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소설소설, 콩트, 에새이, 칼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였다. 거실의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여느 때처럼 TV를 바라본 탁자 앞 소파로 은경은 걸어가고 있었다. 거기서 후식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TV를 보고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뻥 소리와 함께 그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8개월 전 외출했다가 낙상해서 대퇴골 골절이 있어 수술한 뒤 퇴원해서 이제 겨우 집안에서는 거동이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또 넘어진 것이다. 노년이 되면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골다공증으로 넘어지면 골절되기 일쑤다. 119를 불러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또 대퇴골의 골절이었다. 이번에는 전번 다리의 반대편인 왼편 다리였다. 수술 일정은 빨리 잡혀 주말을 보내고 화요일 첫 시간이었다. 8개월 전에도 수술 전 동의서에 서명을 하면서 나는 불안하였다. 전신마취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때 수술이 끝나고 다른 사람은 다 병실로 돌아갔는데 은경은 중환자실에 있으니 와 보라는 전화였다. 그녀는 코에 호스를 끼고 산소공급을 받으며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 같기도 했다. 의사는 나더러 손을 컵처럼 하고 잠들지 않도록 계속 은경의 가슴을 두들겨 주라고 했다. 수술하는 동안 폐가 기능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소량을 늘리고, 가슴을 두들겨서 잠들지 않게 하고 폐에 물이나 공기가 차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간호사들이 나를 밀어내고 다음날 10시부터 30분간 중환자 면회시간이 있으니 그때 오라고 했다. 다행히 하루 뒤 일반병실로 옮겼는데 한 방에 있던 다른 분의 간병인이 나더러 노인이 어떻게 중환자를 간병하려 하느냐고 자기가 간병인을 소개하겠으니 도우미를 쓰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돌보는 것은 내 의무라고 여기고 그녀가 퇴원할 때까지 도우미 노릇을 할 것이라고 고집하고 있었다. 환자의 간병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최 장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내 아들의 친구였는데 아들은 최 장로에게 국제전화로 나를 설득해서 도우미를 쓰도록 하게 해 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다고 한다. 병원에 찾아온 최 장로는 자기가 미국의 아들이 보낸 특사라면서 간병인을 쓰라고 간청했다. 결국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 며칠 후 나는 손을 들고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그 뒤로는 집에서 자고 매일 병원으로 출퇴근하였다. 어쩌다 가지 않으면 은경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언제 올 거야?” “지금 곧 갈 게.” “나 지금 댈러스에 있는데 어떻게 와?” “내 차로 운전하고 가지.” “차로 운전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어?” 은경은 그때까지 섬망증(譫妄症)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누가 문병을 오면 알아보기는 하지만, 누가 왔는지 곧 잊어버렸다. 문병 온 사람도 은경을 보고서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아직 정신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다시는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은경의 전신마취 수술을 이번 두 번째 골절 때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가 수술 동의서를 받으면서 “나이가 많고 빈혈증이 있기 때문에 심장박동이 약해서…”라고 하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수술 중 문제가 생길 경우도 고려하고 서명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지난번까지는 무심코 서명했지만 이번에는 너무 손이 떨렸다. 수술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나는 은경이 오랫동안 먹지 못했으므로 미리 영양제 주사를 놓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수술 전 수혈도 하였다. 그렇게 준비한 뒤 잡힌 수술 날자가 화요일 첫 번째 시간의 수술이었는데 갑자기 수술 전날에 폐 기능검사를 해야 한다는 통보였다. 폐가 약하고 산소 수치도 낮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고 호흡기내과 주치의의 소견을 들은 뒤에 수술을 하겠다고 하는 주치의의 신중한 판단 결과였다. 한두 시간 수술이 늦어진 것은 좋은데 이 모든 것이 나를 불안케 하였다. 따라서 수술은 화요일 아침 좀 늦게 시작되었다. 입원하고 있었던 병원 별관인 관절염센터에서도 수술이 가능했지만, 본관이 협조할 수 있는 의료진도 많고, 시설도 좋아 그쪽으로 옮겨 수술하기로 하였다. 나는 수술실에 들어갈 때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주를 앙망하는 당신께 주께서 새 힘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들어갔다. 우리 형제 가족들끼리 오래 전에 야외식사를 예약해 둔 것이 수술 후 며칠 뒤라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예약을 취소하고 형제들에게 알렸다. 동생네 가족들은 모처럼 약속을 잡아 비워 둔 기간이기 때문에 그날 대전으로 모두 문병을 오겠다고 우겼다. 그럼, 왕복 요금은 내가 가족적금에서 지원하겠다고 했더니, 둘째 동생이 가족적금을 쓰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문병에 가족적금을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그런 적금은 꼭 필요할 때 쓰기 위해 부은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이 은경의 수술이 잘못되어 혹 장례라도 치르게 되면 그때 쓰겠다는 말처럼 불길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자 교회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형제 가족들에게도 수술이 잘 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왜 기도로 남을 귀찮게 하는가? 무엇이 기도인가? 내 가족의 무병장수와 축복, 성공을 비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분이 옳다는 것을 믿고 그분의 뜻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헌신하면 그분 뜻을 따라 순종이 있을 뿐이다. 믿음은 순종에서 오고 순종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제사장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나를 단독자로 세우셨다. 왜 내가 당한 고난을 하나님께 풀어 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는가? 이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었다. 그랬지만 이 긴박한 순간에 나는 한없이 속되고 싶어졌다.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서 수술자 명단을 보고 있는데 80세 중반을 넘은 은경이 제일 연장자였다. 그녀는 이곳 병원에서도 전신마취만 이번까지 네 번째다. 심장 때문에, 뇌 때문에, 8개월 전 골절 때문에, 그리고 이번 다시 골절 때문이다.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3시간을 좀 넘기고 중환자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예상 외로 은경은 지난번보다는 좀 건강해 보였다. “이겨냈구려.”라고 말하자 은경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간호사가 은경더러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은경은 “내 남편”이라며 행복해 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얼마 동안 더 살게 해 주셨다는 생각으로 나는 감격의 눈물이 솟구쳤다. 간호사는 이번에는 출혈이 많아 수혈을 여러 병 했다고 말하며, 주치의 선생이 적어도 이삼 일은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다음날 면회시간에 오라고 했다. 이튿날 면회시간에 갔더니 은경은 얼굴에 홍조를 띄며 나를 맞아주었다. “중환자실은 있을 만했어?” “네. 이곳은 천국 같아요. 당신이 들어와서 손을 잡아준 뒤, 나는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벽이고 천장이고 그림으로 너무 잘 단장되고 아름다웠어요. 어둠이 없고 날빛보다도 더 밝은 그곳은 꼭 천국 같았어요. 나는 서 있었는데 어디에 좀 눕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곳은 모두 네 방이니 어디나 누워도 된다고 말했어요. 나는 소파에 앉았었는데 그곳이 침대였어요. 이곳이 어디냐고 내가 묻자, 천사 같은 한 간호사가 이곳은 충남대학교병원 중환자실이라고 했어요.” 듣고 있던 간호사가 중환자실을 천국이라고 말한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아무 아픈 데도 없고 몸이 공중을 떠다니는 깃털처럼 가볍고 기분이 좋았어요.” 은경은 아직 좀 섬망증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두고 떠나버리면 어쩔까하고 너무 걱정했어요. 이제는 퇴원하면 방안에서도 넘어지지 않게 당신 손을 잡고 걸을 게요. 밖으로 못 나가도 되요. 방안에서 TV를 보다가 당신이 ‘캐나다 록키 나왔어요. 루이스 호수도 나왔구요.’라고 거실에서 나를 향해 소리치면, 나는 서재에서 달려가 함께 볼 거요. 정말 살아나 주어서 감사해요.” “나는 수술하러 들어갈 때도 걱정 안했어요. 살 만치 살았는데 당신 사랑 받으며 이렇게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어요.” “뭐 죽는다고? 이제 나와 인연 끊고 싶어요?” “왜요? 제가 먼저 요단강 건너가 천국에 있으면 당신은 나 때문에 더 이상 고생도 하지 않고 얼마 뒤 천당에 올 거 아니에요. 거기서 만나면 되잖아요. 나는 더 이상 당신 고생시키는 것 싫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당신을 살려 놓았는데… 사실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것이지만.” 짧은 30분 동안의 대화였다.
은경은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라고 했지만, 그녀는 죽은 뒤에 간다는 천국을 현실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그가 보낸 성령을 따라 살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그녀는 평소 말했었다. 왕과 백성과 영적인 나라가 있으니 그곳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녀는 살면서 질투도 원망도 미움도 원수 맺는 것도 없었다.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고 형제들의 우의에 감사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천국을 체험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성경의 교리를 풀어 이렇게 저렇게 천국을 해석해 주면 그녀는 그런 설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술 먹지 말라. 아프지 않으면 일하라. 성수주일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더 좋아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할 힘도 없고,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살고 싶은데, 교회가 그런 삶을 살도록 그냥 놓아두면 안 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늘 교회에 부담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나는 죽어 천국에 가고 싶다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난을 참고 견디며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천국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눈물이 없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곳이 천국이다. 이 세상에 그런 곳이 있을까? 그런 천국에 가려면 죽어서 요단강을 건너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망자는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한다. 아케론 강(슬픔/비통), 코키투수 강(탄식/비탄), 플레게톤 강(불), 레테 강(망각), 스틱스 강(증오)이 그것이다. 망자는 이 강물들을 한 모금씩 마셔야 하는데 그러면서 현세의 기억을 송두리째 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천국에 가는 사람이 이 세상의 번뇌와 울분을 다 기억하고 그 짐을 짊어지고 간다면 그곳이 어찌 천국이겠는가? 다 잊어야만 한다. 그런데 예배당 강대상 맨 앞줄에 앉아 몸을 흔들며 복음성가의 곡에 맞춰 반 박자에 한 번씩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예배를 준비하는 연로한 여 성도들을 보고 있으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이 세상을 심판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빨리 천국에 가서 악인은 지옥에, 그리고 괴로운 삶을 참고 살고 있는 그들은 낙원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살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저들은 천국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고 건너간 젖과 꿀이 흐르는 바로 지상 어디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곳에서 조상님들과 먼저 간 형제들이 고생 그만하고 건너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곳에서 교인들이 다시 모여 사는 것이라고 노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천국은 위치 개념이 아니고 통치 개념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들이 기대하고 있는 천국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다. 어제가 있고, 현재가 있고,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영원함이 있을 뿐이다. 천국의 시작이 ‘알파’고, 그 끝이 ‘오메가’라면, 알파 이전의 시간이 없고 오메가 이후의 시간이 없다. 알파 전의 시간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때까지 무엇하고 있었겠는가? 또 오메가 후의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한이요 영원이 아니다. 즉 그곳엔 시간이 없다. 꼭 있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알파와 오메가가 이어져서 환環이 되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순환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곳은 공간의 제약이 없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의 연장선상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래, 위, 옆이 다 막혀 있어도 또 들어올 문이 있는 4차원, 5차원, 아니 무한 차원 공간과 같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공간에 천국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육의 몸으로 죽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지만 천국에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기 때문이다. 이런 천국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모를 아내, 은경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천국을 넘볼 수가 없다. 천국은 깊은 단애斷崖의 저편에 있어 헤엄쳐서 갈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는 곳에 있다. 영원에 있는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찬송가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을 생각한다. 장례식 때마다 부르는 찬송이다. 거기에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찬송이 우리 성도를 오해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요단강은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 사해로 들어가는 지상의 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이세(二世)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강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찬송에서 말하는 ‘요단강’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데 필수적으로 건너야 하는 죽음을 맞는 강이다. 실제 이 찬송의 원작사자 베넷(S. F. Benett)은 요단강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머지않아 꿀 같은 행복 속에 우리는 저 아름다운 피안에서 만나리. (In the sweet by and by
가수이기도 했던 베넷이 이 찬송을 만들었을 때를 회상하며 쓴 글은 다음과 같다. 평소에 늘 신경이 예민하고 우울했던, 가수인 친구 웨브스타(J. P. Webster)가 이 날도 침울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고 난로 가에 앉는 것을 보고 그는 “오늘은 또 웬 일이야?”라고 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 곧 좋아질 거야(It will be all right by and by.)”라고 대답했었다. 이 때 베넷에게 번개처럼 한 악상이 떠올랐다. “머지않아 꿀 같은 행복이(The Sweet By and By!)! 어때 멋있는 찬송가가 될 것 같지 않아?” 이렇게 해서 30분 만에 둘이서 만든 찬송이 ‘Sweet By and By'라는 우리가 부르는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이라는 찬송이다.
낮보다 더 밝은 나라가 있네 머지않아 꿀 같은 행복 속에 우리는 아름다운 저 피안에서 만나리 머지않아 꿀 같은 행복 속에 우리는 아름다운 저 피안에서 만나리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요단강을 건너 천국에 갔다. 그곳에서 손짓을 해도 나는 갈 수 없으며 죽은 자는 가족들이 고통을 받고 사는 것을 잊었으며 그런 가족들을 안타까워하거나 이곳에 다시 오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원망, 미움… 모든 짐을 내려놓고 갔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편히 쉬시라.”고 우리가 기원했던 대로 그들은 거기서 우리를 잊고 편히 쉬고 있다. 가족들이 지상에서 조상을 그리며, 제사나 추도예배로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을 불러 복 비는 제사를 지내거나, 망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지라도 그들은 우리를 만나려고 하지도, 그 잔치자리에 음식을 먹으러 찾아오지도 않는다. 천국은 영원한 피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천국은 실제로 있다(Heaven is for real; 한국어 판 제목 ‘3분’)”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작은 도시 목사가 쓴 것으로 전 세계에 8백만 부가 팔렸다. 네 살 먹은 그의 아들이 맹장 파열로 힘든 수술을 마치고 난 뒤에 의식이 떠나 있던 3분 동안에 본 천국 이야기를 쓴 책이다. 이 목사는 수술에서 회복한 아들 콜튼을 태우고 운전하고 갈 때, 꼬마가 갑자기 “아빠에게 팝이라는 할아버지가 있었죠?”라고 질문하는 것을 듣는다. 팝은 목사의 외할아버지였는데 콜튼이 태어나기 25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다. 그런데 꼬마가 그분을 어떻게 알고 천국에서 만났다는 것인가? 그분은 세상에 있을 때 개를 데리고 콜튼의 아버지와 토끼사냥을 하고 다녔다면서 꼬마는 자기들도 그런 개를 샀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문제는 팝 할아버지는 평소 교회를 잘 다니지 않았는데 어떻게 천국에 갔을까 하고 목사가 생각하는 것과 둘째로 내 상식으로는 천국에서는 친척도 알아볼 수 없고 세상의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목사는 팝 할아버지가 교회에 잘 다니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천국에 간 것은 팝 할아버지가 시골 부흥회에 참가했을 적에 부흥사가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손을 드는 것을 목사의 처제가 보았다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였다. 결국 한 순간의 이벤트로 천국에 갔다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자기와 함께 매달린 한 강도가 예수를 시인하여 낙원을 약속 받은 것처럼 팝 할아버지도 예수님께 헌신하겠다고 손 한 번 들고 천국에 간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만일 천국에 간 사람이 세상과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친척의 비운을 보고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또 친척들에게 지상에서 일어난 악한 일들을 보고 보복해 주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계시(啓示錄)에서도 천국 보좌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큰 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주님 언제나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여 우리를 죽인 원수를 갚아주시렵니까?”하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원수 갚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었으며 또 그것이 천국에 간 사람들이 외칠 목소리냐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보면 천국에 가기 전 지상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끊지 못하는 영혼들이 머물고 있는, 소위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煉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단테는 지옥 편, 연옥 편, 천당 편으로 되어 있는 “신곡”에서 지옥, 연옥, 천당을 살피며 천당의 지고천(至高天)까지를 백 편의 시로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옥을 빠져 나온 단테는 연옥을 둘러싸고 있는 바닷가로 내려가 풀잎에 맺혀진 이슬로 지옥에서 더럽혀진 얼굴을 씻고 물가에 피어 있는 ‘겸손’의 상징인 골풀을 꺾어 허리에 두르고 연옥 편력에 이른다. 연옥에 머문 망령들은 죽기 전에 겨우 잘못을 뉘우쳤으므로 현세에서 누렸던 쾌락의 시간만큼 천당 문을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대기하고 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만을 겨우 면한 망령들이 천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단테에게 현세에 돌아가거든 자기들의 친척들에게 곧 연옥에서 천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연옥에는 일곱 개의 두렁길이 있는데 그곳에는 지상에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태도들이 있다. 이런 교만, 질투, 태만, 탐욕, 탐식, 색욕을 말끔히 씻어야만 연옥을 탈출할 수 있다. 이 두렁길을 다 지나면 드디어 나타나는 것이 레테강과 에우노에강이다. 낙원에 이르기 전에 죽은 자들은 꼭 이 강을 건너야 한다. 레테강은 슬픔과 고통에 처해 있는 세계의 모든 죄악의 기억을 앗아가는 강이요 에우노에강은 모든 선행과 행복에 대한 기억을 회생시키는 강이다. 결국 천국은 모든 슬픔과 고통과 원한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참 생명을 회복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은경은 중환자실에서 병실로 돌아와 많이 회복되었지만 식욕이 없고 투병하기가 괴로운 것 같았다. 수술 전날 밤 12시부터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한 지 10일이 되어 가는데 변을 보지 못해 불안해하고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뱃속이 편해진다는 ‘불가리스’나 ‘쾌변’ 같은 음료수를 마셔보지만 특별한 효과가 없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 처음 며칠은 죽을 먹었다. 그것도 싫다고 해서 밥을 시켰는데 그것도 물을 말아 조금 먹다 마는 형편이었다. 억지로 더 먹으라고 강요하면 그녀는 안타까운 듯 나를 쳐다보며 “나 정말 먼저 죽으면 안 될까?”하고 말했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너무 힘든 모양이었다. “또 그 말이야?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 그렇지만 나는 고난을 받더라도 이 세상에서 좀 더 당신과 함께 애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고 싶어. 그렇게 나와 헤어지고 싶어?” “나는 천국에서도 당신을 기억하며 기다리고 살 거예요. 성경에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 천국이 어떻게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는 비운의 장소가 되겠어요?” “그래요. 그곳은 날빛보다도 더 밝은 곳이겠지요. 아담의 죄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세상이지요. 아담이 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것을 모르던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한 그 세상으로 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당신은 천국에 갈 때는 망각의 레테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나 또 하나의 강은 모든 선행과 행복의 기억을 회생시키는 에우노에강이라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은 그 강물을 마실 때 다 회생될 거예요. 나는 그 기억을 갖고 당신을 기다릴게요.” 그러면서 “천국은 블랙홀이 아니잖아요? 모든 기독교인들이 천당에 가려고 예수를 믿는데, 당신처럼 그렇게 부정적으로 천국을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고, 거룩한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진주 문이 있고, 성城의 길은 정금으로 되어 있고 사시사철 꽃이 피어 있는 그런 곳을 상상하면 안 돼요? 나는 그런 곳에 가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만일 천국 문 앞에 베드로가 서 있어서 당신은 세상에 있을 때 전도는 않고 남편만 사랑했으니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당신 오기까지 문 밖에서 기다려야지 뭐.” “내 생각에는 죽어보지 못하고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잘못된 인식을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자기가 천국에 갈 자격은 없지만 거기에 꼭 가보려고 한 것은 못 된 목사도 천국에 와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데. 또 어떤 이는 구원받았다고 뽐내며 장로답지 않게 살다 죽은 교인이 천국에서는 초막집에서 거지같이 사는 꼴을 보고 싶고, 말없이 봉사하며 살다간 교인은 금으로 지어진 구중궁궐 같은 집에서 면류관을 받고 호화롭게 사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천당에 가고 싶다고 했데.” “천국이나 불못인 지옥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까지 이름만 있고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은경은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당신은 천국에 가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거요?” “가 봐야 알겠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다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은경은 갑자기 또 물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요?” “왜 갑자기?” “당신이 병원교회에 갔다 오면서 주보를 가져왔는데 그곳에 결신자 명단이 918, 919… 이렇게 나와 있던데 그것은 이 교회에서 9백여 명을 천국에 갈 사람으로 등록시켰다는 것 아니에요?” “글쎄 그렇겠지. 그러나 교회에 나오겠다고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잖아? 교회 의식인데 세례를 받으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칭의(稱義)의 단계일 뿐이야.” “그래서 목사님은, 칭의는 천당 가는 입장권이지만 그것으로는 타는 불에서 꺼내 구원한 부지깽이 같은 부끄러운 구원이며,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거군요?” “예수를 닮아가는 행위를 성화(聖化)라고 하는데 나는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묶여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것을 별도의 단계로 나누어 먼저 세례로 칭의의 단계에 들어가고 다음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성화의 행위를 보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 해.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야. 봉사라든가 선교라든가 헌금이라든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노력했다 할지라도 인간의 행위는 천국의 유업을 보장 받는 구원의 완성일 수 없어. 그것을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몫이야.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해.” “그냥 나는 이 복잡한 과정과 이론은 생각하지 말고 일단 천국에 가보고 싶어요. 내 이름도 천국의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까요?”라고 은경은 물었다. “말했지요. 당신은 나처럼 아직 천국에 갈 준비가 안 되었다고.” “왜요? 아직 성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요? 나는 다시 살아나도 늙어서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는 못해요.” “말했잖아요.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해요.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격하고 사는 사람이잖아요. 감격의 삶으로 남은 인생을 주의 증인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 태도, 몸짓, 미소,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주는 나의 하나님 나는 그의 백성’임을 몸소 보이며 주님의 증인으로 삶을 살면 돼요. 믿음으로 살면 돼요. 나도 당신과 그런 삶을 좀 더 살고 싶어요.”
열흘 만에 은경은 결국 관장하기로 하였다. 병원은 시시각각으로 병자의 체온, 혈압, 산소수치, 맥박 등을 조사하고 있었다. 배설도 그들은 신경 쓰고 있다. 나는 그들의 지시에 따르면 환자의 육신의 생명은 유지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침대를 끌고 널찍한 장애인 화장실로 갔다. 간호사는 관장용 좌약 두 개를 항문에 삽입하고 15분 뒤에 올 테니 환자가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기저귀로 항문을 막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고 떠났다. 15분 뒤에 그토록 걱정되고 고통스럽던 배설은 끝났다. 은경은 기분이 좋아서 병실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떠먹는 요거트’를 갖다 주었다. 좀 입맛이 도는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을 때는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말했다. “장아찌에다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요” 이건 정말 희망적인 목소리였다. “그래, 그걸 구해 올까?” “집에 가면 김치냉장고 제일 아래편에 ‘나라츠케’가 있어요. 뭔지 알아요?” “그럼 알지. 오래 전에 둘째 며느리가 갖다 놓은 일본 장아찌잖아?” “그래요. 참외보다는 좀 크고 긴 울외가 술지게미 속에 박혀 있을 거예요. 그걸 반절만 잘라 꺼내서 씻은 뒤 잘게 썰어 오세요.” “그럼. 그렇게 하지. 내일 바로 가서 가져올 게.”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쳤다.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띄고 천정을 바라보며 꿈꾸듯이 말했다. “당신, 나박김치도 담글 수 있어요?” “그럼. 물김치잖아. 그것도 할 수 있어. 못하면 우리 교회에서 제일 솜씨 좋은 권사님에게 배워서 담가 올게.” 이제는 은경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완전히 살아졌다. 얼마 있다가 그녀가 말했다. “그건 좀 어렵겠다. 그냥 두세요. 내가 나가서 담글게. 그런데 당신 뭐가 그렇게 좋아요?” “다시 삶의 의욕이 솟아난 것 같아. 천국 이야기가 쑥 들어갔잖아.” “천국 안 가겠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요?” “그럼. 다 천국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지금 나와 함께 천국 갈 사람은 손들어요.’하면 아무도 안 들 걸.” “나는 베드로 때문에 못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못 가는 거예요.” “아무튼 감사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스스로의 행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천국 문 앞에 서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독교에서 천국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서 쉬고 싶다고 노래했던 내가, 나도 천국에 안 들어갈 뿐 아니라 그렇게 가고 싶다는 은경을 천국 문 앞에서 막고 있다.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인가? 지금 천국 문을 막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선악과의 유혹을 못 이기고 찰나의 단맛을 즐기고 있는 아담인가? 나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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