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미국 첫 방문한 덩샤오핑 배려로 하얼빈 가서 고모 상봉했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2. 04:18

“미국 첫 방문한 덩샤오핑 배려로 하얼빈 가서 고모 상봉했다”

등록 :2020-05-11 20:55수정 :2020-05-11 21:47

 

1979년 1월 미-중 국교 정상화 ‘낭보’
중국 최고 실권자 ‘덩’ 애틀랜타에도
“미국 배우러 왔다” 연설에 ‘거인’ 풍모

카터에게 부탁해 환영회 초청장 얻어
통역 지차오주에게 ‘가족 사연’ 전달
‘덩’ “중국 사는 친인척 명단 적어달라”
2주 뒤쯤 “모두 찾았으니 만나러 오라”

1980년 여름 35년만에 하얼빈 ‘환향’
군악대·펼침막·친인척들 ‘대환영’

‘38선 첫 획정’ 딘 러스크 적극 지원
‘이산가족협회’ 꾸려 해마다 중국에
동포들 가족 사연 동영상으로 찍어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길을 찾아서-30회 이산가족의 한과 설움 (I)

박한식 교수는 1979년 1월 미-중 국교정상화에 이은 덩샤오핑 부주석의 미국 첫 방문 덕분에 부친의 유언대로 흑룡강성 친인척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맨 오른쪽)이 1979년 1월29일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연회에서 카터 대통령(맨 왼쪽), ‘핑퐁외교’로 중국을 맨 처음 방문했던 닉슨 전 대통령(왼쪽 둘째)과 지차오주(오른쪽 둘째)의 통역으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위키미디어

 

나는 이산가족이다. 우리 집안이 이산가족의 삶을 살게 된 배경을 되짚어 보면 19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해 조선 망국의 설움을 안고 북만주의 흑룡강성(헤이룽장성)으로 이민을 갔다. 흑룡강성에 정착한 이민자의 약 90%가 경상도 사람이었다. 압록강 주변에는 평안도 사람이 먼저 정착하고, 두만강과 연변 주변은 함경도 사람이 먼저 차지했다. 따라서 경상도 사람은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 흑룡강성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흑룡강성에서 1912년에 태어났고, 나 역시 그곳에서 1939년 태어났다.

 

만주에 이민을 간 조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쌀농사를 지었다. 전통적인 방식의 논농사를 했다. 만주에서는 논을 ‘수전’(水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시절 중국 사람들은 수전에서 거둔 쌀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만주에는 조선 사람들이 수전에서 거둔 쌀이 대단히 풍부했다.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 쌀을 고향으로 보냈다.

 

흑룡강성에 정착한 할아버지는 논농사를 지으면서 정미소를 개업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 정미소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쌀이 비축되어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어느 날 장제스(장개석)의 국민군이 우리 정미소를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국공내전의 와중에서 쌀이 비축된 정미소가 약탈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우리 가족은 급히 야반도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수많은 친인척을 흑룡강성에 남겨두고서 탈출했다. 이산가족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알다시피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냉전이 시작되자 중국은 ‘죽의 장막’에 가려졌다. 이제 흑룡강성에서 헤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을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대에 입학한 1959년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1975년 조지아대학에서 강의에 열중하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나는 급히 귀국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내 손을 잡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서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버지의 병세가 일시 호전되기도 했다. 대화가 한참 무르익던 어느 순간 아버지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해주었다. “귀국하지 마라. 미국에 남아서 통일운동에 전념하라. 한국에서는 통일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흑룡강성에서 헤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친인척분들을 꼭 찾아라.” 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내 인생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실존적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약속을 지킬 길은 막막했다. 장막에 가려진 중국의 그 넓고도 넓은 땅 어디에서 30년 전에 헤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그랬던가? 197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앞으로 미국인은 세계 어느 곳이나 갈 수 있다!”고 천명했다. 그동안 미국인이 갈 수 없었던 쿠바, 베트남, 북한, 알바니아를 방문해도 좋다고 발표한 것이다. 또한 카터는 1979년 1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미국인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길까지 열었다.

1979년 1월29일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앞줄 맨오른쪽) 부주석이 백악관에 도착해 지미 카터(앞줄 맨왼쪽)의 안내를 받으며 미 의장대의 환영 사열을 받고 있다. 박한식 교수에게 미중 수교와 덩샤오핑의 방미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됐다. 사진 지미카터도서관 제공

 

나 역시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중국대사관을 찾아가서 부대사 지차오주에게 흑룡강성의 조부모와 친척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업무 분야가 외교 쪽이라서 중국 국내 문제는 잘 모른다고 답변했다. 그래도 한번 알아는 보겠다고 그랬다. 나는 그의 말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지차오주로부터 연락이 오질 않았다.실망의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또다시 천금 같은 낭보가 들려왔다. 덩샤오핑이 1979년 1월28일부터 2월6일까지 미국을 방문해서 카터 대통령과 회담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더욱이 조지아주 출신인 카터는 덩샤오핑이 조지아주의 주도인 애틀랜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 애틀랜타는 내가 재직 중이던 조지아대학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먼저 카터 쪽에 사정사정 부탁을 해서 덩샤오핑의 애틀랜타 방문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초청장을 얻어 냈다.

박한식 교수는 1979년 2월1일 덩샤오핑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들렀을 때 카터 대통령의 도움으로 환영회에 참석해 덩샤오핑에게 직접 흑룡강성 친인척의 명단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때 애틀랜타를 방문한 덩샤오핑이 중국계미국인협회(NACA) 회원들과 찍은 단체 기념사진 모습이다. 사진 NACA 누리집 갈무리

 

나는 지금도 덩샤오핑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카터의 소개를 받은 덩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덩샤오핑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왔습니다. 중국은 너무 가난합니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경제, 과학, 기술 등을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을 방문한 목적도 미국에서 많이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 나는 놀랐다! 그의 발언을 듣는 순간 그처럼 작은 체구의 덩샤오핑이 갑자기 거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덩샤오핑의 그 연설은 오늘의 중국 경제발전을 잉태하고 있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밖으로의 대약진 운동’(Great Leap Outward)을 구호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중국 22개 성과 5개 자치구 등의 경제적 자율권을 대폭 허용하는 지방분권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중국 경제발전의 탄탄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워싱턴을 방문한 덩샤오핑(맨왼쪽) 중국 부주석과 카터(맨오른쪽) 미 대통령이 통역관인 지차오주를 사이에 두고 이동을 하고 있다. 앞서 주미 중국 부대사를 지낸 외교관인 지차오주는 지난 4월29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 사진 지미카터도서관 제공

 

덩샤오핑 연설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의 통역을 담당했던 지차오주에게 다가갔다. 나를 본 지차오주는 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친인척을 좀 찾아봐달라는 예전의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차오주에게 내 사정을 덩샤오핑에게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옆에서 우리의 대화 소리를 들은 덩샤오핑이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지차오주가 곧바로 내 얘기를 덩샤오핑에게 전했다. 덩샤오핑은 나에게 친인척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흑룡강성에 있을 거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아느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테이블의 냅킨에다 내가 평소 기억해 두었던 친인척 7명의 이름을 한자로 썼다. 사실 찾고 싶은 우리 친인척은 30여명에 이르렀지만 시간 탓에 다 적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내가 한자를 아주 잘 쓴다면서 깜짝 반가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덩샤오핑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단히 정중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덩샤오핑을 만나고 2주쯤 뒤에 지차오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친인척을 모두 찾았으니 가서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가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배려로 1979년부터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박한식(왼쪽) 교수는 1980년 여름 하얼빈을 방문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35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사진은 1981년 7월 방문 때 고모(오른쪽)와 고향마을 인근 송화강변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박한식 교수 제공

 

1980년 여름방학 때 나는 큰 가방 두 개를 메고서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덩샤오핑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나와 나를 환영해주고 또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약 20시간을 달려서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군인 둘이 기차에 올라와 내 짐가방 두 개를 들어주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군악대가 팡파르를 우렁차게 울리면서 환영해 주었다. 바로 그 옆에서 약 30명의 우리 친인척이 손을 흔들며 열렬히 반기고 있었다. 친인척들 뒤에는 ‘박한식 교수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펼침막까지 내걸려 있었다. ‘금의환향’이란 이런 순간을 두고서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나는 마중 나온 고모님의 댁을 숙소로 정했다. 그래서 막 이동을 하려고 하자 중국 관리가 다가왔다. 그냥 가지 말고 하얼빈의 국제호텔에서 쉬었다 가라는 것이었다. 며칠간 묵어도 좋다고 그랬다. 지차오주도 국제전화로 친인척들을 잘 찾았느냐고 확인했다. 나는 그들의 배려를 쉽게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호텔에서 하룻밤 만 묵기로 했다. 친인척 30여명도 함께 호텔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호텔방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가난한 삶을 살던 그들에게 호텔방은 처음 보는 구경거리였다.

 

이튿날 우리는 곧바로 고모님 댁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나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에서 고모님 댁으로 가는 장거리 도로가 최근에 깔끔하게 정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이 다시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이 그의 배려로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덩샤오핑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흑룡강성에 살고 있던 친인척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친인척들과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면서 한 많은 사연을 수없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사셨다는 사실도 알았다. 할머니는 1976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1959년부터 두 분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니 무려 17년 동안이나 살아 계신 할머니의 제사를 지낸 셈이었다.

1979년부터 미 시민권자로 ‘공산주의 국가’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박한식 교수는 1981년 8·15 특집으로 <동아일보>에 ‘죽의 장막에 가린 재만 200만 동포의 생활상’을 기고하기도 했다.

 

나는 이산가족의 한은 오직 직접 만나야만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런데 흑룡강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만나보니 거의 모두가 나와 같은 이산가족이었다. 그들은 모두 피맺힌 한과 처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동료 교수로 친하게 지내던 딘 러스크를 찾아갔다. 그는 존 에프(F) 케네디 행정부와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 무려 9년 동안 국무장관을 지낸 뒤 조지아대학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45년 8월 미국 전쟁부 작전국 산하 전략정책단 실무자로서 한반도의 38선을 맨 처음 획정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그때 한반도 분단선을 원산을 기준으로 정했더라도 김일성이 수용했을 거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자신이 획정한 38선이 이처럼 오래 지속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1970년부터 조지아대학 법학과 교수로 있던 딘 러스크(가운데)는 동료 박한식(맨왼쪽) 교수가 1980년 중국을 다녀와 동포들의 이산가족 찾기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이산가족협회’(UFI) 결성을 도와주었다. 그는 1945년 8월 정보장교 시절 ‘한반도 38선’을 가장 먼저 제안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러스크는 나로부터 이산가족의 현실을 전해 들으면서 말할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산가족협회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다고 답변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데 조교수의 박봉으로는 쉽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그러자 러스크는 곧장 발 벗고 나서서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면세 혜택을 받는 비정부기구(NGO)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산가족협회’(UFI: Uniting Families Inc.)라는 이름도 손수 지어주었다. 미국에서 면세 혜택을 받는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러스크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도와주었다.

박한식 교수는 1980년부터 거의 해마다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방문해 이산가족 동포들의 사연을 기록하고 촬영했다. 사진은 1989년 박 교수가 <한국방송>의 대담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했을 때 소개된 장면으로 1987년 9월 중국 방문 때 찍어온 영상이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나는 그 뒤 방학 때마다 유에프아이의 도움을 받아 흑룡강성을 방문할 수 있었다. 내가 가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인터뷰를 했다. 찾고자 하는 가족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고향이 어디입니까? 어떻게 헤어졌습니까? … 그들은 찾는 사람의 성함, 고향 주소 등을 기록한 큰 종이를 보여주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 장면은 모두 비디오카메라(VTR)로 녹화했다.

 

고령이어서 직접 나를 찾아오기 힘든 어르신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어디든 찾아갔다. 흑룡강성 전역을 누볐을 것이다. 키가 작은 내가 무거운 장비를 메고서 비포장도로를 멀리 걸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떤 때는 ‘똥구루마’(분뇨수거 수레) 뒤에 타고 똥냄새를 맡으면서 시골길을 이동하기도 했다.어느 날 인터뷰를 하다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똑똑한 청년을 발견했다. 나는 내 작업의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두말 않고 도와주겠다고 그랬다. 나는 그와 함께 먼 길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동포들을 만났다. 나중에 들으니 그 청년은 일본으로 유학을 해서 교수가 되었다고 했다.

박한식 교수가 직접 찍어온 중국 동포들의 영상은 1983년 9월 <한국방송>의 ‘연속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통해 방영됐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1983년 9월 <한국방송>의 ‘연속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박한식 교수가 찍어온 중국 하르빈·심양 지역의 이산가족을 소개하는 화면이다. 한국과 수교 이전이어서 ‘중공’으로 표기했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1983년 9월 <한국방송>의 ‘연속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박한식 교수가 찍어온 하얼빈 동포의 이산가족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나는 그때 비디오로 녹화한 영상을 <한국방송>(KBS)에 보냈다. 한국방송에서는 내가 보낸 영상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 <중공서 만납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등에서 방영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약 200여명의 이산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1989년 6월19일에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는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해서 중국 이산가족의 아픈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방송 이기홍 사장은 나의 이산가족 찾기 노력을 평가해서 감사패를 주기도 했다. 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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