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의 訪韓記-소설, 1973.2.소설, 콩트, 에세이, 칼럼
이것은 1970년 초의 이야기다. 루시가 조국인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이었다. 10월 24일이 유엔데이였고 22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 그 때 쯤 와 준다면 연휴를 이용하여 2,3일 함께 관광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했더니 마침 전세 비행기가 있었다고 1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동행들과 서울 구경을 하고 나를 만나러 온 것은 21일이었다. 버스는 다섯 시에 어김없이 대전의 정류소에 도착했는데 차광 필름을 한 차창 안에서 그녀가 나를 보고 마구 손을 흔들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얼마만인가? 벌써 그녀와 헤어진 것은 5년 째였다. 다시 미국에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경제적 여건으로 수포로 돌아가자 하와이에서 지냈던 일년 반이 꿈 속 같이만 생각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 나를 껴안고 입을 볼에 맞추며 자못 감격한 표정이었다. “정말 꿈같아요.” (이건 내가 할 말인데. 자기도 그렇게 느꼈었나?)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껴안고 끌어당겨 어깨를 두들겨 주고, 여기는 하와이도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좀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요.” 그 활달한 행동하며 대담하게 화려한 옷이며 정말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더 늙었어. 미스터 오는 더 젊어지고.” 그녀의 한국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짐을 찾아 우선 대합실로 들어갔다. “짐은 이것뿐이오?” “일부는 반도 호텔에 맡겨 두었어요. 또 그리로 갈 거니까.” 그녀는 영어로 말했다. 영어가 우리말보다 훨씬 편리한 것이다. 한국 사람처럼 생겨서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 이상한지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좀 의견을 물어도 돼요? 숙소를 불편하더라도 우리 집으로 할까 아니면 호텔로 할까?” “난 상관없어요. 그러나 이것은 진심인데 방해는 하고 싶지 않아요.” “문제없어요. 그럼 집으로 가지요.” 우리는 짐을 가지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운전기사는 휘파람을 불며 짐을 싣더니 방향은 묻지도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장동(미인 양공주 촌)이지요?” “아니요 우리 집이요.” 나는 기사가 길이 험한 우리 집 문 앞까지 가자고 하면 휘파람이 들어가고 화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처럼 고국이라고 꿈을 안고 왔는데 운전기사의 불친절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할까 하고 조마조마했다. 집 앞까지 가주어야겠다고 말하며 수고한 사례는 하겠다고 귀띔하였다. “정말 괜찮아?”라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요. 집에 가면 수세식 화장실도 없고 샤워 시설도 없거든요.” “재미있을 거예요. 어머니에게 그런 재래식 한국 집 이야기 많이 들었어.” 루시를 호텔에 놓아두면 신경이 쓰일 일이었다. 낯선 곳에 혼자 떼어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갈 때마다 아내를 동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선지 아내는 루시를 집으로 데려 오라고 강권했었다. 도대체 하와이에서 어떻게 사귀고 지냈으면 한국에까지 찾아오게 되었느냐고 짜증도 부리면서. 그녀는 호놀루루의 릴리하 거리에 있는 한인 기독교회의 교인이었다. 이 교회는 1918년 리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였다. 한 때 리 대통령 집정 시는 미국을 드나드는 정부 고관들이 반드시 이 교회를 들려갔기 때문에 퍽 북적대는 교회였는데 리 대통령 몰락과 함께 시들해지고 시내에 또 하나 있는 감리교회가 그런대로 교회답게 운영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하와이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적여서 연락한 곳이 이 교회가 되어 같이 성가대를 하게 된 것이 그녀와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자주 만난다고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까워진 것은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녀는 워낙 성격이 활발하고 낙천적이어서 하와이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러 온 모든 EWC(동․서 문화연구소)학생들의 누나였고 심부름꾼이었다. 그녀는 대학에 와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으로 새롭게 눈을 뜬 한국에 대해 늘 자랑스러워서 흥분하고 있었다. 선명회 합창단이 와서 부채춤 공연을 했을 때는 자기 밑에서 근무하고 있는 음식점의 점원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구경을 시킨 일도 있었다. 이런 공연은 숨어 있는 한국인이 밖으로 들어나는 계기였다. 한국을 한번이라도 다녀왔거나 한복 선물을 받은 미국인들은 이런 공연에 한복을 입고 나와 침이 마르게 부채춤 칭찬을 했었다. 그럴 때는 으레 한 두 사람의 동양인이 자기도 사실은 한국인이이라고 처음으로 자신을 들어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한국인은 노름꾼이라는 누명이 퍼져 그들은 계속 조상을 숨겨 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시는 이제 자신이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음식점 조무래기들에게 공연히 점심을 사주고 싶으면,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나라가 어딘 줄 아느냐고 물어서 <한국이요>하고 대답하면 점심을 산다고도 했다. 그 루시가 평생 처음으로 자랑스런 조국인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집에서는 새 손님을 맞아 한 동안 북적댔다. 아내와 아이들은 좀 놀란 표정이었다. 아내는 루시가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는 과부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너무 젊은 것에 놀란 모양이고, 어린애들은 전에 방문한 일이 있는 데이비드 청년처럼 노란 머리에 눈이 우묵 들어간, 잘 웃고 잘 지껄이는 전형적인 미국인인 줄 알았다가 까만 머리의 한국 사람인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다 우리말은 잘 못하고 영어를 주로 쓰는 미국인이요 한국인인 그녀를 좀 받아드리기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얼마 동안이었다. 모두들 곧 익숙해졌다. “하와이에서 아빠께 잘해 주셨다는 말 들었습니다. 감사해요.” 아내의 말을 통역하자 그녀는 곧 우리말로 받았다. “아이고. 미스터 오 똑똑해. 내가 도움 많이 받았어.” 그래서 모두 웃었다. “아직도 예쁘고 젊으신데 왜 재혼 안하세요?” “나 인자 다 늙었어. 할머니 다 됐어.” 나는 그녀의 큰 딸이 내가 오년 전에 대학에 다닐 때 한국의 국악과 부채춤을 교습소에서 배우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갑자기 그의 큰 딸 읠마가 궁금해져서 나는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인들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법률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남북회담도 열리고, 또 아빠가 쉬고 있는 때가 되어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 당신도 알지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나를 보며 씽긋 웃었다. 별로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조국을 보는 느낌이 어떠세요?” “아름다와요. 미국에 가면 막 자랑할 거예요” “특별히 무얼 다르게 느끼셨어요?” 아내는 우리말을 섞어 쓰는 영어가 재미있는지 자꾸 물었다. “간판이 재미있었어요. 뉴,코,리,아,호,텔. 이렇게 힘들어 읽고 나니 영어를 그렇게 어렵게 써 놓지 않았겠어요. 그런 것이 많았어요. 오,리,온,비,스,켓,...골,덴,텍,스... 발음이 좀 이상했지만. 냄새와 빛깔이 다른 미국을 딴 나라에서 보는 것 같아요.” 하기는 그렇다. 그녀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지적했다. 식사를 끝내고 왁자지껄 한 바탕 떠들고 나자 나는 그녀를 재울 것이 걱정이 되었다. 막상 집으로 데려 오기는 했지만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 그 문화에 젖어 산 사람이었다. 침대가 없었고, 샤워 시설이 없었고 또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고 재래식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침대가 아니고 온돌방에서 자야하며 샤워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내일은 유명한 온천장에 데려다 줄 테니 좀 참아라. 그리고 화장실인데, 실내에는 화장실이 없으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만일을 위해 손전등을 줄 테니 사용하도록 해라. 그러자 그녀는 너무 세심하게 걱정한다고 나를 마구 때리며 웃었다. 그런 걱정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각각 잠자리에 들고 문단속을 하고 들어오자 아내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당신 그 여자와 어떤 사이였어요?” “왜 그래. 갑자기” “친절한 정도가 보통이 아니에요. 난 당신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나를 잘 때렸고 눈웃음을 잘 쳤기 때문이다.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한 것 때문이야. 전혀 흑심이 없는 여자야” “그래도 나는 한국까지 찾아오는 당신의 여자 친구 싫어요.” “당신도 그 여자의 과거를 알게 되면 누군가 한국에서 그녀를 따뜻이 대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1905년에 하와이의 설탕 농장의 노동자로 팔려간 이야기, 당시 백 불씩의 정착금을 미끼로 주었는데 무식한 노동자들은 지상천국으로 살러 가는 줄 알고 긴 날짜의 항해 기간 동안 노름을 해서 거의 돈을 잃어버린 노동자가 태반이었다는 이야기. 농장에서 노름과 패싸움 등으로 노사문제가 어려워지자 결혼을 시켜 정착 시켜야겠다는 농장 주인의 생각으로 고국에 사진을 보내 처녀들을 모집해 왔는데 그중에 한 처녀가 그녀의 어머니였다는 이야기. 아버지 같은 남편과 함께 살면서 오 남매를 기른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최초의 한국말은 밥알 하나라도 버리려하면 손을 저으며 말리면서 쓰던 <아까와>라는 말이었다는 이야기. 그들이 학교에 다닐 때 천대 받고 놀림 받던 이야기 등을 아는 대로 해 주었다. “하와이에 그런 사람이 한 둘이겠어요? 다 그랬겠지요. 그런 여자를 당신은 다 그렇게 좋아해요?” “며칠 있으면 그 여자는 갈 거예요. 한국이 모국인데 이곳에 와서 찾아갈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아마 겪어 보면 그녀가 얼마나 좋은 여자인지 알게 될 거요. 이제 나보다는 당신과 더 가까운 친구가 될 걸.” “나는 영어도 모르고 그런 친구 원치도 않아요.” “나와 그녀가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녀가 이곳을 찾아 올 수가 있겠소. 그냥 좀 친절하게 대해 주어요.”
하룻밤이 지났다. 나는 일어나자 말자 현관문부터 열었다. 도둑이 잘 들어서 안쪽 문고리에 자물쇠를 잠갔던 것이지만 이번에는 루시 때문에 그냥 걸어 두기만 했던 것이다. 루시가 살짝 방문을 열고 인사하더니 정신없이 밖으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얼굴을 붉히며 집 안으로 들어서더니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깨울 수도 없고 나가지도 못하고 안달을 했다고 말했다. “때로 우리는 요강이라는 것을 쓰는데…” 그러자 그녀는 대뜸 대답했다. “아! 바로 이거지요? 나도 알지요. 어머니한테 많이 들었거든요.” 그녀는 마루에 놓인 요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그것이라고 몇 번 생각하고 만져 보기도 했지만 잘못하면 어쩌나 싶어 쓰지 못하고 참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국 집에 가서 요강인줄 알고 된장 그릇에 오줌을 누어서 큰 실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해서 허리를 쥐고 웃었다. 동족이라 할지라도 70여년을 딴 나라의 문화에 젖어 살다 보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나는 그녀가 조국도 없던 무식했던 노동자의 딸로 살아 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언가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 시민인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녀가 우리를 아직도 미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뒤죽박죽이 되게 했다. 이날은 그녀에게 한국의 교회를 소개했다. 호놀루루의 <릴리하 한인교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미국 교회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많은 남편들은 벌써 사별하고 이제는 할머니들이 통조림 공장의 주문으로 마른 생선을 손으로 찢어 납품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 교회의 대부분의 운영자금이었다. 할머니들은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일부예배로 십여 명이 한인 목사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이민 일세들과 해방 후 이민 온 분들, 그리고 하와이 대학의 학생들은 함께 영어로 이부 예배를 드렸으며 이민 이세들은 거의 교회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이 교회가 <한인 기독교회>라고 한인이란 접두어를 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이 지역사회에 필요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모두 미국 시민인데 굳이 한인이라는 말을 붙여서 미국 사회에서 고립되고 미국인의 접근을 막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기독교 정신에도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자기들이 죽은 뒤에 그렇게 하라고 반대였다.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양로원 방문, 군인 위문 등 교회가 하는 연례행사를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 교회에 와서 교인 수가 많은 것에 먼저 놀라고 성가대의 인원이 많은 것에도 놀랐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등이야”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렸다. 아무튼 모든 것이 대견스러운 모양이었다. 루시는 분명 한국을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기쁘게 해 주면 된다. 나는 아내가 루시와 온천장에 들리고, 다시 미장원을 들리는 동안 군인 휴양소의 벤치에 앉아 청명한 가을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떠올랐다. 그것은 에스겔의 환상에 대한 것이었다. 골짜기 지면에 말라버린 뼈가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들이 들어맞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더니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와이에 가면 말라버린 역사의 토막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정말로 하와이 이민사를 움직인 하나의 거대한 실체가 있었을까? 그래서 지금도 교회를 통해 성령이 이 과거가 되어버린 역사의 파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서로 연락하여 생명체가 되게 할 수는 있을까? 루시는 비매품으로 된 필시 몇 권 안 되는 <재미 한인 50년사>라는 책을 집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먼지가 얹고 우리말로 되어서 돌아보지도 않던 책이었다. 내가 그것을 읽고 그녀에게 들려주어야 했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 한국 책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그 책엔 한국의 인삼 장수가 멕시코의 메리다 지방을 지나면서 중국 사람에게 한인 소식을 듣고 하와이 노동자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편지도 있었다. 한국 노동자가 멕시코의 어저귀 농장에 노예로 팔려 와서 하루 25센트씩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낮이면 불 같이 뜨거운 가시밭 농장에서 채찍을 맞고 일하는데 농장 주인이 일터에 나올 때는 십장들이 사방에서 채찍을 들고 소리치는 모습은 소몰이하는 목장과도 같았다고 쓰고 있었다. 밤에는 토굴에서 잤고 혹 독사에 물리거나 병으로 몸이 쓸모가 없게 되면 무인지경에 내다 버려졌는데 이렇게 죽은 사람이 수도 없다고 했다. 또 한국인 통역은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일러바쳤고, 혹 이를 못 참고 도망치는 노동자도 있었지만 말 모르고 길 모르기 때문에 중도에 잡혀 혹독한 형벌을 받기 일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다 대륙식산회사를 경영하던 일인(日人) 다이쇼 강이찌가 한국인을 앞세우고 이민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을 속여 멕시코 농장에 우리 노동자를 팔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을 풀어주려면 몸값을 주고 구해내야 한다는 호소문이었다. 이런 일을 위해 하와이 노동자들이 낸 특연(特捐)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의 외교관 스티븐즈를 살해한 장인환의 변호 비용 특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되던 당시 한국에서 미국 외교 고문으로 있던 그가 귀국하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보호정책을 찬양하는 기사를 미국 각 언론에 게재하게 되자 오클란드 역에서 장인환이 스티븐즈를 암살한 사건은 한국 노동자들의 울분을 대변한 일이었다. 그래서 장인환을 변호할 미국인 변호사 카클린의 변호사 비용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의 변론 내용은 특연을 한 각 지부에 알려졌었다.
... 만일에 우리를 장인환의 처지에 두면 우리는 미칠 것이다. 우리의 부형과 친척이 일인의 손에 죽으며, 우리의 강산이 일본 군대의 말먹이는 목장인 되며, 세전(世傳)하여 내려오던 건물들을 일본 통감이 차지하고 음모의 소굴을 만들면 우리 중에서 미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장인환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줄 알아야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재원을 일인이 채굴하고, 양전옥토를 일인이 경작하며, 한국 사람은 굶어 죽게 되는데 분한 마음이 없으면 한국 사람이 아니요 혈기 있는 사람으로 그러한 일을 당하고 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일을 협조하는 사람을 보고 심상히 여길 수 없을 것을 생각하여야 공정한 판결이 있을 것이다. 배심원 여러분! 이 재판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시오. 만일에 우리가, 장인환을 죽이면 그 사람은 공의를 주장한 애국자인 까닭에 죽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애국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참으로 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의사 표명을 잘 할 수 없던 그들에게 얼마나 시원한 청량제가 되었을까? 그들은 7000불의 특연이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역사의 파편들이 루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과거의 조각들이 모여 힘줄과 살이 되고 생기를 갖고 일어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되살아난 생명들이 루시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러면서도 나는 이런 역사와 단절 된 루시를 생각할 수 없는 내가 답답하였다.
온천의 목욕장에 들리고 미장원을 갔다 온 아내와 루시는 많이 친근해져서 돌아 왔다. 그날 밤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이국땅에서 서른에 홀로 되어 지금까지 지낸 루시가 안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훌륭한 전기 기술자였데요. 삼 남매를 갖기까지는 아주 유순한 남편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난폭해 졌데요.” “그런 이야기도 알아들을 수 있었어?” “당신이 없으니까 말 잘하던데요 뭐.” “나에게는 남편이 유명한 도박꾼이었다고 그런 말도 하던데요.” “아무튼 한국인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진급도 안 되고 하자 밖으로 튀어나가 그렇게 된 거레요. 안 됐어요. 왜 놀음 같은 걸 하지요?” “국민성은 아니겠지. 그러나 이차 대전 때 일본 사람들이 아이다호 주로 강제 수용 될 때 한국인은 헐값으로 판 일본 가옥이나 땅을 사서 한 때 재산 축적할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놀음으로 다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해요.” “직장도 팽개치고 놀음해서 돈을 다 털어버리면 집에 와서 마구 울면서 용서해 달라고 빈데요. 그리고 돈을 갚아 주면 일 주일이 멀다고 또 도박판에 뛰어 들고 여자들도 꿰차고 다녔데요.” 나는 루시가 그 때부터 삼 남매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두 직장을 뛰면서 살아온 또순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명랑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은 대구를 거쳐 경주로 갔기 때문에 우리가 예약한 불국사 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간 루시는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방이 바뀐 것 같애.” “왜요?”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이거 봐. 더블베드 아니에요?” 나는 웃었다. “한국에는 더불 아니면 트윈뿐이랍니다. ” “혼자 자기는 너무 넓어.” 그녀는 덥석 앉아 침대를 쓰다듬으며 나를 보고 웃었다. “왜 갑자기 외로워졌어요?”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씩씩한지 몰라?” 그녀는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가 가끔 애조를 띄우고 하와이 특유의 멜로디로 노래를 하는 모습을 가끔 봤었다.
검고 찬 바다의 해변 저 멀리 내 사랑은 가고 꿈은 바랬네. 그러나 울지 않네. 후회하지 않네. 그는 나를 기억할까? 벌써 잊었을까? 아. 나는 계절풍에 실어 수많은 꽃을 보내리. 나의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그처럼 나는 그를 사랑하네. 나는 아네. 그가 다시 내 품에 안길 것을. 그 때까지 내 마음 표류하네, 해변 저 멀리
<해변 저 멀리>라는 하와이 노래였는데 훌라 춤처럼 버드나무가 바람에 날리는 듯한 하와이 특유의 이 노래의 선율은 환상 속으로 끌어드리는 애처로움이 있었다. 가끔 나는 활달한 그녀의 성격 뒤에 숨겨진 애처로운 그늘을 보고 화려한 미국에서 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그녀는 감칠맛 있는 동양적인 매력으로 충분히 남자를 매혹하고 있었지만 재혼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다 하는 한국 남자는 찾지 못했고, 미국 남자들은 남편을 망가뜨린 원수처럼 싫은 모양이었다. 그는 사무실에서도 더울 때 에어컨 온도를 내려놓는 여직원은 담력이 있는 한국인인 자기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관이 온도를 올리면 막 대든다고 했다. “너는 남자니까 더 벗으면 되지만 우리 여자는 더 벗을 게 없지 않아? 유, 언더스탠드?” 그러면 꿈쩍 못한다고 했다.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된다고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타이프를 잘 치는지 모르지” 하고 나에게 뽐내 보였었다. “한국인들은 담력(guts)으로 살아야 해. 나는 한국인이다 알았어? 이렇게 보여 주어야 한다구.” 이럴 때는 한국 여성 같은 유순함이 없었지만 그녀는 혼자 사는데 필요한 겉 용기를 터득한 것 같았다.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는 슈거대디(sugar daddy; 기둥서방)도 갖지 않았다. 자기 남편이 돈 있을 때 쫓아다니던 여인들을 증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가끔 그녀 곁을 스치는 애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홀로 놓아두고 우리 부부가 다정히 옆방에 든다는 것은 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겠어요, 혼자서?” “그럼, 당신이 나와 자 줄 거야?” 내가 멍청히 서 있으니까 내 등을 떠밀었다. “빨리 가봐. 미시즈 오 기다리겠어. 아이구 가엾어라(poor thing).” 그녀는 내가 난처한 입장에 서면 <가엾어라>라는 표현을 잘 썼다. 나는 떠밀려 내 방으로 돌아 왔다. 아내는 과부 방에서 뭘 하고 지금 오느냐고 투덜댔다. “혼자 두고 오려니까 안 되었어. 내일은 큰 온돌을 하나 빌려서 셋이서 같이 자면 어떨까?” “뭐라구요? 그렇게 같이 자구 싶으면 아예 거기 가서 자고 오세요.”
다음날은 피곤할까봐 서로 늦게까지 자기로 약속해 놓고 모두 빨리 일어났다.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한적했고 손님은 두 세 그룹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옆에는 두 신사가 앉아 있었는데 유창한 일어들이었다. 유창한 일어를 쓰는 그 중의 한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나는 아니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자리를 옮겨요.” 아내도 일인에 대해서는 별로 호감을 갖지 않고 있었다. 을미사변 때 일본 군인들이 군화를 신고 경복궁 내실로 들어가 민비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뒤뜰로 끌고 가 나뭇더미와 함께 석유를 뿌려 죽인 사실은 아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뿐 아니라 이차 대전 말에는 겨울에 눈사람 둘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는 루주벨트, 또 하나는 처칠이라고 명명하고 학생들에게 죽창으로 찌르게 하던 시대에 국민하교 졸업반에 있던 세대였다. 옮긴 자리에서 주문했던 토스트와 계란이 나왔다. “나 날계란을 싫어하는데 왜 이렇게 묻지도 않고 해 왔어?” 루시가 얼굴을 찌푸렸다. “스크램블로 하실래요?” 웨이터를 불러 이 계란은 스크램블로 해서 가져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웨이터가 아니꼬운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는 루시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한국 분 아니세요?” “예. 한국 분입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사라졌다. 그녀는 아침을 먹고 나오면서 왜 토스트를 다 먹고 커피를 마시느냐고 또 물었다. 커피는 토스트와 함께 마시는 것이 아니에요?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계속 적응하려고 신경을 쓰는 어린애 같았다. 그러면서도 루시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 같았다. 경주의 고적과 그에 얽힌 전설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되고 아름다운 전설의 나라에서 영리한 민족의 후예로 태어 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더구나 박혁거세의 무덤은 미국 대륙이 발견되기 1500년도 전의 일이라니 이것은 동화 속의 꿈나라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점심을 경주 시내에서 먹고 우리는 버스로 불국사에 돌아 왔다. 도로공사 중이어서 껑충껑충 뛰는 버스였는데도 그녀는 그것을 더 좋아 했다. 갑자기 껑충 뛰면 깜짝 놀라고 나선 마구 웃으며 좋아 했다. “미스터 오 아니면 이런 경험 평생 못해.” 그러다간 또 괴성을 질렀다. “봐요. 저기 빨래하고 있네요.” 혹은 “어머, 돼지가 자전거를 탔어.” 그녀는 대단찮은 것도 그렇게 동물원을 구경하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자전거에 돼지를 싣고 가는 풍경...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이 풍경들이 그렇게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말하던 한국 그대로에요. 다음엔 꼭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겠어요.” 이렇게 우리는 하루를 흥분 가운데 지내고 밤에는 셋이서 하나의 온돌방을 쓰기로 하였다. 각 방에서 서로 신경을 쓰고 자는 것보다는 마지막 밤인데 밤을 세면서라도 떠들고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아내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짐을 옮겨 놓고 불국사 경내로 갔다. 얼마 있지 않아 한 편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루시가 두 쌍의 부부들과 얼싸 안고 떠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우연히 서울에서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이다. “에스더, 웬 일이야. 홍콩은 안 갔어?” “마이클을 설득해서 한국을 좀 더 보기로 했어. 마침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해 줄 좋은 분을 만났거든. 사업상 알게 된 분이래.” 그 옆에 키가 크고 호인 같이 생긴 백인이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 “바로 이분들이 우리의 호스트야. 얼마나 멋진 신사인지 너는 모를 거야” 이렇게 또 한국 부부를 소개하면서 쉴 틈이 없이 떠들어댔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우리는 밤마다 파티를 했어. 한국 부인들 참 잘 놀아.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나는 그런 재미 미국에서 못 봤어.” 루시도 우리를 소개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대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힘 든 모양이었다. 얼마동안 수인사가 끝나고 나자 에스더라는 여인은 또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화제가 끊기는가 싶더니 이제는 갑자기 에스더가 오른 손을 이마에 짚고 씨무룩한 표정을 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루시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이앤 센스가 없긴. 그래 나 여기서 새로 산 반지 안 보여?” 그녀는 바른 손에 낀 수정 반지를 자랑스럽게 내 보였다. “얼마나 예쁘니 그리고 얼마나 싸다구.” 그리고는 소리를 낮추었다. “실은 수정 알을 더 많이 샀어. 미국에 가서 해 끼우려고 말이야. 한국에서는 시공 기술이 나빠 곧 빠진데.” 이런 대화 목소리도 들려 왔다 “나 미국에서 싸구려 옷 좀 많이 사가지고 올 걸 잘 못했어. 여기 부인들 미국 옷을 얼마나 좋아 하는데. 나는 갈 때 거의 입은 옷 다 주고 가기로 했어” 루시는 화제를 돌렸다. “여기서 우리와 저녁 먹고 가지 그래. 우리 숙소는 바로 가까운 불국사 호텔이거든.” “안돼. 이분들 스케줄 때문에 우린 곧 부산으로 떠나야 해.” 루시도 뭔가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넌 모르지. 우리는 오늘 밤 셋이서 같이 자기로 했다.” “뭐 셋이서? 위이.” 에스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거기서 갑순이와 갑돌이 노래도 배울 거야” “참 나 너희 호텔에 좀 들려야겠어. 용무가 있거든” 하고 에스더는 눈을 찡긋했다. “뭔데?” “쟌(john;화장실)” 에스더는 거칠 게 없는 여인이었다. 이 수다스러운 한 무리가 떠나자 우리는 저녁을 일찍 마치고 쉬기로 하였다. 루시는 매우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신없이 일할 때는 모르지만 이렇게 나와 있으면 해 질 녘에는 공연히 좀 불안해지고 쓸쓸해진다고 말하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기다리던 느낌이 이상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양로원의 할아버지들을 돌봐 주고 있었다. 언젠가 주일날 오후에 나더러 양로원 방문을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나는 숙제가 많다고 처음엔 거절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쓸쓸한 표정을 보자 곧 마음을 바꾸었다. 나는 설탕 농장에서 일하던 그 산 증인들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버려진 별장처럼 생긴 곳에 양로원은 있었다. 야자수 나무가 시원하게 높이 솟은 판잣집이었다. 그녀는 도너트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 나는 김치 통을 들고 갔는데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앞치마를 두르고 반백이나 된 뚱뚱한 할머니가 루시를 보자 다가와 껴안고 어깨를 두들기며 반겨 주었다. 그녀가 루시의 어머니였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양로원이라야 이름뿐이었고 대여섯 명 되는 할아버지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하와이 대학에 공부하러 온 미스터 오입니다.” 그러자 웅성웅성 할아버지들이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씩씩한 대한 청년이 왔구만.” 한국 청년이라는 말은 익숙했지만 <대한 청년>이란 어귀는 새로운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 할아버지들의 눈에는 총기도 없고 이야기는 질서가 없었으며 기억력도 없었다. 나는 자기 자녀들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듣고 있어야 했다. 부모를 잊어버린 지 오랜 자녀들 이야기였다. 그들의 손으로 장인환 변호 비용 특연을 하고, 멕시코 노동자 구출 특연을 했다고 상상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들은 대한 독립의 선두 주자들이 아니고 순종하고 따르던 후원자들이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민을 계몽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청년 리승만은 주장하였다. 그래서 한인 기숙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한민보 주필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해야 한다고 했다. 일제는 무력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들은 다같이 하와이에 유일하게 있었던 국민회 산하의 지회(支會)에 직접 특연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민회는 이런 개별적인 특연 호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국민회의 결속을 위해 총회관 건립기금 조성이 시급하니 개별적인 특연 호소에는 응하지 말고 회관 건립기금을 내도록 시달했다. 지회마다 의견이 맞지 않았고 드디어 총회에서는 싸움이 벌어졌다. 불씨가 된 것은 회계감사에서 회관 건립기금이 재무와 수전의원에 의하여 유용 된 것이 밝혀 진 일이었다. 패싸움이 극렬해져 드디어 미국 법정에 고소하기에 이르고 당시의 총회장은 권총을 입에 물고 발사해 자살 소동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해외 독립운동의 한 단편이었다. 이 역사의 파편들이 현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이제는 양로원에 있는 증인들도 관심이 없다. 루시와 에스더는 그 난리 통을 겪은 2세들이지만 그 역사가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정말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이 있어서 과거 일회적으로 있었던 사라진 역사의 아귀들을 잘 맞춰보면 미래를 향해 뻗고 있는 역사를 움직이는 의지가 루시와 에스더의 삶에 새로운 뜻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왜 이런 과거가 나를 괴롭히는가? 왜 조각난 과거를 다시 맞춰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신은 이 조각난 역사들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그렇게 있을 한 거대한 의지를 나타내는 환상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것일까? 환상이란 내 집요한 욕구가 또 하나의 일그러진 의지를 보게 하는 위험한 그림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환상은 그림이 아니고 기호이고 상징이고, 징표일 뿐이다. 내가 서울이라는 도로 표식을 봤다고 가보지 않은 서울을 짐작할 수 있는가? 서울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뿐이다. 과거의 역사는 징표일 뿐이고 다가올 미래는 신의 섭리 속에 봉해져 있다. 나는 루시와 아내가 먼저 방에 가서 샤워를 하는 동안 호텔의 커피숍에 앉아 의식이 흐르는 대로 이런 생각을 시작도 끝도 없이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한 방에서 오래도록 노래를 불렀다. 아내는 <진주조개>라는 하와이 노래를 배웠고, 루시는 <갑돌이와 갑순이>를 배웠다. 그녀는 <고까짓 것 했더래요.> 이 구절이 재미있어 깔깔대며 웃었다. “참 잘 생각했어.” 그러면서 또 <고까짓 것 했더래요.> 하고 까르르 웃었다. 지칠 대로 노래를 부르자 우리는 내천 자로 누웠다. 그러자 루시가 또 한 마디 했다. “미스터 오는 부자야” “왜요?” “여자가 둘이나 있으니까” 아내는 이제는 루시를 좀 이해하게 된 듯 그냥 웃었다.
새벽 일찍이 우리는 토함산으로 해돋이 광경을 보러 올라갔다. 아내는 평소에 등산에 아주 서툴렀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손을 잡고 끌고 가거나 등을 떠밀어 주어야 했다. 어쩌다 내가 루시의 손을 잡아 주려 해도 그녀는 거절했다. 자기 걱정은 말라는 것이었다. “혼자 가기도 힘 드는데 어린애들까지 데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네요.” 아내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미스터 오도 장사에요. 큰애기를 데리고 가니까” 루시는 내가 아내의 손을 끌고 가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고까짓 것 했더래요.>를 되풀이 해 부르며 까르르 웃었다. 산정에 올라가자 운 좋게 막 빨간 해가 선을 보이며 바다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황홀해! 놀라와!” 루시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욕실에서 올라오는 신부처럼 황홀하지요?” “더구나 이 신선한 공기!”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오하우(하와이)섬에서도 커다랗게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섬 북쪽은 언제나 안개가 낀 것처럼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남쪽인 와이키키 해변 쪽은 연 중 거의 비가 오지 않았는데 거기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뜨는 해를 본 일이 없다. 왜 그랬을까? 아마 볼 수 있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눅눅하게 덥고 꽃 냄새가 짙은 그 지방에서는 이런 상쾌한 공기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신선한 공기, 상쾌한 기분, 거기다 싸늘하게 목덜미를 스치는 동해 바람에 루시는 몸을 웅숭크리고 떨며, 아내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산정에 세워진 매점에서 우리는 따끈한 커피를 사서 들면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도 아주 한국에 와서 사시지 그래요.” 아내가 말했다. “저두 미국에 있을 때는 은퇴하고 나면 한국에 와서 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좀 불안해요” “뭐가요?” “미국에서는요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늙으면 한국에 나와 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또 한국에 나가 묻히고 싶다는 할아버지들이 많아요.” “그런데요” “여기 와 보니 모두 좋은데, 나를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미국 사람 같으면서 미국 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 같으면서 한국 사람이 아니에요,” 루시가 감상적으로 된 것 같아 나는 그녀가 흔히 쓰던 말로 대꾸해 주었다. “푸어 싱(가엽서라)” 그러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노래했다. <고까짓 것 했더래요.> 헤어질 시간이 왔다. 석굴암을 들려 호텔에서 아침을 마치자 우리는 경주로 나왔다. 그녀는 부산으로 우리는 대전으로 와야 했다. 버스표를 사 들고 나오자 나는 언제나 하는 말로 혼자서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손가방에서 한영사전을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작은 문제 하나. 이것은 내가 한국말을 하면 한국 사람이 못 알아듣고, 한국 사람이 영어를 하면 내가 못 알아듣는 다는 것이에요.”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훈련 받은 대로 하면 돼요.” “뭔데?” “친절한 사람을 경계할 것, 물건은 백화점에서 살 것, 음식은 사람이 많이 들어가는 집에서 먹을 것, 어려운 일이 생기면 교회 목사님을 찾아 갈 것, 이거면 돼요.” “한국을 의식하지 말고 에스더처럼 살면 어때?” “미스터 오, 걱정 말아” “아이고 가엾어라.” 그녀는 아내를 의식하지 않고 미국에서처럼 나를 꼭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에 영롱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아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었다. “정말 고마와요. 미스터 오와 함께 미국 와요. 나 미국 시민이야. 그리고 나 잘 살아.” 아내는 루시의 목을 엇매껴 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두들겼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세요.” “알았어요.” 그녀는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차에 올랐다. 나는 차에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잃어버린 그녀의 젊음을 누가 보상해 줄 수 있을까? 나라가 없어 일본 사람의 손에 노동자로 아니 노예로 팔리고, 사진결혼을 하고, 무엇이 바른 독립운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연보를 하며 서로 싸우고, 그 사이에서 난 이세들은 도박꾼의 자녀라고 푸대접을 받고, 이제 자부심을 가지고 찾아온 나라에서 한국 사람이라는 인정을 못 받고 떠나는 그녀는 누구인가? 나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루시는 운명 지워진 삶을 잘 살 거야. 한국인의 담력을 가지고,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또 <고까짓 것 했드래요.> 하고 노래하며 인정받지 못한 미국인으로 살면 된다. 이 때 버스가 떠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입을 맞추어 우리를 향해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나도 황급히 그녀를 따라 같이 했다. 차가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이 작품은 1973년 2월 ,<현대문학 218호>에 실린 것을 약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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