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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칼럼 제3950호 / 목계지덕(木鷄之德), 이청득심(以廳得心)[홍종찬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8. 25.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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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방* | 조회 203 |추천 3 |2019.06.14. 03:30 http://cafe.daum.net/cgsbong/1SQR/4269 

창골산 칼럼 제3950호 / 목계지덕(木鷄之德), 이청득심(以廳得心)


제39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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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계지덕(木鷄之德), 이청득심(以廳得心)

 

 


 

 

 


홍종찬 목사


기원전 8세기경 중국 주나라 선왕(宣王)은 닭싸움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선왕은 당대 최고의 투계 조련사인 기성자(紀渻子)에게 싸움닭을 훈련시켜 달라며 자신의 닭을 맡겼습니다. 열흘이 지나 선왕은 “닭싸움에 내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성자는 “닭이 강하긴 하나 실력 없이 허세만 부리니 아직 멀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은 “이제 싸움판에 내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성자는 “허세는 버렸으나 아직 다른 닭의 소리나 그림자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고 답했습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나 “이젠 싸움판에 내보낼 수 있겠지?”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기성자는 “아직 부족합니다. 허세나 조급함은 버렸으나 여전히 다른 닭을 보는 눈초리에 속 기운이 드러나 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조련을 맡은 지 40일이 지나 기성자는 왕을 찾아가 “이제 싸움판에 내보내도 되겠습니다. 어떤 소리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평정심을 찾았습니다. 마치 나무로 만든 닭(木鷄)처럼 반응하지 않으니 그 어떤 닭이라도 감히 덤비지 못하고 도망칠 것입니다. 천하무적의 싸움닭이 되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 장자(莊子)의 달생편(達生篇) 중에서 -
 
장자는 이 고사에서 지도자의 조건으로 “첫째, 자신이 제일이라는 교만과 허세를 버려야 한다. 둘째, 주변의 상황이나 형편에 민감하게 반응해선 안 된다. 셋째, 상대방을 대할 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허세를 부리는 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인 것처럼 과대 포장된 학력이나 경력을 자랑합니다. 자기 아니면 아무 것도 안 될 것처럼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견을 무시한 채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경쟁의식을 가지고 조급해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결국은 혀와 입술에 그 흔적을 남기고 다닙니다. 지금은 허세와 경쟁자에 대한 조급증을 버리고 평정심으로 감정을 극복한 목계지덕(木鷄之德)의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청득심(以廳得心)이란 말도 있습니다.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는 의미로,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논어(論語)의 사자성어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 노(魯)나라 왕이 바닷새를 비궁(閟宮) 안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술과 산해진미를 권하며 풍악과 무희 등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바닷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퍼하다가 사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상대방의 생각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아집이나 독선만을 강요하는 자를 꼬집고 있습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음악이 바닷새에게도 좋을 것이라 착각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지혜는 듣는 데서 비롯됩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습니다. 쉼 없이 떠들어 대는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은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편견이 지배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은 언젠가 그 공동체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곳에서 정보를 얻고 대화의 소재(素材)를 찾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데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은 평가의 과정을 거쳐 험담꺼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언무환”(寡言無患)이란 사자성어가 있나 봅니다. “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다” 즉 말을 줄이면 근심도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15:28),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잠17:27),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 역시 이청득심(以廳得心)과 같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여기서 “온순한”(א??? 마르페)은 원어상 “치료하다”, “건강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온순한 혀”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영적 생기를 얻게 하는 말(that brings healing, NIV)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패역한”(ף?? 셀레프)은 원어상 “왜곡”, “사악함”, “완고한”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패역한 혀”는 거짓과 왜곡된 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영혼을 병들게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חוּרבּ רבשׁ 쉐베르 베루아흐)는 말은 “영혼(생명)을 깨뜨린다(파멸시킨다)”란 문자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참된 의미는 “거짓되고 왜곡된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영과 육의 생명까지 파멸시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빛바랜 격언이 새롭게 들리는 것은 요즘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의 홍수 속에 살다보면 자칫 언어의 소중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의 지도자 입장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적게 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합니다. 말보다 들음을 잘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꼭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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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자


홍종찬목사(사랑에빚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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