알았는데/ 세상이 나를 바꾸어버렸다”(‘그럼에도 사랑하기를’ 앞부분)

이 시와 같은 맥락에서 시인은 이번 시집 후기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말에 가시가 돋친다.”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우자던 신동엽의 말을 떠올리며 시인은 자책하고 반성하며, 자신이 부려 온 언어를 향해 미안한 마음을 표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찌 시인의 타고난 성정이 사납고 입이 거칠어서이겠는가. 세상의 불구와 질곡에 있는 힘껏 맞서느라 시인의 언어가 어쩔 수 없이 거칠고 사나워졌던 것. 게다가 거칠고 사나운 것이 꼭 타매해야 할 성질만은 아닐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의 손이 너무 거칠다고 말한다// 손 끝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손이 저 홀로 곱고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기름때 묻고 흙 묻은 손이다// 시는 어떤가”(‘그의 손’ 전문)

비록 질문으로 시를 마무리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제 손을 더럽히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노동자처럼, 시와 시인 역시 언어의 아름다움 못지 않게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언어가 거칠고 더러워지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을 그는 이 질문에 담은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혹은 당당하게 미화하고 싶어하는/ 이 땅의 친일 친독재 세력”(‘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을 개탄하거나, 신문 기사들을 전재함으로써 임박한 전쟁 위협을 고발하는(‘꼴라주 병신년 한국전쟁사’) 시도는 그런 판단의 연장선상에 있다.

정희성 시인 ⓒ이강산
정희성 시인 ⓒ이강산
“잠이 오지 않는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은 이것뿐/ 내게 노래가 없다면/ 내게 꿈마저 없다면/ 나는 무엇인가/ 마지막 한줌의 힘이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않으리”(‘독서일기 2’ 부분)

시인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호소하지만, 시대 자체가 서정시라면 따로 시인과 시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의 운명이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상황 속에서 힘겹게 서정시를 빚어 내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시대의 불구와 질곡을 뚫고 나온 시 한 편을 마지막으로 옮긴다.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벚꽃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 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연두’ 전문)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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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2499.html#csidx6792e8e9f395ffd8262e47faa621e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