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석사학위 논문을 썼고 그 1년 전인 70년에 대학원에 적을 두었으니, 다산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금년은 50년째가 되었습니다. 20대 후반의 팔팔하던 청년은 이제 70대 후반을 맞아 백발이 성성한 노령의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더 총총할 때에 다산에 관해 썼던 논문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꾸미자는 생각을 지난해부터 가졌지만, 차일피일 시간만 흐르다가 겨우 6월 3일 자로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만 가지 감회가 새로울 뿐입니다.
모교 은사님들의 막중한 은혜로 대학교수 요원이 되라는 교수 회의의 결정이 나왔지만 시국사범으로 말썽을 피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의 장애에 막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대학교수가 되면 학문에만 전념하고 시국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하나 쓴다면 대학교 교수요원으로 허락해 주겠다는 중정의 요구를 거절하자,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서 생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사 생활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18년, 중간에 두 차례 해직되어 5년을 백수로 지냈으니, 학교에 있던 기간은 13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 20대 말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제대로 연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학자란 궁한 후에야 비로소 저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매우 총명한 선비라도 지극히 곤궁한 지경에 놓여 종일 홀로 지내며 사람이 떠드는 소리라든가 수레가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시각에야 경전이나 예에 관한 정밀한 의미를 비로소 연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答二兒)라는 아들에게 답해준 다산의 편지가 새롭게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5년 가까운 무직자의 시절, 참으로 궁하고 가난하던 때, 먹고살기 위해 한문을 번역하고, 이곳저곳의 원고 청탁에 응하여 썼던 글, 88년에 나온 『다산기행』이라는 단행본과 이번 책에 실린 대부분의 논문은 바로 그런 궁한 시절에 썼던 글들입니다. 귀양살이 18년의 궁하고 가난한 시절에 다산은 500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묘하기만 합니다.
다산학에 대한 연구가 요즘처럼 왕성하지 못한 70∼80년대에는 다산은 천주교 신자라는 주장이 득세하던 때여서 저는 그런 것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자일 수 없다는 주장이 논문마다 나오고, 다산도 유학자여서 주자의 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주장도 많던 때라 다산학과 주자학의 차이도 나름대로 밝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산도 중세 봉건주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을 때여서 다른 어떤 학자보다도 다산은 중세 봉건 논리에서 많이 벗어난 측면이 있다는 것도 밝히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불쌍한 일반 백성들,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치자들의 압제와 속박에서만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자주권이 있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인권과 자율권이 있음도 다산의 주장을 통해 밝혀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썩고 부패한 조선 후기, 새롭게 나라를 만들어 부패와 불공정에서 벗어나는 국가에 대한 다산의 그리움도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내용이 담긴 책이 바로 『다산에게 배운다』(창비)라는 책입니다.
오늘의 학계 풍토에서 대학의 정규 교수가 아니고도 논문도 쓰고 책도 간행할 수 있다는 모습을 하나 보여주는 것도 있어 그 책을 만지고 또 만져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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