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사랑 같은 느낌은 없었다.
그냥 착하다는 느낌 정도와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은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GS칼텍스에 근무를 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고시 공부를 계속하고 있던 터라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때 아버님의 제의를 받고 “아버님,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했다. 그리고 사흘을 고민을 한 뒤에 그 여인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인생 뭐 있나. 서로 부족한 것은 살아가면서 채워가면 되는 거지. 그렇게 결심을 한 날이 금요일이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친구 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해서 내일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찾아 뵙고 여동생을 데려가겠다고 정식으로 말씀을 드릴 생각이었다. 저녁 9시 쯤에 전화를 했다. 그 시간이면 모든 식구들이 모여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따르릉, 따르릉”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그 당시는 유선전화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여보세요?”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영락없는 내 친구의 목소리였다.
“형이다. 이놈아!”
나는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내 친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하던 대로 말을 시작했다.
“누구라고?”
“이놈이 벌써 형 목소리도 까먹고...”
“누구라고?”
그러한 말이 들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저... 00(친구 이름)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숭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친구놈이 나에게 전화를 하면 “형이다.”하는 말로 시작하고, 내가 먼저 전화를 하면 “형이다.”하고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심한 욕설이 수화기 너머에서 마구 들려왔다.
아마 그 분은 내가 예의가 없는 놈이거나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 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결혼은 없던 것으로 했다. 도저히 그럴 집안이 아닌데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다시 아버님께 전화를 드려서 밀린 공부가 많아 공부 좀 더 해야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공손히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고 그 결혼을 사양했다.
지금도 나는 그 친구 집과 왕래를 하는데 친구 집에서는 그 이유 때문에 내가 결혼을 마다한 것으로 지금도 알고 있다. 나중에 우연히 알고 보니 그 날이 친구 집의 제삿날이었고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인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내 전화를 받은 사람이 현직의 경찰 간부라는 친구의 작은 아버지라 했다. 1년에 한 번, 그것도 제삿날에만 오는 작은 아버지인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그 분이 전화기 옆에 앉아서 내 전화를 받은 것도 운명이었다. 확률로 따지자면 엄청난 확률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점잖을 떠는 내가 하필이면 그렇게 전화를 건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그 뒤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 친구의 여동생은 얼마 전에 남편이 회사에서 단체로 등산을 갔다가 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궁금하다. 그 분의 과격한 말이 나와 친구 여동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그 분은 혹시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만약 그분이 내 전화를 받고 “이놈아! 전화는 공손히 하거라.”하고 꾸짖은 다음에 내 전화를 친구에게 바꿔주기만 했어도 나는 틀림없이 친구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당사자인 두 사람은 지금과 전혀 다른 운명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의 말 한 마디에 의해서 혹은 나의 행동 하나에 의해서 누군가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나는 최근에도 경험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는 위대한 일은 크고 별난 것이 아니라 말 한 마디라도 좋게 해주는 것, 말 한 마디라도 상냥하게 해주는 것,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그에게 따뜻한 미소 한 번 보내주는 것, 이러한 일도 위대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 결혼 얘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는 그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녀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예배에 출석해서 착한 남편, 좋은 남편을 보내달라고 기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아내는 아직도 바보인가 보다.
박완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