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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야기할머니 ‘탄생 설화’…2000자 토씨까지 외우기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6. 09:43

21세기 이야기할머니 ‘탄생 설화’…2000자 토씨까지 외우기

등록 :2020-05-16 06:47수정 :2020-05-16 07:15

 

[토요판] 커버스토리
이야기 들려주는 할머니들의 세상

이야기할머니 전국 2800여명
한 이야기당 1500~2000자
매년 30여편 토씨까지 암기

이야기 외워 직접 들려줄 때
책 읽어줄 때와는 다른 경험
“아이 상상력의 공간 넓혀줘”
세대간 단절된 소통 복원도

 

“강소자 이야기할머니 2하끼(학기) 때 또 뵈(봬)요. 사랑해요♥” 서울 노원구청 직장어린이집 아이들이 이야기할머니에게 보낸 감사 편지.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한복, 일명 ‘케이(K)-드레스’에 ‘빨간 이야기 가방’을 든 여성 어르신.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읽고, 쓰고, 말하는 여자.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이하 이야기할머니)가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문화체육관광부 사업으로 2009년 30명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한 지 11년 만인 올해 2800여명(4월 기준)까지 활동 인원이 크게 늘었지요.

 

이야기할머니는 56~74살 여성 지원자 중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선발됩니다. 직업이 없어야 하고, 학력과 경력은 상관없습니다. ​면접에선 ‘아이가 실수했을 때, 이야기를 잘 듣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등을 묻습니다. 읽기, 말하기, 발음 등 언어능력도 봅니다.

 

최종 선발되면 ‘신규 이야기할머니 양성교육’(총 52시간)을 이수하고, 해마다 2회 ‘심화교육’을 받아야 이야기할머니 자격이 유지됩니다. 옛이야기 문화가 사라지다시피 한 오늘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만큼 이야기할머니들은 아이들의 인지 발달 과정, 이야기 구연의 이론·실습, 옛이야기의 특성과 의미 등을 교육받습니다. 아동폭력 예방 교육도 받고, 온라인 이용법도 배우게 됩니다.

“생각 쑥쑥 즐거운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구 강남유치원 아이들이 이야기할머니께 보낸 편지.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이야기할머니가 되면, 배정받은 거주지 유아교육기관(평균 3곳)에서 1년에 32주(방학 제외), 주 2~3회 이야기 수업을 맡습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무기한 연기된 상태인데, 강의할 때마다 4만원 정도를 수고비로 받습니다. 수업 시간은 1회 20여분으로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금세 주목한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한복을 입는 이야기할머니가 많지요. 1년에 30여편 이야기를 외워서 수업하는데, 이야기 한 편(1500~2000자)을 토씨 하나까지 암기하기 위해 종이에 수십번씩 쓰거나, 이야기 원고를 벽마다 붙이고 읽거나, 녹음을 반복합니다. 이야기 원고와 삽화 등 모든 수업 자료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제공합니다.

 

들려주는 이야기 목록은 동물이 등장하는 우화나 실존했던 선현의 미담이 주를 이룹니다. <토끼와 호랑이>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토끼가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넘는 이야기입니다. 호랑이는 강하고, 토끼는 영악스럽다는 고정관념을 버린 거지요. 도둑이 훔치러 왔다 자기 돈을 놓고 갈 정도로 가난했던 선비가 담벼락에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찾아가시오’라고 써 붙이자, 도둑이 달려와 잘못을 뉘우쳤다는 <도둑의 돈을 돌려준 선비 홍기섭> 이야기는 조선 후기 문신 홍기섭의 미담을 현대에 맞게 재가공했습니다.

“즐거운 모험 동화가 재밌었어요. 저도 친구를 도와주는 어린이가 될 꺼(거)예요.” 이야기할머니와 이야기 수업을 한 전남 무안군 오룡유치원 아이들의 그림편지.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이야기할머니는 이야기를 읽어주지 않고 반드시 외워서 들려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들려주기’는 ‘읽어주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들려주는 사람은 직접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읽어주는 사람은 이야기의 전달자에 머물고, 책을 통하는 만큼 말하는 사람(화자)이나 듣는 사람(청자)이나 기록물이라는 사물에 집중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가지는 다릅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읽어주기를 통해 듣는 것보다 들려주기를 통해 듣는 것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김숙희, <세대와 소통하며 시대를 횡단하는 이야기문화의 연행 양상>, 2015)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이야기 활동의 전부는 아닙니다. 학습지도안을 보면, 수업 과정은, 시작 인사 나누기→지난 이야기 되새기기(기억하기)→제목 보여주기→이야기 들려주기→내 생각 말해보기(질문과 답변)→‘이야기 노래’ 부르기와 율동→마치는 인사 나누기로 세분됩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살아남아 이야기가 되겠지요.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지난 이야기를 기억함으로써 삶에서 무엇이 지속되고 소중한 가치인지 깨닫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사고를 넓힙니다. 시작과 끝과 다시 시작이 있고, 노래와 춤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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