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아침햇발] ‘n번방’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막으려면 / 박용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29. 04:33

[아침햇발] ‘n번방’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막으려면 / 박용현

등록 :2020-04-28 18:35수정 :2020-04-29 02:40

 

지난 22일 강원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지역 여성단체 회원들이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 생산자와 유포자, 이용자의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니세프에서 법률 조언을 해주는 자비네 비팅은 몇해 전 쓴 글에서 인신매매범들이 갈수록 사이버 공간을 피해자 유인 등에 악용하는 점에 주목하면서, ‘납치·감금 같은 물리적 강제력 행사나 공간 이동 없이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사이버 성착취’가 일어난다면 어떤 범죄로 다뤄야 할지 논증했다. 그는 이 또한 피해자를 불안하고 낯선 환경으로 몰아 착취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있다.인신매매에 관한 가장 보편적 국제 규범인 ‘유엔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는 20년 전에 성안된 탓에 지금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사이버 성착취를 명시적으로 담지 못했다. 하지만 의정서가 정의한 인신매매에는 “협박, 유인, 기만, 취약한 지위의 이용 등을 통한” 디지털 성착취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국제법 학자들의 해석론이 나오고 있다. ‘엔(n)번방’은 ‘현대판’ 따위 수식어가 필요 없는 인신매매 그 자체인 것이다. 사람의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아 수익을 취하는 범죄의 본질도, 그 피해의 참혹함도 같다.우리나라도 2015년 비준한 의정서는 이 잔혹한 범죄에 맞서는 다층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사회·경제·문화적 요인들이 복합된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1차적 전략은 물론 강력한 형사 처벌이다. 성착취 목적의 인신매매는 법정형이 2~15년인 반면, 조주빈씨에게 적용된 성폭력처벌법의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는 7년 이하에 그친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경우(청소년 성보호법에 따라 5년~무기징역) 이외에는 엔번방과 같은 범죄를 제대로 처벌할 규정이 미비한 셈이다. 디지털 성착취도 그 본질에 걸맞게 인신매매의 한 유형으로 다루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피해자 지원·보호는 또 하나의 축이다. 의정서는 특히 형사 절차에서 피해자들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거기에서 이들이 중시하는 점을 표명할 수 있게 하고, 이를 사건 처리에 반영하도록 규정한다. 숨죽인 피해자가 아니라 문제의 전모를 드러내고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법률적 조언과 의료·심리적 치유뿐만 아니라 주거를 비롯한 생활 지원과 고용·교육 기회 등도 제공할 것을 요청한다. 피해자들이 존엄성을 회복하고 일상에 온전히 복귀하도록 돕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의정서의 세 번째 전략은 예방 조처다. 사람들을 인신매매에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들, 이를테면 빈곤이나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형사 처벌 강화가 잠재적 가해자를 억누르는 대책이라면 예방 조처는 잠재적 피해자를 보호하는 대책이다. 사회 진입 어귀의 불안정한 시기를 견뎌야 하는 청년들에게 더 촘촘한 안전망과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범죄 피해 방지를 넘어 기회 균등 차원에서도 당연한 일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도 돌아봐야 한다.예방의 또 다른 측면은 수요 차단이다. 의정서는 인간에 대한 착취의 자양분이 되는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교육·사회·문화적 차원의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짚는다. 성착취물을 보거나 지니는 행위도 처벌하는 건 하나의 단초다. 활발한 감시 활동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에서 자양분을 제공하는 성차별과 성폭력, 성의 상품화 등 강고한 사회·문화적 구조를 무너뜨리려면 훨씬 지난한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엔번방 사건에 분노하면서도 어떻게 접근해 풀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을 받곤 했다. 충격적으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환부는 깊고도 넓다. 분명한 건 하나의 형사 사건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점이다. 엔번방으로 향하는 길은 수없이 가지를 치며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길목을 차단하려면 사회 전반에 걸친 일대 수술이 필요할 것 같다. 시민사회와 청년 당사자,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적 기구 등을 통해 전사회적 지혜를 모아야 할 중대 과제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인신매매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비인간화한다”고 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태를 지켜보는 우리의 존엄성도 상처받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야 한다.

박용현 ㅣ 논설위원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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