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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칼럼] ‘기생충’과 중산층 파국의 징후 읽기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7. 5. 16:53

[조은 칼럼] ‘기생충’과 중산층 파국의 징후 읽기

등록 :2019-07-04 17:36수정 :2019-07-04 19:42

 

조은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 기생충>에서 나는 한국 사회 중산층의 파국을 읽는다. 어쩔 수 없는 사회학자의 읽기다. 영화평은 대체로 부유층과 빈곤층의 건널 수 없는 벽 또는 상층과 하층의 관계에 맞춰진다. 곳곳에서 기생충과 숙주 감별을 둘러싼 논쟁도 뜨겁다. 영화 내내 부자와 빈자의 공간이 대비되고 그 공간에 들인 빛의 차이, 소리와 소음의 차이, 그리고 계단과 냄새까지 봉준호 감독의 치밀하게 계산된 화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대비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빈자로 재현되는 기택네 가족이나 박 사장의 가정부 문광네 부부는 빈곤층이라기보다는 몰락한 중산층이다. 기택은 치킨집을 운영하고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하다 망해서 와이파이도 안 잡히는 반지하 셋방으로 내려앉았다. 아내가 가정부로 있는 주인집의 비밀스러운 지하 벙커에 남편 근세가 숨어든 사유도 같다.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운영하다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게 된 것이다. 생산수단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 분류를 굳이 한다면 두 집 모두 구 중간계급이었다. 그런데 지하 벙커의 근세 머리맡에 꽂힌 책들이나 문광의 살림솜씨, 건축가의 집 운운하는 안목 등은 제법 괜찮게 살아본 중산층의 포스다. 기택네 부인 충숙은 한때 투포환 선수였고 아들 기우는 명문대 낙방 4수생이며 딸 기정은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미술 치료 전문가를 흉내 낼 수 있는 미대 지망생이다. 잘 풀렸다면 대학을 나와 신 중간계급 트랙을 밟을 만하다. 이들 신구 중간계급을 사회학자들은 중산층으로 통칭한다. 이들은 교육과 기업가 정신이라는 한때 우리 사회가 공인한 사회 이동 통로를 추종했고 끈끈한 가족애를 보이는 ‘정상적 가족’이다.

<기생충>에서 계단 이미지는 ‘막혔지만 열린’ 공간이다. 누군가는 내려갈 일이 없고 누군가는 내려갔지만 올라오는 것은 난망이고 누군가에게는 올라가고 내려오며 우아함을 뽐내는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지만 위험과 파국이 예견된 음산한 공간이다. 박 사장네 지하 창고보다 더 아래의 지하 벙커에 은거하는 근세는 박 사장을 ‘리스펙’하고 반지하의 기택네 가족은 박 사장 집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빌붙지만 파국을 면하지 못한다. 알레고리로 읽건 착실한 현실 반영 영화로 읽건 한국 사회 계급과 불평등 수업 텍스트로 웬만한 사회학자 논문보다 낫다. 한참 <기생충>에 빠져 지내다가 평생에 걸쳐 한번도 바닥에서 올라오지 못한 어떤 가족 이야기를 소환하게 되었다.

<기생충>이 개봉되기 한달 전쯤 서울의 한 변두리 반지하 셋방의 계단식 화장실을 카메라에 담은 적이 있다. 내가 사당동 철거재개발지역 현장 연구에서 만난 열두살짜리 소년이 마흔다섯의 다문화가족 가장이 되어 자기 집을 얻어 이사한 날이다. 그는 사당동에서 할머니, 홀아버지, 두살 아래 여동생과 다섯살 아래 남동생 등 다섯 식구의 일원으로 허름한 판잣집 방 한 칸에서 살고 있었다. 사당동이 철거되면서 주민등록상 아버지를 지운 조손 가족으로 중계동 임대아파트를 얻은 할머니를 따라 이사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임대아파트를 승계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이 가족의 33년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중이어서 촬영감독과 함께 그의 이사 날에 동그라미를 쳐두었다가 달려갔다. 이사한 반지하 셋집에 들어섰을 때 그가 우리에게 맨 먼저 자랑스레 보여준 공간이 계단을 딛고 올라가는 화장실이었다. “아내가 월세를 5만원쯤 더 내더라도 무조건 이 집을 얻자”고 한 것은 화장실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샴푸도 없고 때 묻은 세제통도 없는 텅 빈 화장실 공간을 계단과 함께 잡아보니 그림이 잡혔다. 이들 가족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첫 장면으로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택네 화장실은 내가 잡은 반지하 셋집의 화장실과 매우 닮아 있다. 그런데 공간에 담은 이야기는 다르다. 기택네 가족에게 계단 위의 화장실은 지상에서 밀려난 중산층의 좌절을 쏟아내는 공간인 데 비해 내 다큐멘터리 가족에게는 ‘오랜 꿈의 공간’이다. 방바닥보다 한 계단 높은 화장실을 자랑스레 보여준 그는 필리핀에서 아내를 맞은 지 11년 만에 아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월세 보증금으로 내고 아들딸과 함께 아버지의 임대 아파트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자발적 휴직을 한 적이 없고 1년을 채우기 전에 늘 잘렸지만 쉬지 않고 일했다. 큰 사고도 없었고 큰 병을 앓지도 않았다. 내가 33년 전 사당동에서 이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의 아버지와 꼭 같은 처지에 있다. 불안정한 수입에 주거 조건도 비슷하다. 하수관이 늘 터져 있던 철거를 앞둔 사당동 셋방에 비하면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아버지보다 학력은 조금 나은 편이다. 그 밖에 아내가 있다는 것을 빼면 별로 나아진 게 없다. <기생충>을 보면서 한순간 대책 없이 밀려 떨어지는 사회는 불안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가족을 보면서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올라서지 못하는 사회는 절망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기생충>이 관객 천만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이토록 많은 관객이 들었다는 것은 단지 황금종려상의 후광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주변에서 보면 중산층의 신화가 허구임을 체감하고 언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네에 감정이입하는 관객이 적지 않다. 호화스러운 집을 차지한 박사장의 피로한 눈빛에도 감정이입을 할지 모른다. 잠깐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언제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답답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와 장면들을 되짚어보다가 불쑥 끼어든 웃긴 장면을 꺼내 들었다. 문광이 지하 벙커에 숨긴 남편을 들킨 절체절명의 순간 북한의 김정은을 희화화하면서 기택네 가족을 협박하는 장면이다. 김정은을 희화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전세계를 향해 ‘한반도의 핵’을 희화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택네와 문광네 가족에게 휴대전화의 ‘보내기’ 버튼 하나가 북한의 미사일이나 핵폭탄 버튼보다 더 그들의 일상을 일순 폭파해버릴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다. 살짝 끼어든 이 한 장면은 가상의 위험과 실재하는 위험이 혼돈하는 우리의 일상을 다송 생일파티의 비극적 우화와 겹쳐놓는다.

<기생충>이 ‘계급의 냄새’로 전 국민의 후각을 업그레이드했다면 계급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이 가져올 파국의 징후에 대한 후각도 업그레이드했으면 좋겠다. 더 추가한다면 머리 위에 이고 있다는 핵만이 아니라 우리 발아래 묻힌 하수관 깊이와 도면에 대한 민감성도 업그레이드했으면 한다. 이 장마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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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0529.html?_fr=mt0#csidxaba438116deaadfba872e3ad57020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