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로 하던 일을 거둬들여 정리하고 이제는 마음공부에 힘쓰고 싶습니다. … 그러나 다만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고자 하다보면 세간의 잡념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럽게 일어나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니, 마음공부로는 저술보다 더 나은 게 없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 ”(答仲氏) 다산이 귀양 살던 다산초당에서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손암(정약전) 형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책 읽고 글 짓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고요히 앉아있다 보면 귀양살이 고통이 엄습하여, 차라리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몰두해야만 세간의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고백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얽매인 몸이거나 감시받는 사람으로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보면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책을 골똘히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을 해야만 마음이 안정된다는 이야기입니다. 5·18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서 나와 사면·복권도 되지 않고 기관원들의 엄혹한 감시만 받고 있을 때에 많은 글을 썼던 것이 『다산기행』(한길사)으로 묶어 나왔고,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잡히면 죽는다는 공포를 안고 은신 중이던 때에 번역에 몰두한 책이 『다산산문선』(창비)이었습니다. 이번에 『다산에게 배운다』(창비)라는 책의 출간 소식을 들은 어떤 독자의 편지가 저의 옛일을 회상하게 해주어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박석무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봉남이라고 합니다. 현재 영남대학교 한문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산연구소에서 보낸 글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한 번도 답글을 적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답장을 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영남대학교 한문교육과에 다니던 20대 초반에 선생님의 『다산기행』과 『다산산문선』을 읽고 다산을 평생 연구하리라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산기행』에 실린 글들이 그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온 것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22살에 부친을 여의고 학창시절과 대학원 시절을 궁핍하게 보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이 더욱 공감이 갑니다. 어려운 시절에 작성한 선생님의 원고에 힘입어 평생을 다산연구에 정진하리라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선생님의 마음이 흐뭇하시리라 생각하여 이렇게 메일을 적어 보내게 되었습니다. … 2019.6.11. 김봉남 올림.”
저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는 김 교수의 메일을 읽어보니 가슴이 아련해집니다. 죽음의 사신이 눈앞에 어른거려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을 때 죽을힘으로 다산의 산문인 「자찬묘지명」 등을 번역할 때의 감회가 새롭게 되살아나고, 울분과 억울함에 요동치는 감정을 누그려 트리지 못하고 전국을 해매면서 다산기행을 쓰던 때의 기억이 역력합니다. 그런 허술한 책을 읽고 평생을 다산연구에 정진하게 되었다는 학자의 이야기에 제가 ‘흐뭇한’ 생각을 지니지 않을 수 없어, 김 교수의 글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200년 전의 다산이 고통을 이겨내려 저술에 몰입하던 일, 80년대의 혹독한 독재에 제가 견뎌내려고 썼던 시답지 않은 글을 생각하며 감회의 일단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봉남 교수 감사합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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