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의 푸르름이 신록에서 녹음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여름의 초입, 때맞추어 모처럼 친구들과 두물머리 세미원(洗美苑)에 놀러갔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花美心)는 옛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는 세미원에는 여기저기 연못에 동서양의 가지가지 연꽃이 심어져 있었다. 불가(佛家)에서는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도 항상 그 몸이 깨끗한 것(處染常淨)을 기리고, 유가(儒家)에서는 멀리 있어도 그 향기가 더욱 맑은(香遠益淸) 군자의 꽃으로 기림을 받은 품격 높은 꽃이다.
눈을 들어 강 건너 운길산을 바라보면 다산이 자주 들렀다는 수종사가 아스라이 보이고, 두물머리 언저리에 와서 유달리 질펀해진 남한강의 그 넉넉하고도 느린 흐름 저편 낮은 산 아래쪽에는 다산의 생가와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쪽의 경관은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남길 만큼 아름답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강 사이에는 미묘한 온도차가 있어 서로 만나 합치면서 아침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운해를 헤치고 나오는 일출이 장관이라고 한다.
다산은 자신이 바로 이 한강(洌水)가에 사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너희들은 이제부터 책을 짓거나 초서를 하는 경우에 열수(洌水) 아무개라고 칭하도록 하여라. 열수라는 두 글자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구별하기 충분하고 자기 사는 고향을 알 수 있게 해주니 아주 친절한 일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런 경관 속을 거닐면서 조국의 산하는 철 따라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라 되어가는 꼴은 이게 뭐냐는 한탄이 누구의 입에선지 튀어나왔고, 이로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행 모두가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면서 시작된 점심 자리는 어느새 이 나라 정치판 특히, 문재인 정부 성토장으로 변해갔다. 조국의 산하는 이렇게 아름다운데 스스로 정한 정부의 고위공직 후보자 배제기준인 병역기피, 세금탈루, 투기·위장전입, 연구부정행위, 음주운전, 성관련 범죄 등. 그 어느 것 하나에도 걸리지 않을 고위공직자가 단 한 사람이나마 있을까. 10여 명 넘게 청문보고서 없이 장관을 임명하면서도 대통령은 청문보고서 없이 임명된 장관이 일은 더 잘하더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그렇다고 그 누구 한 사람 나는 결코 떳떳한 사람이 못 된다고 스스로 사퇴한 사람이 없었고, 개혁은 높은 도덕성으로만 그 정당성과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데 도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명분으로 무엇을 어떻게 개혁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문재인 정부의 인사문제를 가장 먼저 도마에 올렸다.
무능, 거짓과 위선은 기본이고 처음부터 깜이 안되는 사람들이 장관으로 임명되고 그들이 추진하는 말 많은 최저임금제와 주 52시간 근무제, 성급한 탈원전, 돈 풀어 현금복지 등 졸속한데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정책들, 촛불이 국민세금을 맘대로 쓰라는 면허가 아니었는데도 네 돈이냐 내 돈이냐 나라를 거덜 낼 것 같은 거친 세금 씀씀이를 보면서 과연 이 나라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이대로 가도 되는 것인지를 국민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 정부가 과연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속에서 우리 기업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며, 저출산 고령화와 인구문제와 교육문제, 앞으로 무엇으로 이 나라 이 국민이 먹고살 것인지 등 장기적인 국가과제를 풀어갈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었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공무원 17만 명 증원계획이 이루어지면 이들에게 지급되는 급여와 연금이 모두 국민부담, 다음 세대의 부담이 될 것인즉, 문재인 케어 등 생색내는 일은 저희들이 하고 부담은 차세대에 넘기는 행태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박근혜 정부 때의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을 파기한 이면에는 무슨 대단한 복안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말짱 맹탕이더라는 이야기에서부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외교·안보· 경제정책 등 과연 이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켜줄 능력이 있는 정부인가에 대해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대북관계도 그 희망과 동력이 떨어진 지 오래인데 과연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고 지켜갈 철학이나 방안이 이 정부에 있는지조차 의문이고, 아들뻘 되는 김정은이 대통령의 행보를 오지랖 넓다고 힐난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라고 따끔한 질책 한번 못하면서 현충일에 난데없이 김원봉 얘기를 꺼내 국민 내부의 분열과 남남갈등을 증폭시키고 별별 의혹을 다 불러일으키는 언행은 또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말기 때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정권실세라는 사람들의 꼴값·육갑떠는 행보, 하루 평균 한 건씩 임명된다는 그들만의 잔치인 낙하산 인사 등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불평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는 영부인이 좀더 검소하고 겸손하며, 행사 때 반 발짝만 대통령의 뒤에 서거나 뒤따라 주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조심스런 의견도 있었지만, 어쨌든 유쾌하게 출발한 우리들의 나들이는 어느덧 우울하게 끝나고, 오는 길은 침묵 속에 무겁기만 했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출발할 때부터 많은 국민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갖고 있었다. 반듯하고 맑은 남자, 겸손하고 선한 인성과 진정성을 지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이 달라졌는가. 나들이에서 돌아와 2년 전 그의 대통령 취임사를 다시 읽었다. 역시 감동적인 취임사였다. 그러나 과연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웠는가. 그 초심은 지금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여기 어느 신문에서 누군가가 압축한 그 취임사를 옮긴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는 취임사 “내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지금 내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사와 국민 앞에 두렵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제19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나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나의 국민이고 우리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입니다. 전국적으로 고르게 인사를 등용하겠습니다. 나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서 일을 맡기겠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깨끗한 대통령,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오늘,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