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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기와 권투·색소폰·수영의 공통점은?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 20. 04:42

책 쓰기와 권투·색소폰·수영의 공통점은?

등록 :2020-01-19 09:05수정 :2020-01-19 09:09

 

[토요판]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
⑦ 초보 작가의 마음가짐

글쓰기는 학문이 아니고 기예
스스로 갈고닦고 익혀야 한다
많이 읽었다고 잘 쓰는 거 아니고
합평 모임의 평가에 연연하지 마라

일러스트레이션 이내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 회에 쓴 것처럼 글쓰기는 학문이 아니라 기예(技藝)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서 초보 작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몇가지 지침을 얻을 수 있다.

<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기예’의 뜻풀이는 이렇다.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닦은 기술이나 재주.’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넘어지고 구르면서 한참 시간을 들여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악기 연주나 춤, 수영, 리듬체조, 목공 같은 일이다.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신체 부위는 눈과 손가락이 전부니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피아노나 기타 연주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예를 익히는 데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초반에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고 자빠지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 집어 든 색소폰을 멋지게 불었다든가 발레 교습소에 가자마자 그랑 주테 동작을 해냈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세상에 잠시 놀러 온 하느님이거나 인간형 외계인일 것이다. 이건 천부적인 재능이나 신체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익히려는 기예에 감식안을 갖췄다고 해도 별수 없다. 피겨스케이팅을 감상하는 능력과 피겨스케이트를 잘 타는 능력은 별개다. 글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좋은 글을 판별할 수 있다고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초보 작가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기는 처음부터 원고를 준수하게 잘 쓸 거라고 터무니없이 착각한다. 그랬다가 아이코, 이게 아니네, 하고 놀란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움츠리고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기예의 두번째 특징은 남이 하는 설명으로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고 몸으로 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호흡법과 팔다리의 동작을 교실에서 아무리 자세히 듣는다 해도 강연만 듣고 수영을 할 수는 없다. 물에서 허우적거려봐야 한다. 다른 사람은 다 하는 자맥질을 나만 못 할 수도 있다. 그 고비를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자맥질을 쉽게 하는 사람은 내가 어디서 막히는지 이해조차 못 하니까.

깨침과 숙달 사이에 시간이 걸린다는 게 기예의 세번째 특징이다. 악기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같은 구간을 수십번 되풀이해서 연습하는데 번번이 같은 곳에서 틀리면 저절로 욕이 나온다. 그래도 참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심오한 기예일수록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발전 속도가 너무 느려 짜증이 난다면, 이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소설을 읽기만 할 때는 몰랐던 문제

처음 소설을 쓸 때는 내가 쓴 인물들의 대사가 너무 어색하게 보여서 한참 고민했다. 소설을 읽기만 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실제 내 대화 내용을 녹음해서 녹취록을 만들어가며 자연스러운 대화란 어떤 것인지 연구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얼마나 조리 없이 엉망으로 지껄이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하는 대사를 그대로 옮기면 안 된다는 사실도 같이 깨달았다.

한 문단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게 아닌지, 농담이 너무 잦은 건 아닌지 같은 문제도 처음에는 하나하나 고민이 됐다. 쓰고 지우고 고치면서, 여러 버전을 비교하면서 나만의 감각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한 문단은 가능하면 A4 용지 기준으로 석줄에서 일곱줄 사이로 만들려 한다. 그게 내가 문장에 싣는 밀도와 어울리는 것 같다. 농담은 자제하려 한다. 내 글의 장점이 속도감이고 농담은 대개 속도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쓰면서 알게 됐다.

사물이나 풍경을 묘사하는 일이 서툴러 고민하던 차에 교본이 된 것은 아쿠타가와 수상작인 요시다 슈이치의 중편소설 <파크 라이프>였다. 묘사가 길게 이어지는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 책을 필사하면서 효율적인 묘사란 어떤 것인지, 화자의 내면이나 행동과 주변 환경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배웠다.

모든 사람이 문단을 일곱줄 이내로 써야 한다거나, 농담을 줄여야 한다거나, <파크 라이프>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직업 목수라면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연장을 여러개 구비해야 하듯이, 작가도 단어와 문장, 문단이라는 도구를 궁합이 맞는 종류로 골라서 그게 자기 몸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익혀야 한다는 의미다.

기예를 익히는 사람은 훈련하면서 자신의 스타일과 장점을 발견한다. 권투라는 한 종목에서도 선수마다 경기 스타일은 천양지차다. 어지간히 얻어맞아도 끄떡없는 강골인데 돌파력이 있고 핵폭탄 같은 주먹을 지녔다면 인파이터가 된다. 팔이 길고 눈이 빠르고 오래 뛰어도 지치지 않는다면 아웃복서가 된다. 내가 맷집이 센지 아닌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맞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대가 아니라 여러대를. 그렇게 분투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깨닫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진기행>을 원고지에 베끼는 식의 필사 훈련은 권하지 않는다. <무진기행>은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예쁜 종이에 좋은 펜으로 멋진 문장을 베끼는 걸 마음을 가라앉히는 취미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다고 필력이 저절로 발전할지는 모르겠다.

필사를 하려거든 경쟁사의 신제품을 분해하는 엔지니어의 마음으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품고 해야 한다. 어느 정도 자기 글의 개성과 스타일을 파악한 사람이 닮고자 하는 글을 골라 꼼꼼하게 작품 분석을 한다는 자세로 하는 게 옳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기며 구두점의 사용과 행갈이의 호흡을 익힐 수도 있겠고, 챕터를 요약해가며 논증의 구조나 플롯을 쌓는 방식을 배울 수도 있겠다. 그 작업을 펜으로 할 것인지 워드프로세서로 할 것인지, 대상이 되는 글이 한국 작가의 것인지 번역문인지는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합평 역시 마찬가지다. 합평 모임에 참여해서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부지런하게 쓰게 된다는 것이다. 글 쓰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용기도 되고, 내가 쓴 글이 남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가늠하는 테스트베드 구실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은 내가 아니며, 그곳의 조언이나 충고는 걸러 들어야 한다. 그 작은 모임의 평가에 연연하거나 감정을 소모할 이유는 전혀 없다.

초심자에게 이토록 공평하게 막막한 분야

처음에는 절대로 잘할 수 없고, 매뉴얼로는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고, 꾸준히 쓰고 좌절하면서 개별적으로 깨칠 수밖에 없다니, 너무 막막하다고? 두발자전거를 처음 타는 아이를 생각해보자. 동역학을 연구하고 자전거에 오르는 아이는 없다. 아이는 그저 떨리는 마음으로 안장에 올라 무작정 페달을 밟으며 무슨 일이 생기는지 관찰하고 반응해보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전거가 한쪽으로 기울 때 반대쪽으로 핸들 바를 잡고 적당한 힘으로 페달을 밟으면 몸체가 마치 떠오르듯이 균형을 잡고 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걸 반복하면 그 금속 구조물이 놀랍게도 몇분이고 몇십분이고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서서 바람처럼 달린다. 마법 같다. 이 사실을 알아낸 아이는 곧 자전거와 한 몸이 된다. 복잡한 암산을 하지 않아도 팔이 있어야 할 각도와 다리에 줘야 할 힘을 금세 알아낼 수 있다. 이후로는 넘어지는 일이 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기적 같은 능력을 타고난다.

두발자전거를 타는 데 필요한 건 물리학이나 기계공학 지식이 아니다. 그보다 필요한 것은 넘어지는 경험이다. 막상 넘어져보면 기껏 살갗이 조금 까지는 정도인데 넘어지기 전에는 그게 무척 두렵다. 어떤 이들은 ‘이 나이가 되도록 자전거를 못 타다니’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자전거를 배우지 못한다. 뒤에서 붙잡아달라는 요청을 할 만만한 친지가 없고,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도 싫은 것이다. 아쉽고 안타깝다.

이 바닥이 이토록 연구가 덜 됐고, 그저 쓰고 고치고 비틀거리면서 스스로 깨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누구라도 소용없고, 비싼 사교육도 통하지 않고, 고가의 시설이나 장비를 이용한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모든 초심자에게 이토록 공평하게 막막한 분야가 세상에 몇이나 남았단 말인가.

▶책 한권은커녕 다소 긴 탐사보도 기사조차 읽기 버거워하는 시대, 카드뉴스를 넘어 50초짜리 동영상이 글자를 대체하는 시대에 책이란 어떤 의미일까? 장강명 작가가 상상하는 ‘책 중심 사회’는 많은 이가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해 책을 쓰고, 책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사회다. 책 쓰기가 우리 사회에 왜 이로운지를 함께 모색해보기 위해 장강명 작가가 ‘책 쓰는 법’을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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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24920.html#csidxe429f47a96f0d7f8f5a8769e7dea0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