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존엄하게 죽을 선택을 하고 죽기 위해 스위스를 가는 남자의 이야기.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의 한 장면.
하필이면 간병인들이 환자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때였다. 여덟 명 (노인)환자가 있는 병실을 두 명의 간병인이 두 시간마다 용변상태를 돌본다고 했다. 늙고 아픈 노인 냄새가 둥둥 떠돌았다. 옆에 서자마자 엄마 차례였다. 한 명이 등을 돌려 받치고 한 명이 헐렁한 환자복 아랫도리를 벗겼다. 특대 사이즈 기저귀 속엔 변 묻은 휴지가 여러 덩이 뭉쳐있었다. 꺼내도 자꾸 나오는 휴지뭉치는, 못 봤지만 알 것 같았다. 남 보기 부끄럽고 남의 손에 맡기기 미안해서 참고 참다가 결국 막을 수 없이 터진 생리현상을 막아보려고 엄마는 절박하게 머리 위 휴지를 뜯어 기저귀 속으로 넣고 또 넣었을 터였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내 발로 걸어가 내 손으로 용변을 처리하다 세상 떠나는 것이 엄마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수치심과 미안한 감정이 쟁쟁하게 살아있는 머리로 움직일 수 없는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천장을 보는 엄마의 모습은 무참하고 슬펐다. 간병인은 도우려는 내 손을 제지하며 능숙하게 처리를 마쳤다. 자식이라도 혼자서는 못해요. 물티슈를 한보따리 쓰고서야 엄마의 몸은 갓 낳은 아기처럼 무방비 상태로 여며졌다. 사실 고관절수술을 하게 된 이유도 용변 때문이었다. 당번 간병인이 24시간 상주하는 요양원에서 엄마는 새벽 요의로 잠이 깬 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몇 걸음이면 되는데, 곤히 자는데, 당신 혼자 변기까지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자다 깬 흐릿함, 어두워진 눈, 바람 들어 삭은 뼈는 두 걸음 만에 와지끈 부러졌다. 보행기를 쓰지만 화장실 출입은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존심도 부질없이 무너졌다.
89살 노인의 고관절수술은 위험하다, 합병증이 올 수 있다, 못 깨어날 수도 있다, 물리치료를 하더라도 자가 보행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과 수술한 이들은 오래 못 살더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수술에 동의했다. 항용 쓰는 수술동의서는 그러려니 했지만 의사는 또 한 장의 동의서를 내밀었다. 디엔아르(DNR·Do not resuscitate) 동의서. “현 상태 및 심폐소생술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었으며 심정지 및 호흡부전으로 인한 응급발생시 모든 보호자 동의하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 추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며느리나 사위는 동의할 수 없는, 직계가족만 할 수 있는 동의서에 기도 삽관도 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이미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스텐트 시술을 받을 때도 썼던 거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 엄마는 한번 누운 침대를 영영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연명과 마감에 어떤 동의나 거부를 할 수 없었다. 좋아질 일이라곤 절대 없을 몸을 수술실과 응급실, 집중치료실, 중환자실로 싣고 다녔다. 철저하게 자신의 죽음과 무관계해진 채 엄마는 한밤중에 사설응급차에 실려 다녔다. 섬망 증세가 무시로 찾아와 느닷없이 김장을 해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거나 눈앞의 원숭이가 귀엽다고 웃기도 했다. 염치와 존엄을 잃은 채 흐릿하게 하루하루 목숨이 이어졌다. 간혹 정신이 맑아지면 “왜 이렇게 안 죽어지니, 좀 죽어졌으면 좋겠어.” 소원처럼 말했다. 옆 병상의 환자들이 자주 바뀌었다. 비닐처럼 마른 다리가 퉁퉁 붓고 저승꽃이 덮여가는 손과 등을 만지면서 힘들게 찾은 주사자리에 영양제를 꽂으면서, 삐빅 소리 나는 모니터 숫자를 들여다보면서 임종에 대해 검색하고 공부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리라 다짐했고 존엄사를 돕는 디그니타스 병원을 알아봤다. ‘존엄을 가지고 살기 위해, 존엄을 가지고 죽기 위해’(for life with dignity, for death with dignity)라는 조항에 깊게 동의했다. 엄마처럼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무 살 즈음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보다 간절해졌다.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