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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역사학’ 기틀 마련한 ‘재야 사학계의 별’…역사학자 이이화 별세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3. 20. 03:41

‘친근한 역사학’ 기틀 마련한 ‘재야 사학계의 별’…역사학자 이이화 별세

배문규·홍진수 기자 sobbell@kyunghyang.com

 

입력 : 2020.03.18 12:24 수정 : 2020.03.18 19:41

 

역사 대중화를 이끈 이이화 선생은 집필 활동만이 아니라 역사운동가로서 고구려사 보전 운동, 과거사 정리 운동, 친일청산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의 ‘역사 대중화’를 이끈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이 1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철저한 고증 작업을 바탕으로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이를 통해 역사학의 높은 장벽을 허물어 ‘재야 사학계의 별’로 불렸다. 대학 중심의 ‘강단 사학’에 대비해 부른 말이지만, 그가 일군 학문적 업적은 역사학계를 비롯해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6년 대구에서 주역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주역 팔괘에 따라 고른 ‘떠날 리(離)’에 돌림자 화(和)를 붙여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주역에서 ‘리’는 무언가를 녹여 새롭게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이름자를 갖게된 그는 이름처럼 남다른 삶을 살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유명 역사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학교를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사서(四書)를 배웠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가출해 각지를 돌며 고학을 하다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중앙대 문예창작과의 전신)를 다녔다. 어려운 형편 탓에 대학을 중퇴한 그는 아이스케키·빈대약 장수, 술집 웨이터, 가정교사, 불교시보 기자 등 20여가지 직업을 거쳤다.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입사해 원고를 다듬고 수정하거나, 기사 색인 작업을 맡아보며 근현대사에 눈을 떴다. 그는 이 시절을 두고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말했다.

그는 ‘허균과 개혁사상’,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같은 한국사 관련 글을 ‘창작과 비평’ 등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면서 30대 후반부터 필명을 얻는다. 역사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 대상의 교양서를 써보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을 번역했고, 서울대 규장각에선 고전 해제를 쓰기도 했다. 고서의 가치를 밝히며 일종의 ‘박사과정’을 거친 셈이다.

고인은 계간지 ‘역사비평’을 펴내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당시 인권 변호사 박원순(현 서울시장)과 임헌영(현 민족문제연구소장), 서중석(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1986년 2월 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가 목적이었다. 그는 운영위원과 부소장을 맡아 근현대 민중운동사를 써내려간다.

고인은 역사를 케케묵은 옛이야기가 아닌 현실과 맞물린 오늘의 이야기로 인식했다. 다양한 책으로 한국사를 대중에게 알렸다. 대표작이 개인이 쓴 한국 통사로는 가장 분량이 많은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한길사)다. 한반도의 빙하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 홀로 집필하는 전대미문의 작업이었다. 이 책은 무려 50만권이나 팔렸다. 그 외에도 <인물로 읽는 한국사>, <만화 한국사>, <주제로 보는 한국사>, <허균의 생각>,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을 발간했다.

그는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연구했다. 정치와 경제에 집중하는 문헌사와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생활사 간 경계도 뛰어넘고자 했다. 특히 50년 가까이 ‘동학농민전쟁’에 천착하며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는데 힘썼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였던 의적 또는 동학세력들, 평민의병장이나 민중세력들의 활동을 재평가했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월성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사관은 배격했다. 국정교과서 도입 등 역사 왜곡에 맞서고, 고령의 나이에도 ‘촛불 집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사회 참여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2011년 펴낸 자서전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이화 선생은 어릴 적부터 풍찬노숙하고 많은 고생을 거치면서 역사학에서 소신껏 연구해 일가를 이뤘다”면서 “야성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이자 행동인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고인은 단재학술상(2001년), 임창순 학술상(2006년)을 받았고, 2014년 원광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8월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도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씨와 아들 응일씨, 딸 응소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1일 오전 10시. 장지는 파주동화경모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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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181224001&code=960100#csidx3416fd9f5cbaf3587d8627a8bc370d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