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항쟁의 밤 한복판에 스러진 들불들, 대하소설로 살려낼 것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28. 08:58

항쟁의 밤 한복판에 스러진 들불들, 대하소설로 살려낼 것

등록 :2020-04-27 19:33수정 :2020-04-28 02:33

 

[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날 그사람들
⑩소설가 전용호(광주시 인권옴부즈맨)

탈춤 추던 대학생 ‘들불야학’에 들어가
윤상현·김영철·박관현 등 만나 큰 울림
마지막 항전 뒤 수배 피해 서울로 도피

‘광주학살 고발’ 넋풀이 노래극 기획해
황석영 집서 숨죽이며 녹음·배포하기도

마지막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
무명 때도, 등단 뒤에도 ‘5·18’ 화두로
1년에 한 편씩, 항쟁 주역들 써 갈 것

 

1980년 10월 광주 군 상무대 계엄재판에 나온 전용호씨. 전용호씨 제공

 

“그냥 우리가 대본 쓰고 노래 만들어 카세트테이프로 보급하자, 이런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지난 16일 광주광역시청 1층 상임인권옴부즈맨 사무실에서 만난 전용호(63)씨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배경을 생생하게 풀어냈다. 제안자는 광주에 살고 있던 황석영 작가였다. 1982년 3월 전남대 재학생 김종률 작곡가와 황 작가 집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5·18 진실 알리기가 숙제였다. 하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가 1980년 5·18 때 광주에서 저질렀던 학살을 고발한다는 게 쉽지 않던 때였다.그러다가 노래극 이야기가 나왔다. “황 작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남미 해방신학 운동가들이 즉석에서 조명을 끄고 의자에 앉아 노래와 행동으로 활동상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더래요.”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설립자 박기순의 영혼결혼식(1982년 2월)이 노래극의 모티브가 됐다. 노래 7곡과 사설 2개가 포함된 노래굿 <빛의 결혼식>의 가사는 황 작가가 썼다. “백기완 선생님 등 시인들의 시집을 갖고 거기서 골라 이야기식의 노래극 대본을 만들었어요.” 김종률이 이 가사에 곡을 붙였다.

 

광주 상임인권옴부즈맨으로 재직 중인 전용호 작가가 지난 16일 광주광역시청 1층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82년 4월 어느 밤, 노래 부를 사람들을 황 작가의 집으로 초청했다. “2층 거실에서 유리창에다가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담요를 붙이고, 일반 가정용 녹음기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불러 갖고 테이프를 만들었제.” 전씨는 “인권단체 도움을 받아서 2천개를 전국에 배포했는데 그게 그렇게 크게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다”고 했다. 7곡 중 마지막에 실린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전씨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두 주인공 고 윤상원·박기순과 인연이 깊다. 1978년 3월 전남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탈춤반에 들어가 탈춤을 배웠다. 그해 6월27일 명노근·송기숙·이석연 등 11명의 교수가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박정희 독재에 대한 교육계 최초의 저항인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리 회장·부회장이던 김선출과 김윤기가 수배됐다. 전씨는 동아리 이름을 가면극연구회로 바꿔 탈춤반을 재건하면서 자연스럽게 활동가가 됐다. 그해 가을 들불야학을 알게 됐다.

노동자 배움터 들불야학 3기 입학식에 참석한 윤상원 열사(오른쪽 첫째)와 전용호씨(오른쪽 셋째). 전용호씨 제공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광천동성당 안 교리실에서 노동자 배움터로 출발했다. 전남대 출신의 노동운동가 박기순이 들불야학 설립을 주도했다. 전씨는 그해 10월 하순 2기 강학(가르치며 배우는 교사)으로 참여한 윤상원과 조우했다. 윤상원은 주택은행을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플라스틱 공장에 노동자로 위장취업한 뒤 들불야학에 참여했다.“상원이 형은 사람이 좋아. 맺힌 것도 없고 밝고 활발해. 또 미남이고 멋있었어.” 전씨는 윤상원을 맏형처럼 믿고 따랐다. “한완상 교수가 쓴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읽으며 대학생도 기득권을 포기하고 변혁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했는데 상원이 형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 책 속의 지식인구나’라고 생각했죠.”김영철·박관현도 그에겐 큰 울림을 준 선배들이다. “야학 가서 보니까 김영철씨란 사람이 와서 광천동 지역개발 계획에 대해 설명을 하는 거야. 참 놀랍드마. ‘이런 사람이 다 있구나’라고 생각했제.” 명문 광주일고를 졸업한 뒤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김영철은 주민운동을 하다가 들불야학 팀을 만나 특별강학으로 동행했다. 전남대 복학생 박관현 형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시커멓게 물들인 군복에 검정 고무신 차림이었어. 호탕하고 풍채가 좋고, 인간적이고.” 전씨는 세 사람이 결합한 것을 <삼국지>에 빗대 “유비·관우·장비처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전남대 재학 중 탈춤반 활동을 했던 전용호씨가 동아리 모임에서 기타를 들고 있다. 전용호씨 제공

들불야학 출신 강학과 노동자, 학생들은 5·18의 격랑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씨도 들불야학 팀이 만든 민중언론 <투사회보>를 뿌리고 거리방송을 하면서 궐기대회를 진행하는 등 항쟁의 한복판에 섰다. 그러다가 5월27일 전일빌딩 뒤편인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최후 항전에 나섰다.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그곳에 있던 여성들부터 담을 넘어 피신하도록 했다. 와이더블유시에이엔 20여명이 남았는데 총이 7~8자루밖에 없었다. 총을 가져오라고 보낸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상집이 형하고 도청으로 가는데 그쪽 불이 꺼져 새카맣더라고.” 그 순간 녹두서점 쪽에 있던 정현애씨가 시동생을 발견하고 “상집씨 얼른 와”라고 불렀다.

들불야학 체육대회에 참석한 윤상원 열사(윗줄 오른쪽 다섯째)와 전용호씨(맨 아래 오른쪽 첫째). 전용호씨 제공

녹두서점에 갇혀 총소리를 들었다. 녹두서점을 혼자 나와 광주고 앞 매형 집으로 걸어갔다. “장동 문거리에서 광고 쪽으로 가는데 대로로 나가니까 군인이 ‘손 들어! 가방 안에 뭐 들었어?”라고 하더라고. 그때 5·18 유인물을 신문지 안에 덮어놨거든.” 손을 올리고 서 있는데 전씨를 발견한 매형이 군인에게 신원을 보증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체포됐다면 5·18 궐기대회 유인물 원본도 사라질 뻔했다.‘곧 있음 수배될 것 같으니까 튀자’는 선출이의 말에 이튿날 서울로 도피했다. “고려시멘트 통근 차량을 타고 장성역으로 갔어. 광주역 앞에서 군인들이 차 안까지 올라와 한번 훑어보더니 그냥 내려가드마.” 친척 집에 머물면서 서울대 탈춤반과 홍익대 한두레팀을 만났다. “관악의 한 자취방에서 임영희랑 녹음기에 5·18 유인물을 낭독해 테이프를 만들었어. 서울대 팀이 복사해 전국으로 돌렸제. 5·18 현장에서 낭독됐던 궐기대회 문안들이었제.”

1982년 4월 광주 황석영 작가 집에서 제작된 노래굿 <빛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의 테이프.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다가 7월21일 경찰에 자수했다. 어머니한테서 중학교 과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사표 압력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조사가 다 끝날 무렵이라 <투사회보> 관계된 것만 쓰라고 하더라고요.” 1년6개월 형이 확정됐고 그해 12월 형 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하지만 들불야학 윤상원·박용준 형은 5월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수배됐던 박관현 형도 붙잡혀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단식투쟁 끝에 사망했고, 김영철 형도 상무대 영창에서 들불야학 노동자 박용준의 비보를 듣고 자살을 기도한 뒤 오랜 투병 끝에 1998년 세상을 떴다.감옥에서 나와 공장 노동자가 됐다. 가족들은 독일 유학을 권했지만, 선배들을 생각하면 다른 길을 갈 수 없었다. 1981년 5월 들불야학 노동자 학생 김성섭과 월세를 얻어 살면서 광천동 철판 공장을 다녔다. 그해 10월 경찰서 형사들이 수배 중이던 친구 신영일을 찾기 위해 공장으로 찾아왔다. “그 다음날 출근하니까 사장이 밀린 월급을 봉투에 담아주며 나가라고 하드마.” 그 뒤 기독교장로회 광주연합 청년회에서 2~3년간 전남연합회 상임총무로 일했다. 이때 황석영 작가를 만났다.

1978년 7월 노동자 배움터로 출발한 광천동성당 안 교리실. 전용호씨 제공

황 작가와 1983년 동문다리 근처 건물 지하에 ‘일과 놀이’라는 소극장을 만들었다. “박효선 형이 연극 팀을 짜서 공연했는데 정보과 형사들이 눈여겨본 거여. 공연법 위반으로 걸려 벌금 냈어.” 일과 놀이 해체 이후 민중문화연구회가 발족돼 분과별 운동이 시작됐다. “문학 분과 대표는 임철우·곽재구, 미술은 홍성담·김경주, 연희는 박효선·윤만식 이렇게 된 거야.”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민중미술연합회와 광주미술인공동체, 극단 토박이와 극단 신명, 노래패 친구로 분화됐다.일과 놀이에서 평생 반려자를 만났다. 일과 놀이 간사로 함께 일했던 이춘희(광주YWCA 솔빛타운 소장)씨와 1985년 결혼했다. 신부도 1982년 6월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투사였다. 전씨는 “송기숙 교수께 주례를 부탁했더니, 송 선생이 ‘인마, 너는 황석영이가 서야제’라고 하셨다”고 했다. 1987년 도서출판 ‘광주’의 편집장을 맡아 <조선철학사 연구> 등 30여권을 냈다가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기소돼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나왔다.

1985년 전용호씨의 결혼식에서 황석영 작가가 주례를 맡고 있다. 전용호씨 제공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문학의 꿈을 놓지 않았다. 어릴 때도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던 보성여중의 도서관을 수시로 드나들던 그였다. “초등학교 2~4학년 때인데 중고등학생들의 책을 많이 읽었어. 조숙했어.(웃음)” 1973년 광주일고에 입학했지만, “노는 재미를 알아” 공부는 등한시했다. 하지만 꾸준히 책을 읽었고, 1990년대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소설 공부를 시작했다. 1998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이 당선됐다. 지난해 12월 8편의 작품을 묶어 <오리발 참전기>라는 첫 소설집을 냈다.‘마지막 새벽’은 80년 5월26일 밤부터 마지막 새벽까지를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엔 그가 5월26일 저녁 도청 민원실 2층에서 만난 대학생과 재수생, 청년 등 3명이 등장한다. 5월18~19일 시위 도중 집에 숨었다가 부끄러워 계엄군의 진압을 앞두고 총을 들겠다고 왔던 이들이다. “비상이 걸린 뒤 몸이 와들와들 떨리는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몰려오더라고. 전투경찰이 벗어놓고 간 카키색 잠바를 껴입고 마음을 안정시켰지.”

2017년 11월 만해문학상 특별상 수상식에서 전용호 작가가 꽃다발을 받고 있다. 전용호씨 제공

무명 소설가로 살면서 글을 많이 썼다. 윤상원 형의 일기를 엮은 <미완의 일기>(1999)와 김영철 형의 유고집 <못다 이룬 공동체의 꿈>(2015) 등도 있다. 2017년 11월 황석영 작가, 이재의씨와 공동 집필한 5·18 항쟁 첫 기록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개정판)로 만해상 특별상도 수상했다. “올해부터 반드시 1년에 장편소설 1권씩을 쓰겠다고 약속했어요. 5·18 항쟁의 주역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투쟁을 했고, 또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를 진솔하게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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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호씨가 펴낸 소설집 <오리발 참전기>.

1982년 4월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녹음해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한겨레> 자료사진

5·18 항쟁 당시 최후 항전을 하다가 숨진 시민군 대변인 고 윤상원 열사.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18항쟁 당시 시민궐기대회에서 낭독됐던 유인물. 전용호씨 제공

1980년 5월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 앞에 정차돼 있는 전남대 통학차. 전용호씨 제공

 

이슈임을 위한 행진곡

연재[5·18민주화운동 40돌 기획] 오월, 그날 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