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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고령사회에서 책은 명함”···글쓰기는 이제 필수 /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6. 13. 16:28

[ESC] “고령사회에서 책은 명함”···글쓰기는 이제 필수

등록 :2019-06-13 09:44수정 :2019-06-13 09:48

 

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⑨

베스트셀러 <대통령의 글쓰기>
잘 팔린 이유 묻는 이 많아
대중의 궁금증 알게 돼
‘말’ 정리해 쓰는 글 어렵지 않아
평소 쓴 글에 경험 보태 책 내도
목차 먼저 만드는 것도 한 방법
누구나 책 쓰는 시대.. 삶의 흔적 남기는 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책 쓰기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다. 베스트셀러 책을 썼으니까. <대통령의 글쓰기>는 2014년 <한겨레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책’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묻는다. <대통령의 글쓰기>가 많이 팔린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들이 답한다. 두 전직 대통령 덕분 아니냐고. 오래 사는 시대에 글 쓰고 싶은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 아니냐고. 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글 쓸 일이 많아져서 아니냐고. 모두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책을 잘 썼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은 내게만 주어진 행운이 아니다. 아, 이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덕은 좀 봤다.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게 취미라고 하지 않았다면 <대통령의 글쓰기>가 이렇게까지 많이 팔리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순실씨에게 감사하다.

내가, 아니 베스트셀러 작가가 써먹은 책 쓰는 방법을 소개한다. 자신에게 맞는 걸 골라 쓰면 된다.

첫째, 말로 쓰자. <대통령의 글쓰기>는 말로 썼다. 청와대를 나오자마자 하마터면 쓸 뻔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이란 지면에 청와대 생활 8년에 관한 인터뷰를 했는데, 출판사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다. 인터뷰 내용으로 책을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얼토당토않았다. 내가 무슨 책? 당시만 해도 저자가 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라 여겼다.

다행이었다. 그 후 5년간 책에 쓸 내용을 숙성, 발효시키고 여러 사람에게 검증받는 기회를 가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물었다. 청와대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화 없느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냐, 김대중 전 대통령 자주 뵈었느냐, 대통령 연설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느냐 등등. 같은 질문에 수없이 답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걸 알게 됐다. 내 답변이 조금씩 재밌어지고 점점 더 채워진다는 걸 느꼈다. 이 모든 질문과 답이 <대통령의 글쓰기> 내용이 됐다.

말이란 건 희한하다. 하면 할수록 정리되고 양이 늘어난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 10시간 말할 수 있으면 당장 책을 써도 된다. 자서전을 쓰고 싶은 분은 자신에 관해 10시간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출판사에서 편집자 생활 할 때 유명 저자에게 책을 써달라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2시간 강연 다섯 차례만 해달라고 하면 그건 수용한다. 회차별 강의 주제를 잡고 청중을 모아준 후 강연 내용을 녹음한다. 녹취한 걸 글로 풀고 정리해서 강연자의 검토를 받고 몇 차례 수정을 거치면 책이 된다. 쓰기는 어려워도 말하기는 수월한 사람에게 적합한 방법이다.

말로 책을 쓰면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쉽게 읽힌다는 점이다. 독자는 눈으로 읽는 것 같지만, 자신의 읽는 소리를 속으로 듣는다. 아무래도 말한 걸 글로 옮기면 술술 읽힌다. 그뿐만 아니라 말은 사람을 앞에 두고 한 것이라 청중의 반응을 반영한다. 글은 독자의 반응이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때문에 글에 독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반영하기 어렵다. 말로 글을 쓰면 그런 약점을 보완한다. 단점도 있다. 깊이가 덜하다는 것이다. 말은 즉흥성이 강해 글보다는 숙고가 깊지 않다.

둘째, 몇장으로 쓰자. <대통령의 글쓰기>가 떴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강의 요청이 없었다. 기업에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모신 사람 부르는 걸 주저했다. 교육 담당자가 강의 가능 여부를 물어와 시간이 된다고 했는데, 얼마 후 강의 진행이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상사에게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강사로 부르느냐’고 혼났을 것이다. 그래서 <회장님의 글쓰기>를 썼다. 내가 회사에서도 17년간 글 쓴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회장님의 글쓰기>는 회사 다닐 적에 써둔 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이 비빌 언덕이 됐다. 여기에 살만 붙이면 되겠다 싶어 쓰기 시작했다. 통상 책을 한 권 쓰려면 글자 크기 10포인트로 A4용지 70~80매는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엄두를 못 낸다.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A4용지 5매만 쓰겠다고 마음먹자. 그 정도는 어지간하면 쓸 수 있다. 그리고 10배 불려라. 쓰기는 어렵지만 불리기는 쉽다.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써둔 5장을 잊고 다른 일을 해도 좋다. 그때부터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 겪는 것 모두 5장과 관련이 있고, 연결이 된다. 그전까지 의미 없이 들리고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박힌다. 추가할 내용이 5장에 와서 붙는다. 5장이 생각을 끌어오는 자석이 된다. 5장이 스스로 굴러가며 덩어리를 키운다.

셋째, 목차로 쓰자. <회장님의 글쓰기>를 쓸 때다. 보고서나 기획서 쓰기 책을 검색해봤다. 30여권이 떴다. 처음 든 느낌은 ‘이미 다 써놨구나, 내가 보탤 말이 없겠구나’였다. 아마도 책을 쓰려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는 첫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봤다. 이미 다 써놨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도 그것에 관해 쓸 말이 있구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있을까. 그 누구도 없던 걸 만들 수 있나? 이미 있던 것이지만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목차가 같을 뿐 내용이 같을 순 없지. 그래, 그냥 쓰자. 내 책 한 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까.

두 단계로 작업했다. 우선, 책의 목차를 출력해 공통분모를 찾았다. 모든 책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뭔지 알아봤다. 일종의 총론, 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음식으로 치면 밑반찬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밑반찬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지 않지만, 밑반찬이 부실하면 화를 낸다. 이 작업은 수월했다. 짜깁기하면 됐다. 이 책 저 책에 나온 내용을 섞어 썼다. 어차피 그 저자도 어딘가에 있던 내용을 인용한 것일 테니까.

두 번째 단계가 중요했다. 각 책의 목차에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한 줄을 찾았다. 다른 책에는 없고 그 책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에 관해 나도 할 말이 있어야 한다는 두 조건이다. 그러니까 그 책에서만 다룬 내용인데 나도 쓸 말이 있는 한 꼭지 글의 주제를 찾았다. 아무리 허접한 책이라도 그 한 줄이 없는 책은 없었다. 그렇게 글의 제목을 30여 개 마련했다. 다음 작업은 수월했다. 할 말이 있는 글의 제목을 골랐으니까. 쓰면 됐다. 하지만 그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내 책이 아니었다.

넷째, 조각 글로 쓴다. 명작(?) <강원국의 글쓰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후 강연을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무료 강연부터 했다. 책을 팔기 위한 강연이었다. 강연하기 위해 할 말을 블로그에 준비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말할 거리를 찾았다. 처음에는 하루 하나 쓰기도 버거웠다. 그러다 하루 세끼 밥 먹듯 세 개 정도는 쓰게 됐다. 어느 때부턴가 하루 열댓 개씩 쓰는 날도 생겨났다. 3년 가까이 1700개를 썼다. 책을 써도 되겠다 싶었다. 책을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책이 써졌다. 블로그에 대략 이런 내용을 매일 썼다.

△불현듯 기억나는 것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지식 △원리, 본질같이 깨달은 것 △나를 음미하고 성찰하는 반성, 인생관, 가치관 같은 개똥철학 △내 느낌과 감정 △누군가 내게 무엇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해야 할 내 생각과 의견 △무엇에 관한 나의 주장 △예측, 전망, 예상, 추측, 가정, 꿈, 목표 등 미래에 관한 것 등이다. 이런 내용은 강의할 때도 써먹었지만, 책 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재료라는 걸 책을 쓰며 알았다.

책은 쓸 때 쓰면 늦다. 책은 쓰는 게 아니다. 책 쓰기란 써둔 걸 써먹는 일이다. 따라서 평소에 써둬야 한다. 아이들은 레고 블록으로 무엇이든 만든다. 하지만 블록 조각을 만들진 않는다. 이미 있는 블록 조각으로 조립할 뿐이다. 시험 볼 때 공부할 수 없다. 공부는 평소에 해둬야 한다. 공부해 둔 것을 써먹는 게 시험이다. 시험 볼 땐 문제를 풀어야지 시험 잘 볼 욕심에 그때 공부하려고 해서 되겠는가. 책 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쓸 때 있지 않은 것을 만들 수 없다. 있는 것을 불러내고 조립하는 일이 글쓰기다.

누구나 책을 쓰는 시대다. 아니 써야 하는 시대다. 오래 살기 때문이다. 어디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누구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할 기간이 길다. 적어도 책 한 권 분량의 콘텐츠는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고령사회에서 책은 명함 같은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산에만 다녀야 한다. 책 쓰기는 산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 지구에 와서 살았으면, 자원을 소모하고 자연을 훼손하며 살았으면, 살면서 배우고 깨닫고 느낀 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갈 의무가 있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흔적은 남기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 책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나같이 책을 써서 돈까지 벌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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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97706.html#csidxd8f338140883c77b67fbc52fb42cf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