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조은 칼럼] 오월 광주와 ‘우리 선생님’에 대한 사유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 20:38

[조은 칼럼] 오월 광주와 ‘우리 선생님’에 대한 사유

등록 :2020-04-30 18:06수정 :2020-05-01 10:59

 

80년 오월 광주의 열흘을 빠르게 요약하고는 ‘우리 선생님’이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학생들을 가로막고 나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고 누워버리셨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수피아는 쑥대밭이 되거나 줄초상이 났을 거라는 참담한 말로 마감한 그 친구 이야기를 내 안에서 틀고 또 틀었다.

 

오월의 문턱에 들어서면 언젠가는 한번쯤 꺼내고 싶지만 덮어두었던 이야기를 일상에 쉼표가 찍힌 동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오래 유예한 숙제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녀 깊은 연고가 있지만 1980년 5·18에서 시작하는 그 열흘간의 ‘오월 광주’에 부재했고 사회(과)학자이면서 5·18에 대한 분석에도, 담론화에도 참여한 적이 없으며 아직도 그 오월 광주를 설명할 수 있는 내 언어는 막막함에 갇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헛돌 듯하지만 내가 어떻게 오월 광주와 마주했는지 마주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내면의 풍경을 따라가본다. 그러다가 ‘우리 선생님’ 이야기에서 멈춰 섰다.

 

‘우리 선생님’은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고1 때 우리 반 애들이 주저 없이 담임 선생님을 부르는 일종의 고유명사다. 우리는 중2 때 4·19, 중3 때 5·16 군사 쿠데타를 겪고 1962년 군사정부가 내민 전국공동출제 연합고사를 치르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한 학년이 세 반뿐인 작은 학교와 담임 선생님에게 정을 붙였다. 담임은 화학 선생님이셨는데 고1 연말을 앞둔 어느 날 종례시간에 오 헨리의 단편집 〈마지막 잎새〉를 들고 오셨다. 그 안에 있는 <20년 후>를 읽어주시다 말고 ‘20년 후 우리 모습 상상해보기’를 제안하셨다. 모두들 신나게 20년 후 자기를 상상하며 떠들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럼 20년 후에 만나보자는 의견을 냈다. 곧바로 그 약속의 징표로 다음해 봄에 함께 나무를 심기로 했다. 새 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다른 반으로 흩어졌음에도 4월이 되자마자 1학년 때 담임과 반우들이 모여 식수를 했다. 식수목은 낙우송이었다.

 

1983년 봄 우리는 ‘20년 후’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낙우송 앞에 모였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우리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모여들었고 선생님은 20년 전 출석부와 20년 후를 상상하며 재잘거린 우리들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도 챙겨 오셨다. 왁자지껄 떠들며 교정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너는 광주에 없어서 모를 것 같다”면서 80년 오월 광주의 열흘을 빠르게 요약하고는 ‘우리 선생님’이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학생들을 가로막고 나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고 누워버리셨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수피아는 쑥대밭이 되거나 줄초상이 났을 거라는 참담한 말로 마감한 그 친구 이야기를 내 안에서 틀고 또 틀었다. 그때까지도 5·18은 공포의 언어였고 오월 광주는 완전한 침묵에 묶여 있었다.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내 주거지는 하와이대학교 캠퍼스 안의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 기숙사였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난 난리’ 소식은 주로 전화선을 통해 들었다. 그 참상은 80년 12월 하와이대 구석진 작은 모임방에서 몇몇이 둘러앉아 국외로 유출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보게 되었다. 그 다음해 봄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미국 방문길에 올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귀국길에 하와이대에 들러 한국학연구소 앞에 매그놀리아로 기념식수를 했다. 몇몇 유학생이 밤중에 그 기념식수의 팻말을 뽑아 거꾸로 꽂았다. ‘우리 선생님’ 이야기에 이러한 기억들이 엇갈리며 겹쳐지고는 한다.

 

이 칼럼을 쓰다 말고 선생님 장녀 현희씨한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1주기를 앞두고 있어 안부 겸 이야기를 쉽게 꺼냈다. “아버님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신 적이 없고” 당시 고3이던 셋째 동생한테 전해 들어 알고는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예상치 않게 자기가 겪은 오월 광주를 바로 쏟아냈다. 군의관과 결혼해서 경기도 파주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본인은 보건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친정이 그리워 일주일 휴가를 받아 광주에 온 바로 다음날 계엄이 선포되었고 ‘그 광주의 열흘’을 온몸으로 겪은 것이다. 결혼 전 광주기독병원 약제실에서 마약 담당 약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 사상자가 들이닥치고 있던 그 병원에 달려가 진통제와 마약 내주는 일을 돕고 남편은 외과의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병원 가운을 빌려 입고 시신을 옮기는 사람들한테도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고 그 병원에만도 하루 동안에 부상자 150명이 밀어닥치고 15명이 사망한 그런 때였다. 현희씨가 밤늦게 귀가해보면 아버지는 학교 기숙사의 소등까지 점검하고 오신 듯한데 그 열흘 동안 서로 아무 말도 못 했다.

 

현희씨는 셋째 동생한테 확인한 40년 전 사실 몇가지를 전해주었다. 고등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던 상황이었고 기숙사에 지방 학생 몇명과 대입 준비 합숙반 학생 몇십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시내로 진출하려고 몰려나오자 교감 선생님이었던 아버님이 기숙사 문을 막고 “나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고 실제로 드러누우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고 했다. “아버님은 오직 학생들을 돌보신 것이고 광주민주항쟁에는…”으로 끝맺은 셋째 여동생의 말도 전했다. 그 말에 멈춰서 ‘오월 광주’의 열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는 “칼라가 넓은 수피아여고 하복을 입은 누나가 평상복 차림의 누나와 함께 피 묻은 얼굴들을 물수건으로 닦아내고…”라는 대목이 있다. 헌혈하러 왔다가 시신 거두는 일을 돕는 장면인데 “은숙 누나는 짐작대로 수피아여고 3학년이었다”고 부연한다. ‘우리 선생님’의 간절함에 발길을 돌린 후배들은 한강의 소설에서처럼 시신을 거두는 일을 도왔을지도 모르겠다.

 

오월 광주는 수천쪽의 증언록에 오르지 않은 수만의 서사를 품고 있다. 오월 광주의 슬픔과 분노와 아픔은 그만큼 깊고 다양하고 무겁다.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 모인 30만 광주시민 ‘민중’의 서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데 “1980년 5월 광주 상공에서 헬기 사격은 없었다”를 되풀이하며 ‘꾸벅꾸벅 조는’ 전두환의 기사가 뉴스로 떴다. 마음을 추스르며 정치학자 최정운이 1999년 펴낸 〈오월의 사회과학〉을 꺼냈다. 그는 머리말에서 사회과학자가 5·18을 연구하는데 ‘그쪽 사람이었어?’ 또는 ‘아닌데 왜’ 같은 질문에 얼마나 열 받아야 하(했)는지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이를 건너뛰며 “5·18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다”에 줄을 치고 또 쳤다. 첨언하면 제자들이 ‘전설적 교사’로 기억하는 ‘우리 선생님’ 성함을 밝히지 않은 것은 당신을 내세운 적이 없는 선생님 삶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전두환과 같은 지면에 함자를 올리고 싶지 않아서다.

조은 ㅣ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연재조은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