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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영국에서 일어난 유쾌한 사건 / 김영준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6. 11:00

[크리틱] 영국에서 일어난 유쾌한 사건 / 김영준

등록 :2020-05-15 16:37수정 :2020-05-16 02:33

 

김영준 l 열린책들 편집이사

 

지난달에 있었던 일이다. 코로나 봉쇄로 휴관한 영국 서퍽의 한 도서관. 당번으로 출근한 사서는 깜짝 놀랐다. 책들이 도서관 번호순이 아닌 책 크기순으로 꽂혀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대청소를 실시했는데 청소하던 사람이 서가까지 손을 댔던 모양이다. 본래 도서관식 배열이란 것은 스케치북만 한 책 옆에 명함 크기의 책이 꽂혀도 번호만 맞으면 신경 쓰지 않는데, 이런 모습은 미화원에게 무질서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 도서관답지 않게 가지런히 정리돼 버린 책장 사진은 화제를 모았다(트위터 하트 4만개, 댓글 2천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미화원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코로나 봉쇄 기간에 책으로 수만명에게 웃음을 주다니.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도서관에 한 번도 안 가봤냐는 둥, 총을 뽑고 싶다는 둥 재미없는 댓글도 없지는 않다. 사서는 말한다. “우리 미화원 아주머니는 멋진 분이세요. 도서관을 맡으신 건 이번이 처음인데 단지 최선을 다하셨을 뿐이라고 하네요! 당분간 휴관이 이어질 테니 책을 제자리로 되돌릴 시간은 충분합니다.”이야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코로나이다. 코로나 때문에 도서관이 쉬었고, 그 틈에 대청소가 있었고, 책 배열이 바뀌었고, 며칠 뒤 직원이 알게 되었고, 어차피 휴관이므로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뭔 일이 있긴 한데 급할 게 없다는 이 나른함. 영국은 현재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3만명을 넘어, 2차 대전 뒤 가장 큰 재앙을 겪고 있다. 재앙은 긴급함과 나른함을 동시 발생시킨다. 재앙은 일상을 파괴하는데, 보통 일상은 우리에게 휴식을 주기보다는 닦달하는 쪽이므로, 일상이 멈춘 틈에 뜻밖의 나른함이 생긴다. 케르테스의 홀로코스트 소설 <운명>에는 아버지가 수용소로 떠나는 날 학교에 결석계를 내러 가는 소년이 나온다. 가는 길에 소년은 봄날의 따사로움과 한가함에 태평해진다.이쯤에서 말해 둘 것은 책 크기순 배열이 그렇게 무식하거나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늦어도 11월에는>의 작가 노사크는 <장서 정리법>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여러 책 정리법들을 열거한 뒤 이렇게 말한다. 미적인 기준에 의한 배열, 즉 크기나 색깔, 장정에 따른 정리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코웃음을 치겠지만, 진지한 장서가는 이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고. 장서가는 경험을 통해 자기 책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자이다. 그는 질서의 훼방꾼인 책의 물성을 존중해야 함을 안다. 사실 도서관조차 책 크기순 배열을 차용한다. 대영 도서관의 폐쇄 서고에는 책이 크기순으로 배열된다. 공간의 효율을 뽑아낼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나는 사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도서관의 책이 어떤 원리로 배열되는지 약간은 알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책은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한권 한권에 제 자리를 주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원칙에 복종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주아주 많은 비효율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게 가능한 곳은 도서관뿐이다. (사실 도서관으로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들이 그렇게 책을 많이 버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집에서 공간을 그렇게 쓸 순 없는 일. 우리가 집에서 하는 모든 책 정리는 1차적으로 크기에 지배되는데, 이게 중력처럼 당연한 거라서 자각이 쉽지 않다. 주제나 취향에 따른 의식적인 분류는 그 조건 위에 2차적으로, 부분적으로 가능할 뿐이다. 책의 배열이 뉴스가 된 건 처음 본다. 코로나 덕인 것 같다. 이런 기회에 간만에 집의 묵은 먼지를 털고 책 정리를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1차적이든 2차적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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