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하나님은 노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시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8. 31. 06:39

하나님은 노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시론|소설, 콩트, 에새이, 칼럼

은혜 | 조회 71 |추천 0 |2019.08.29. 19:21 http://cafe.daum.net/seungjaeoh/J74U/82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보면 풍전등화처럼 불안하다. 원래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화약고처럼 불안한 위치에 놓여 있다. 거대한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의 남단에 위치한 작은 반도다. 유일하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지혜로운 외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나라가 지금은 중국, 러시아, 북한의 으름장에 위협을 받으며 가까운 일본이나 우리의 우방이던 미국에서도 우리는 외면당하고 있다. 사면초가가 되었다. 이때 치아는 무너지고, 시각과 청각은 약해지고, 기억도 깜박거리는 노인들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의 힘은 다 사라지고 백발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고려장이 사실 있었다면 그 제도를 법제화해서 내가 죽더라도 내 자녀들이 힘겹지 않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생산연령인구(15-64)3,759만 명인데 노령 인구(65세 이상)769만 명(20.44%)이라고 한다. 한 자녀를 낳아서 기르기도 힘 드는데 다섯 사람당 한명 꼴로 노인을 부양하고 살려면 젊은이들은 등골이 휘어질 것이다. 그런데 노인정에서는 수시로 노인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하고 버스로 관광을 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인 복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훌륭해서 한국은 노인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노인회에는 16개 시·도 연합회가 있고 244개 시·군 지회가 있으며, 그 밑에 65,000개 정도의 경로당을 가지고 있다. 이 경로당을 매월 보건복지부나 시·도자치행정부에서 적지 않은 활동비와 쌀도 지원해 주고 있어 경로당은 놀러 다니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선거철이 되면 경로사상을 고취해서 뭔가 더 도와 줄 것은 없을까 해서 나라에서는 선심 쓰기에 바쁘다. 목욕, 이발, 이용 등 쿠폰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고령자의 임시 일용직으로 급식 도우미, 교통 주차질서 계도, 청소부, 잔디 깎기, 대형 건물 소등 직 등으로 고용율도 높이고 적지 않게 용돈도 벌게 하고 있다.

이런 때 하나님은 우리 노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고 있는지 기도하며 알고 싶어진다. 잠언 16:31에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며 의로운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 하고 있다. 백발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지혜, 더 많은 미래의 비전을 꿈꾸며 사는 삶이 쌓여서 백발을 얻게 된 것이다. 노인은 일제의 학정을 견디고,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자유민주국가를 세우고, 6·25 참사를 겪고, 단시일에 최빈국가에서 최강국가로 발전한 모든 양상을 몸으로 체험한 산 증인이다. 백발의 면류관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며 시편 기자처럼 백발이 될 때에도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해야 되지 않을까(71:18)? 그런데 나는 노인들이 손자들이 사준 아이폰에 이어폰을 꽂고 문자를 주고받는데 어린애들처럼 정신이 없는 것을 본다. 남의 말을 전달하고, 가짜뉴스와 관제 뉴스를 퍼 나르며 자기의 주체적인 사상은 없다. 물리학에서는 위치 에너지라는 것이 있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은 낮은 곳에 있는 물보다 위치에너지가 크다. 따라서 물은 자연 낮은 곳으로 흐른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을길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내리는 소나가를 피해 한 집 처마 밑으로 피했다. 마침 그때 노인 한 사람도 비를 피해 들어왔다. 그 때 노인은 그 마을의 아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젊은이는 큰 감명을 받았다. 노인들은 어른답고, 본이 되고, 배울 것이 있고.그래서 지혜나 도덕성에서 위치에너지가 젊은이보다 커야 한다.

하나님께서 노인들에게 주신 말씀은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노인들은 과거가 부끄러워질 만큼 더 지혜롭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되고, 용서하지 못했던 과거의 편협함이 후회될 만큼 아량이 더 넓어지고, 작은 선심에 흔들리지 않고 공의(公義)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국장로신문 2019년 8월 31일 <시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