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열림원·1만3500원
소설가에게 산문이란 여기(餘技)이거나 용돈 벌이의 수단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소설보다는 부담이 덜하고 손을 풀듯이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장르로 여겨지기도 한다. 독자쪽에서는 소설가와 그의 소설에 접근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산문을 활용할 수도 있다. 산문에서 작가는 자신의 문학적 성장담과 소설 배경, 주변 사람들 이야기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기 때문이다.
김애란(사진)이 등단 17년 만에 내놓은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역시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좁히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가령 책 맨 앞에 실린 글 ‘나를 키운 팔 할은’에서 그는 자신의 단편 ‘칼자국’ 등의 배경이 된 어머니의 손칼국수집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어머니가 8년간 운영했던 이 식당에서 김애란은 “손님과 더불어 그들이 몰고 온 이야기”를 접했으며, “그곳에서 내 정서가 만들어”졌노라고 털어놓는다.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그 공간에서 그는 또 “내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이랄까 태도를” 배웠다고 한다.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와 비슷하게 평온하고 규칙적인 도마질 소리를 들으며 밀가루를 먹고 무럭 자라 열아홉이 되었다.”
그 어머니는 딸의 등단 소식을,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간 노래방에서 들었다. 그런가 하면 동기들이 마련한 축하 모임에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아닌 학교 앞 허름한 빵집에서 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들고 온 남자 동기는 풀 죽은 채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김애란은 그로부터 오랜 뒤에야 그 말이 “얼마나 다정한 말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밝힌다. “그 무렵 그렇게 조금씩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럽고 따사로운 무엇이 나를 키우고 가르친 건 아니었을까 하고.”
연애 시절 어머니를 만나기 시작해서 6개월 동안 손을 한 번도 잡지 않았던 아버지가 마침내 취기의 힘을 빌려 엄마의 손을 잡게 되었을 때 했던 말은 무엇이었나. “조양, 인간을 그렇게 오래 저울질하는 게 아니유. 나 김정래란 사람을 한번 믿어보시유.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유.” 그런가 하면 역시 ‘칼자국’에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소소한 내기 화투를 치다가 경찰이 들이닥치자 “양손에 현금을 쥔 채 논둑길을 달려가다 넘어져 흙투성이”가 된 여자가 바로 작가의 엄마라는 고백도 곁들인다.
충청도 출신다운 능청스러운 유머는 김애란 소설의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그런 김애란이 “내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걸 배웠”다고 말할 때, 그리고 선배 작가 윤성희를 두고 “활달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기 쉬운데 선배는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배려하며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때, 독자는 김애란이 어언 18년차 중견 작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책에는 2014년 세월호 합동 산문집 <눈먼 자들의 국가>에 수록된 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과 재난 소설 ‘물속 골리앗’에 관해 쓴 작가노트도 실렸다. 작가노트에서 김애란은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라며,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는 말로 개별 인간의 존엄성을 환기시킨다. 산문집 제목이 그로부터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