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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다시 가는 날 ‘이야기 요정’ 할머니가 나타날 거예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6. 09:13

유치원 다시 가는 날 ‘이야기 요정’ 할머니가 나타날 거예요

등록 :2020-05-16 06:46수정 :2020-05-16 07:14

 

[토요판] 커버스토리
이야기 들려주는 할머니들의 세상

50~70대 여성 어르신들
동물 우화, 선현 미담 위주
매년 4~12월 옛이야기 수업
현재는 코로나로 무기한 연기

노년의 우울감과 위축 잊어가
“아이들 사랑 때문에 ‘거만’해져
할머니들 기쁜 이유는 딱 하나
아이들이 제 얘기를 들어줘요”

 

정양(69) 이야기할머니가 지난해 5월 경북 영주시 하나유치원에서 이야기 수업을 하는 모습.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어린이집과 유치원에는 ‘빨간 가방을 든 이야기 요정’이 나타나곤 합니다. 아이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찾아오는 ‘이야기할머니’ 2800여명이 그들인데요. 매년 30개 넘는 옛이야기를 외우고, 정확한 발음과 전문적인 이야기 구연을 교육받는 이들은 ‘3개 언어’를 사용합니다. 한국어, 재밌어, 매력 있어!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에는 매해 4월부터 12월까지, 이야기할머니를 상징하는 빨간색 ‘이야기 가방’에 우리 옛이야기를 가득 담고 전국 유아교육기관에서 아이들과 만나왔습니다. 할머니와 아이들이 ‘이야기 친구’, 말동무가 된 11년 동안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노년의 투병, 우울, 상실이 덮치는 동안 끊임없이 읽고 쓰고 이야기하는 삶은 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스스로 “거만하고 기쁜 할머니”가 됐다는 여성 어르신들의 매력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배꼽 손! 인사~!

 

여러분, 안녕하세요? 할머니는 해마다 4월이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화체육관광부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이하 이야기할머니)예요. 5월 이맘때면 여러분과 할머니가 두달째 만나서 친해지곤 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못 만나고 있네요. 그래도 여러분, 할머니를 잊지는 않았지요?

 

우리가 바이러스 걱정 없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했던 날들을 나는 잊지 않고 있어요. 이야기가 5분을 넘어가면 여러분은 슬슬 좀이 쑤시고 친구랑 장난을 치고 싶어 하지요. 그건 아주 당연해요. 아이의 시간은 어른의 시간과 다르니까요. 여러분이 태어나서 살아온 시간은 길어야 7년이 전부이니 그중 하루, 한 시간, 1분이 얼~마나 크고 길게 느껴지겠어요?그래서, 친구랑 만나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지금이, 특히 어린이에게 길고 어려운 시간이라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여러분이 이렇게나 오래 견뎌주어서 할머니는 아주 많이 놀랐지요. 어른들이 여러분에게 가장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꼭 얘기해주고 싶어요.이런 재난 시기에는, 할머니 같은 노인의 시간도 ‘젊은 어른’의 시간과는 조금 의미가 달라요.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렵지요? (속삭이듯) 이건 원래 언니나 형아들한테만 해주는 이야기인데, 특별히 들려줄게요.어린이와 반대로, 할머니의 하루는 애가 탈 만큼 짧게 느껴진답니다. 거리두기 기간이 길어진다는 건, 남은 날 동안 여러분을 만날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니까요. 조금은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네요? 그래서 어린이와 할머니는 ‘이야기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몰라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시간을 살면서도요.그동안 할머니는 새 이야기를 익히며 지냈어요. 이야기할머니들도 요즘 온라인으로 동영상 ‘이야기 교육’을 받거든요.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오늘은 이렇게 목소리만으로 이야기를 전하려 해요. 그럼 ‘이야기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_____________

 

이야기 하나, 할머니를 감싸준 ‘이야기 반창고’

처음 할머니가 들려줄 이야기는, 제목 나와라 뚝딱! <얼굴 절반에 반창고를 붙인 이야기할머니>예요. 이 할머니가 왜 눈·코·입에 이만큼 크고 넓은 반창고를 붙이셨는지, 한번 들어볼까요?여러분, 반창고는 어떨 때 쓰는지 아나요? 몸에 상처가 났을 때, 그 위에 약을 바르고, 상처가 잘 아물 때까지 붙여두는 거예요. ‘씽씽이’(유아용 킥보드) 타다가 넘어져서 멍들거나 피가 난 적 있지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씽씽이를 타면서도 다칠 수 있듯이, 누구나 여러 이유로 다칠 수 있어요. 특히, 나이가 들면 다치기가 더 쉬워요. 오늘 할머니가 준비한 이야기는, 다친 채로 여러분을 만났던 이 할머니 이야기예요. 그럼, 이야기 속으로 출발!♬ 하나 둘 셋 넷, 이야기 시작~ 우리 모두 신나게 들어보아요. 귀는 쫑긋, 눈은 반짝 준비됐나요? 하나 둘 셋 넷! 출발합니다. 빵빵! (이야기를 시작할 때 아이들과 이야기할머니가 율동과 함께 부르는 노래)

김윤숙(65) 이야기할머니가 지난 12일 오후 서울 강서구 등촌2동 집 근처 쉼터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감사 편지’를 읽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할머니는 경기도 양주시에서 6년째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고 있는 구본예(67)라고 해요. 평생 주부로 살면서 손주를 돌보고 어린이집 도우미 일도 잠깐 했지요. 그러던 2014년 어느 날이었어요. 나보다 1년 먼저 이야기할머니가 된 동네 어르신께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셨어요. 이.야.기.할.머.니?! 1회 1시간(활동비 4만원)씩 주 2~3회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가서 이야기 들려주는 일을 한대요. 선발 공고를 본 순간, 심장이 ‘콩콩’ 스카이콩콩을 탔어요. 자격 요건이 ‘고정된 직업이 없는 만 56~70살 여성’이면 됐거든요(올해부터 56~74살로 확대). 할머니는 혼자 환호성을 질렀어요. “부엌을 벗어나 처음으로 내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역대 최고 경쟁률(7 대 1)을 기록한 올해만큼은 아니지만, 그때도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주눅이 들었어요. 2009년 처음 뽑기 시작한 이야기할머니의 인기는 유치원 원장 출신도 지원할 만큼 대단해졌거든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어요. 할머니 이름이 있었거든요. “만약 아이들이 이야기 듣는 태도가 좋지 않다면, 눈을 맞추고 목소리를 더 작게 내서 집중하게 만들겠다”고 ‘면접시험’을 본 게 할머니가 뽑힌 이유 같았어요. 비눗방울처럼 동그랗게 떠오르는, 기쁜 눈물이었어요. 눈물방울에 무지개 빛깔이 아롱지는 것 같았지요. 그렇게 할머니는 전국 유아교육기관 8천여 곳에서 활동하는 이야기할머니 2800여명 중 한명이 되었어요(올해 1000명 추가 선발).

 

67살 이야기할머니 구본예

암·대상포진 겪은 뒤 활동

입·코 돌아가고 얼굴 마비돼

“같이 웃어주는 할머니 아니라

미안해서 더 열심히 공부해요”

수업 뒤 한 아이 허리 끌어안고

“할머니 낫게 기도해주고 싶어요”

 

친구들, 무지개가 뜨기 전에 무엇이 내리나요? 네, 잘 알고 있네요. 비예요. 할머니도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가 그치기를 오래 기다려야 했어요. “기쁘고 설레는 마음과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교육을 받던 중, 림프종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림프종은 암의 한 종류예요. 항암 치료를 6번 받는 동안 머리카락이 빠졌어요. 그래도 암이 할머니를 막을 수는 없었지요. 몸은 완전히 지쳤지만 가발과 모자를 쓰고서 교육을 끝까지 받았어요.그때였어요. 암에 이어 이번엔 대상포진이 덮쳤어요. 대상포진도 코로나처럼 바이러스로 감염되는 병이에요. 대상포진에 걸린 할머니는 한쪽 얼굴이 마비되고 말았죠. 입과 코가 갑자기 돌아갔어요. 왼쪽 눈이 감기지 않았고,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게 돼버렸어요. “…아이들이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무서울까.”할머니는 그만 가발을 벗어 내려놓았어요. 그러고는 1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구본예 이야기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의 손편지들. 아이들은 순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써 할머니에게 주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이야기할머니 사랑해요”. 구본예 제공

 

이듬해 어느 봄날, 이야기할머니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활동을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연락을 해주었어요. 두려움으로 갇힌 마음이 살짝 열리자, 망설이는 마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어요. 할머니는 크고 넓은 반창고를 가져다 얼굴에 붙여보기로 했어요. 돌아간 눈과 코, 귀와 입을 최대한 당겨서 반창고를 붙여보았지요. “지금 여기서 멈춘다면 앞으로 희망은 다시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용기를 내어” 여러분을 만나기로 결심했어요.그런데 여러분, 용기를 냈다고 당장 용감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할머니는 너무너무 비참했어요. 속이 상했어요. 활동과 포기를 놓고 두 마음이 계속 다퉜어요. 할머니는 씩씩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천천히 기다려주기로 했어요.“괜찮고말고요. 제가 걱정스러운 것은 할머님의 건강입니다. 아이들과 함께하시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거든요.” 2015년 3월 떨리는 마음으로 첫 교실에 들어선 날,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은 “뜻밖에” 이렇게 말해주셨어요. 이어서 5살 반에 들어갔더니 어떻게 이해했는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이들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들어줬어요. 7살 반에 들어서니 질문을 해요. “이름표에 있는 사진이 할머니예요?” “아, 맞아요. 할머니 아프기 전의 모습이에요.”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본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이야기를 잘 들어줬어요. 이야기를 다 마친 뒤 교실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할머니를 쫓아왔어요. “저… 할머니 얼굴이 낫도록 기도해주고 싶어요.” 그 아이는 할머니의 허리를 끌어안고 큰 소리로 기도했어요.도르르 또르르르. 작고 투명한 풍선 같은 눈물이 자꾸 나왔어요. ‘이야기하는 삶’의 시작을 축하받은 듯한 날이었어요.

“초등학교 때도 만나요.” 2018년 이야기 수업이 끝나는 12월 ‘동하’ 어린이가 김윤숙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김윤숙 제공

“모르는 사람들을 이야기로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이야기를 듣고 사려 깊은 그림편지를 보내온 아이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아이들이 웃을 때 같이 웃을 수 있는 할머니가 아니라서 너무 미안했지요. 그게 할머니에게 더 열심히 이야기를 외우고 수업을 준비하게 만들었어요. 돌아간 입 때문에 발음이 어눌할까 봐 수십 수백번 이야기를 녹음해서 듣고 발음을 고쳐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여러분을 만나 자신감을 얻은 할머니는 더 많은 곳,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수업용으로 해마다 이야기 30여편을 새로 외우니 이야깃거리도 아주 많지요.특히 요양원에 가서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그대로 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어르신들은 ‘우리한텐 더 이상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데… 고마워’ 하시며 아이처럼 즐거워하셔요. 이렇게 “이야기 활동은 할머니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힘”이 되었어요. 하지만 할머니 얼굴은 병을 앓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한번 상처가 생기면 그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해요. 억지로 밝아지지 않아도, 반드시 이겨내지 않아도, 상처와 함께 다시 즐거움을 찾는 법을 배우는 게 늙어가는 일인지도 몰라요. 할머니에겐 그 과정에 ‘이야기’가 있었어요.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이야기할머니에게 모여드는 아이들. 김윤숙 제공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는 조그만 ‘마음의 약’이 되었어요. 중증장애 아동 어린이집에서 이야기를 들려줬던 김윤숙(65·서울시) 할머니는 처음 수업에 갔을 때 몹시 당황했어요. 아무도 할머니를 바라봐주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믿고, 매번 이야기를 한 뒤 헤어질 때마다 한명, 한명을 안아줬어요.” 말을 걸고 또 안아주는 할머니와 한 학기를 보낸 뒤,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어린이들이 이야기를 듣고, 심지어는 다가와 할머니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릴 만큼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한 거예요. _____________

 

이야기 둘, 이야기 짓는 할머니들

배꼽 손! 인사~!

여러분, 지난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나요?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할머니는 무엇을 통해 다시 자신감을 갖게 되었나요? ‘이야기’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네, 잘 알고 있네요. 자신감이란 ‘자신이 있다는 느낌’을 뜻하는 단어예요. 자신을 잃어버려도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얘기였어요. 이야기와 그것을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 두 가지가 있다면요.이 시간에 할머니가 해줄 이야기는, 제목 나와라 뚝딱! <내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할머니>예요. 옛이야기와 선현의 미담을 오늘날에 맞게 다시 만든 이야기를 공부하는 할머니들은 이제 글을 직접 쓰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해줄게요. 먼저, ‘월요일 가방’이라는 제목의 동시를 읽어볼까요?“학교 가방 놓고 피아노 가방 든다/ 피아노 가방 놓고 미술 가방 든다/ 미술 가방 놓고 글쓰기 가방 든다/ 글쓰기 가방 놓고 영어 가방 든다/ 영어 가방 놓고/ 꾸벅 졸면서/ 저녁밥 먹었다// 휴! 힘든 월요일/ 놀이터 가방은 왜 없을까?”(2019 서울 시민 창작시 공모전 선정)세상에, 놀이터 가방이라니! 그동안 어른들은 왜 놀이터 가방은 알려주지 않고 책가방만 알려준 걸까요? 이 발랄한 동시를 지은 김혜자(65·서울시) 할머니는 이야기 활동 3년 만인 2018년 등단해 가정주부에서 동시 작가가 되었어요. 이야기할머니들의 활동 전 직업은 가정주부가 가장 많아요(2015년 기준 48.1%). 할머니는 “처음 사회에 나가 내 일을 하게 되면서 느낀 것을 글로 쓰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 중에 어린이를 만났기 때문에 동시를 쓰게 되었지요. 써둔 시가 600편이나 있는 박정란(65·인천시) 할머니도 지난해 인천시 ‘미추홀구 문예대상’ 구청장상을 받으셨어요.

“예쁜 이야기할머니 생각 쑥쑥 즐거운 이야기” 아이들이 쓴 감사편지.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할머니들이 공통으로 꼽는 ‘가장 시적인 한마디’가 있어요. 바로 “예쁜 할머니”. 어떤 아이들은 “지난주보다 더 예쁘다고 해요. 우리 같은 할머니가 지난주보다 오늘 더 예쁠 리가 없잖아요.” 시적 허용이랄까? “들으면 웃음이 나지요. 말이 안 되는 말을, 아이들은 할머니들한테 해주거든요. 그런 존재가 너무 특별한 거죠. 이 나이에 어디서 그런 말을 들어보겠어요.”할머니에게 생겨난 변화도 이야기로 써볼 작정이에요.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낯선’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나서도 되는 사람”이란 생각을 처음 하게 됐거든요. 원래 평소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봐도 나서는 게 쉽지 않았어요. 입을 여는 자체가 어색했지요. 이제는 고민하지 않고 뛰어들어요. “제가 이것 좀 도와드릴까요?” 이 말이 두려움 없이 나와요. 이야기할머니가 되고 나서 아, 내가 도와도 되는구나, 그걸 알게 됐어요.노년기를 삼킬 것 같던 우울도 이제는 지나간 ‘이야깃거리’가 됐지요. “환갑이 지나 한동안은 방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했어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우울증은 더 심해졌구요. 그런데 2012년부터 이야기할머니 일을 하면서 우울이 사라진 거예요. 갈 곳, 만날 사람, 배울 것, 할 일이 생겼잖아요. 일단 이야기를 토씨 하나까지 외우는 게 급해서 우울할 정신이 없나 봐요. 한 이야기당 1500~2000자를 외워야 해서요.”(지마리아·73·광주광역시)“할 말도 없고 할 일도 없고 힘도 없는 할머니에서 지금은 아주 ‘거만한 할머니’예요. 제 배짱에 제가 놀란다니까요. 만약 이야기할머니 프로그램이 없어지거나 활동연한(2009~2014년 선발 인원은 10년, 2015년부터 5년)이 끝난다 해도 걱정이 안 되는 거예요.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지역 어린이집 찾아가서 봉사하면 되잖아요. 할머니들이 기쁜 이유는 딴 거 없어요.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줘요.”(조경연·66·서울시)

즐거운 모험 동화가 재밌었다는 어린이의 그림편지.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어릴 때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형편 탓에 대학을 가지 못했던 이복희(61·전북 군산시) 할머니는 “만학도가 되어 세월만큼 길어진 나이를 가방에 넣고” 49살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됐어요. 사회복지사가 되어 상담을 공부하던 중 이야기의 세계에 눈을 떴어요. 59살, 이야기할머니라는 ‘이야기 선생님’이 되면서 어릴 적 꿈을 이룬 셈이지요. 이때부터 할머니들의 독서모임을 꾸리고 글공부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최근엔 여러분과 만난 경험을 수필로 쓰고 있어요. “하나는, 훈계하기보다 ‘같이 하자, 도와줄래?’ 하고 의견을 구할 때 아이들이 변한다는 것. 두번째는, 사랑만 심어주면 나머지는 아이들이 알아서 깨닫고 자란다는 것.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마찬가지로, 일일이 다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여운은 아이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얘기”를요.이야기할머니가 되어 보니, 두번째가 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주로 나누는 이야기가 옛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창작동화와 달리 옛이야기는 주인공 수가 적고 줄거리도 단순한 편인데다 이야기 사이에 틈도 많아요. 그래서 누군가는 발달이 덜된 시시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틈은 바로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 상상의 몫이기도 하거든요.

 

78살 이야기할머니 최영자

딸 먼저 떠나보낸 뒤 남겨진

어린 손주들 그리워 활동 시작

“유치원 다니던 손주 다 컸지만 이야기 하는 할머니로 사는 한

그 또래 아이들 더는 잃지 않아”_____________

 

이야기 셋, 하늘에서 보낸 딸의 선물

배꼽 손! 인사~!

여러분, 할머니가 지난번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나요? 어린이집에 다시 가는 날, 놀이터 가방을 멜 거라구요? 와, 좋은 생각이네요!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매번 지난 이야기를 되새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그래야 여러분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서 ‘이야기를 직접 하는 사람’이 되거든요. 창조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이 시간에 할머니가 들려줄 이야기는, 제목 나와라 뚝딱! <하늘에서 보낸 딸의 선물> 이야기예요. 할머니 딸은 하늘나라에 살아요. 할머니가 예쁜 딸에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들어볼래요?저는 최영자(78) 이야기할머니예요. 전남 화순군에서 2012년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할머니에겐 여러분처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젖먹이 쌍둥이, 이렇게 세 아이를 두고 하느님 품으로 날아가버린” 딸이 있답니다. “그때 제가 69살이었을까요? 지금은 잊고” 살아서 나이조차 가물가물한 그때, 할머니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슬픔을 마주할 겨를도 없이 남겨진 손주들을 돌봐야 했어요. 아이 앞에서는 웃고 속으로는 눈물을 삼켰지요. 그렇게 2년여를 보낸 뒤 또 한번 생살 찢기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했어요. 사위가 새 가정을 꾸미게 되어 손주들을 데려가게 됐거든요. 그제야 서러움이 복받쳤어요. “이제는 정말 내 딸과 이어진 실오라기 같은 끈마저 끊어지는구나….” 하늘을 원망하면서 우울한 날들을 살아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한 지인이 이야기할머니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얘기해줬어요. “가슴에 묻은 딸보다 유치원에 다니던 손녀가 눈에 밟혔는데” 손녀 또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니 “천상에 있는 딸이 이 어미에게 보낸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북 안동시 태화어린이집 어린이들이 2018년 10월 ‘어서 오세요 이야기할머니’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합격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던지… 하지만 할머니는 좋은 만큼 내색을 못 했어요. “큰일을 겪은 뒤라 겸손해져야 할 것 같아”서요.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차분하게 인사했지요. 할머니는 손주들이 멀리 살고 있어서 보고 싶어도 자주 볼 수 없어, 대신 우리 친구들을 찾아오게 되었어요.이야기 활동을 한 8년 동안 손주들은 다 커버렸어요. 이제는 유치원 다닐 때 그 어린이가 아니에요. 할머니도 빠르게 늙어가요. 사랑하는 아이도 나도 변해가는데, 한 가지 신비로운 이야기가 변함없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그건,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없었던 손녀 나이의 아이들을 보고 또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이야기를 계속하면 그 또래 아이를 더 이상 잃지 않을 수 있어요. 이야기는 끝이 없어요. 이야기야말로 상실로부터 안전한 곳이지요.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요. 어쩌면 삶은 상실과 우울과 질병으로 가득하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해요. 세상이 순조롭기만 하다면 이야기 없이도 살 수 있겠지요. 우리에게 생긴 불행은 바꿀 수 없지만, 삶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꾸며질 수 있거든요. 삼년 고개>라는 옛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마을에, 여기서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고 해서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고개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한 할아버지가 거기서 넘어지고 말았어요. “아이고, 이 일을 어째!” 할머니에게 따뜻한 시루떡을 갖다주고 싶어서 다른 날보다 급히 걸었거든요. 걱정이 깊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이 나고 말았어요.어느 날, 옆집 아이가 찾아와서 말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삼년 고개에서 한번 넘어지면 3년을 산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두번 넘어지면 6년을, 세번 넘어지면 9년을 살 수 있잖아요.” 아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그걸 왜 몰랐지? 얘야, 고마워.” 할아버지는 기뻐하며 당장 삼년 고개로 달려가서 몇번을 넘어졌어요. 그 후로 삼년 고개는 원래 살아야 하는 나이보다 삼년 더 산다는 뜻이 되었대요. 할머니들의 삶도 ‘이야기 고개’에서 기쁘게 넘어지고 뒹굴며 의미가 바뀌어가요.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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