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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20. 02:47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등록 :2020-06-19 06:01수정 :2020-06-19 10:49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간 변경으로 떠밀린 이들 삶 복원한 기행
강상중 교수 “한국, 강한 사회-강한 국가 조합…상황 과소 평가 말아야”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사계절·1만3800원

 

지진 직후 구마모토현 마시키마치에서. 2016년 5월15일 기준, 구마모토현 지진 피해는 사망 49명, 지진 관련 사망 19명, 행방불명 1명, 부상 1664명, 주택 파손 8만 4817채, 피난자 1만 4340명에 이르렀다. 강상중 교수는 “재난이 닥쳤을 때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썼다. ⓒ 교도통신사·호리 마코토, 사계절 제공

 

“한국은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대처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의 강한 모습이 발휘되었습니다. 서서히, 하지만 분명 한국은 ‘강한 사회’와 ‘강한 국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이행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 상황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 자체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경의 지식인’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70)의 새책이 나왔다.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일본어판 2018년 발간)은 한국적 재일동포 2세 정치학자로 한일 양국에서 발언권을 가진 강 교수가 2016년 1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일본의 일간지들에 동시 연재한 기행문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한국어판 발간을 계기로 <한겨레>와 두번에 걸쳐 나눈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이 책이 “일본 근대의 그늘을 표상한다”고 말했다. “이 그늘로 다시 한번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일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과 제도의 존재방식, 과학기술과 경제시스템 전반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코로나의 시대’가 장기간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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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그림자와 분투하는 사람들

 

남쪽 나가사키현 군함도부터 북쪽 홋카이도의 노쓰케반도까지 일본열도를 종단하며 지은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을 살아낸, 아니, 그동안 버려진 백성의 발자취를 좇는다. 국가의 혼과 서구의 기술을 결합하는 ‘화혼양재’라는 구호 아래 근대국가로 변모한 일본은 제국주의로 치달았고 끝내 태평양 전쟁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참화의 끝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미나마타 공해, 후쿠시마 원전 폭발 같은 “묵시록적 사건”이 되풀이될 때마다 일본은 피해자를 쫓아내는 방식으로 통치했다. ‘선진국가 일본’ 안에 ‘후진 국민’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망령이었다. 비극의 원인을 찾기보다 “한갓 자연재해로 치부하고, 망각이라는 안전지대로 도망가서 희극적 일상을 계속하는 것이 일본 근대의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경제 번영과 문화적 자부심에 들떠 ‘국가주의’가 활개칠 때, 그늘에서 멸시받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인류학적 현장조사와 탐사 저널리즘의 정신까지 가미해 묵직하게 풀어냈다. 예민하고 엄격한 아카데미즘과 우울한 시대의 디아스포라적 정서가 함께 담긴데다 지은이의 경계적 정체성에서 비롯한 철학적 사유까지 더해져 보기 드문 깊이감을 선사한다. 강 교수는 1980년대 재일 한국인·조선인에게 강요된 지문 날인을 거부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런 강 교수에게 ‘버려진 국민’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변경을 몸에 두르고 사는 삶을 뜻한다.” 중심에서 거리가 먼 그는 스스로 “변경을 체현”한 사람이고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라 정의한다. 그럼에도 발터 베냐민을 인용해 그는 “변경적인 것, 사라진 것, 혹은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서 ‘희망의 불꽃’을 쏘아올릴 수 있는 능력을 찾고 싶었다”고 말한다.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에 건설된 방조제. 콘크리트 방조제 공사가 시작된 미야기현 게센누마시 해안은 트럭과 불도저의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재해 복구라는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결정된 총 공사비가 1조엔에 달한다. 여기에는 관치의 상명하달식 의사결정만 있을 뿐,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창조적 재생의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 교도통신사·호리 마코토,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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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들을 향한 멸시와 차별

 

“재난이 닥쳤을 때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본 그는 지진 같은 재난 시기에 특히 번성하는, 일본인 의식 밑바닥에 숨은 “빈자에 대한 윤리적 멸시”를 읽어낸다. 특히 독자들에게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은 부분도 “아시오 광독 사건”을 다룬 내용이라고 했다. 한때 아시아 제일의 구리광산이었던 이곳은 홍수가 날 때마다 흘러나오는 광독 탓에 사망, 사산 등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1901년 아시오 광독 사건을 천황에게 ‘직소’한 사상가이자 민중운동가 다나카 쇼조(1841~1913)가 “인민은 죽음으로 지킨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광산의 독물이 수도 도쿄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으려고 정부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주민들의 풍요로운 옥토는 저수지에 매장당했다. 정부는 강제 철거로 화답했고 사람들은 “소멸을 강요당했다”. 차별의 현장에서 강 교수는 사실상 “나환자 사냥”이었던 1940년의 혼묘지사건, 한센병 환자 자녀의 통학을 거부한 사건 등을 소환한다. 근대 일본이 나치 우생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든 ‘국민우생법’(1940)과 ‘국민체력법’(1940)은 열등하고 우등한 생명으로 국민을 분할해 다스렸다. 비대하게 자리잡은 ‘국가주의’의 현장, 변경의 기억과 역사를 직접 확인한 그는 ‘세계적 우경화의 시대’를 질타한다. “내셔널리즘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인 것이 그렇게 대단한가? 한국인이라서, 혹은 미국인이라서 그렇게 뿌듯한가? (…) 애국심과 내셔널리즘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것은 통치 시스템으로서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반성하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150년 동안 버려진 백성 위에 군림한 일본의 맨얼굴과 코리아타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더불어 살아가려는 바람을 짓밟은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와 낙인. “나태, 불령, 시기, 의심, 빈곤, 무지, 몽매, 열등, 범죄, 불결 등 이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속성”을 덮어씌운 자이니치 1세의 경험과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역설적이다. “코리아 포비아라고도 할 만한 혐한류의 확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류 열풍과 결합해 한국성·조선성을 돋보이게 했다.”

<고해정토>의 저자 이시무레 미치코와 함께. “자연의 유한성을 무시하는 태도, 자연의 힘을 과신하고 마음대로 행동한 결과가 미나마타병이다. (…) 미나마타병에 걸려서 차별이 생긴 게 아니라, 차별이 있는 곳에서 공해가 발생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 교도통신사·호리 마코토,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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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큰 흐름은 분단체제의 종언”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혐한, 코리아 포비아 분위기가 일본에 퍼질지 어떨지 아직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한국이 G11에 참여하게 되어 일본과의 경합관계가 선명해진다면 어떻게 될지 우려가 된다”고 답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G7 회원국이라는 점에 내셔널 프라이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포스트 아베’ 선두 주자로 꼽히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강 교수의 새책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를 읽겠다고 언급해 화제가 된 것에 대해 물었다. 한국에서는 이 책에 문재인 대통령의 대일정책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담겼다고 알려졌다. 이에 강 교수는 “문재인 정권은 역사적 흐름의 정통적 계승자”라며 “다만 김대중 정권 때만큼 일본에 대해 신경을 써주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한일관계를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으며, 제 책에도 이 부분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다”고 설명했다.“남북간 긴장이 고조되는 위기에 직면하더라도 역사의 커다란 흐름은 분단체제의 종언을 향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제 책의 취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권은 역사적 흐름의 정통적 계승자이며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레거시(legacy·유산)야말로 한국 국민의 총의가 드러난 것입니다. (…) 한편으로 한일조약으로부터 55년, 드디어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한반도와…>의 본문을 보면, 강 교수는 “한일기본조약은 견지되어야 한다”면서도 “그 후에 조약의 기본 이념이나 골격을 바꾸지 않고 시대와 함께 진화시켜 더욱 충실한 것에 접근해가는 상호협력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모두 해결 완료’라고 양국 정부가 합의했더라도, 1965년 시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와 2002년 북-일 평양선언에 담긴 사과와 반성 등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사죄의 뜻을 표해온 것은 기본조약 체결 시대와는 다른 역사 흐름에 대한 대응의 표현”이라고도 언급했다. 시대상의 변화를 고려한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메일 인터뷰에서 강 교수는 여러번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의 영향을 언급하며 “세계 대공황이라는 악몽이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은 분단체제 해소가 일본 국익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일본은 한반도 분단체제가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라 여기는 지정학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도 덧붙였다.“두 나라는 동아시아 지역에 다국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을 그 책(<한반도와…>)에서 가장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남북관계만이 아닙니다.” 북한이 개성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보내온 두번째 답변서에서도 그는 또 “현재 남북관계는 위기적 국면을 맞은 듯 보이지만 결코 비관할 정도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 위기도 일시적 반동이며 북한의 강경한 액션도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북한 나름의 신호”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도 “수미일관한 포용정책”을 당부했다. “북한은 지금 궁지에 몰린 상황입니다. 그런 북한을 더욱 궁지로 몰아붙인다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한국쪽에도 견디기 힘든 희생이 나올지 모릅니다. (…) 분명 문재인 대통령도 (이 땅에 두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남북관계 화합에 힘을 쏟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이메일 번역 노수경, 사진 교도통신사·호리 마코토, 사계절 제공

 

구마모토현 구마무라의 계단식 논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강상중 교수. ⓒ 교도통신사·호리 마코토, 사계절 제공

나가노현 하쿠바무라 하쿠바 스키점프장에서. ⓒ 교도통신사·호리 마코토, 사계절 제공

 

[강상중 교수 이메일 인터뷰 전문]

 

-코로나19 시대에 안부를 여쭙습니다. 이번 책의 한국어판을 내시게 된 소감을 간략히 부탁드립니다.

 

”‘코로나의 시대’는 100년 전 세계적으로 창궐한 스페인 독감보다 더 커다란 전지구적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동아시아 근대 150년의 역사를 새로 쓸 정도로 충격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다양한 역사적 장소와 사람들은 바로 이 150년에 이르는 일본 근대의 그늘을 표상합니다. 이 그늘로 다시 한 번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일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과 제도의 존재 방식, 과학기술과 경제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코로나의 시대’가 장기간에 걸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은 ‘강한 사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고 보셨는데, 어떤 이유입니까?

 

“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은 ‘유신의 그늘’입니다.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유신의 그늘’이라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유신체제’의 그늘이라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네요. 아직도 유신체제의 그늘은 한국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전후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어 독재와 군정지배를 겪은 뒤 새로운 독재를 만들어 내는 이데올로기 과잉의 혁명이 아니라 민중의 끈질긴 민주적 개혁을 통해 동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한국 국민의 역량에 기대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점을 달리하면 한국사회에는 퍼터널리즘(paternalism, 온정주의)적 지배/종속관계가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으며 격차와 차별이 해소되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독재의 숨을 끊어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앞으로는 38선 이북에 있는 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의하고 교조적 반공주의의 잔재를 제도와 의식의 면에서 불식시켜 나갈지가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한국은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대처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나라에 비해 사회의 강한 모습이 발휘되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국가의 강한 대처도 가능했습니다. 서서히 하지만 분명 한국은 ‘강한 사회’와 ‘강한 국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이행되는 중이라 생각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번 책을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결합이라고 보셨습니다. 역사의 어두운 현장을 탐방하는 ‘블랙투어리즘’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번 책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과의 왕복에서 생겨난 성과입니다. 후기에도 썼지만, 저의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신문이라는 미디어와 교도통신이 가진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널리즘의 축적과 인적 지원 없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습니다. 또 글을 게재한 곳도 교도통신을 매개로 한 지방지였음을 고려하면 이번 책은 ‘다크 투어리즘’ 이라는 장르보다는, 아카데미즘이 가미된 저널리즘의 장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은 교수님의 ‘날카롭고 엄격한 아카데미즘’과 ‘우울한 시대와 디아스포라 정서’의 결합이라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예리하고 엄격한 아카데미즘’과 ‘우울한 시대의 디아스포라적 정서’가 결합된 듯한 인상을 받으셨다면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제 본래의 의도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대외적으로 침략과 팽창의 길로 들어서서 한반도 등 이웃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실은 일본 열도 내부에서는 민중의 ‘생활 세계’가 국가와 신흥 기업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있었으며 그 ‘내국식민지’(內國植民地)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지점과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파묻힌 역사를 건져내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는 일반적인 한국 국민에게 친숙한 내용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국어판 출판에 의미가 있지 않나 합니다.”

 

-이번 책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읽어보기를 가장 추천하고 싶으신 지역은 어디이신지요?

 

”가장 추천하는 곳은 아시오광독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잊혀져가고 있어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환경문제와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면서 성립된 생산시스템과 지역 커뮤니티의 존속 문제 등 여러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아직도 한쪽에선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과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고, 한쪽에서는 학벌과 학력 서열화가 강화되고 대학 사회 구조조정이 강화됩니다. 이런 가운데 ‘사회’는 무슨 일을 도모해야 할까요?

 

”서구에 비해 동아시아는 시민사회가 취약하여 그 발달의 정도도 열등하다고 보는 언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참상을 볼 때, 최근 30년 동안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주의의 석권에 의해 의료와 복지, 공조의 제도적인 기둥이 썩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오히려 후진적이라고 여겨지던 동아시아의 국가에서는 전통적인 커뮤니티 의식의 잔재 때문인지, 감염증에 의한 치사자수는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고령인구의 사망자수가 눈에 띕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서구’=‘선진’, ‘동아시아’=‘후진’이라는 단순한 이항대립적 사고방식은 점점 그 효력을 잃어가리라 봅니다. 물론 이는 한국의 국민적인 자부심으로 이어지겠지만 현 상황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우리는 화폐경제를 중심으로하는 시장만능주의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본과 금융 중심의 세계화도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중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사회와 커뮤니티 안에서 수요충족을 도모하면서 IT 등을 통해 세계와 이어지는 시대가 되리라 봅니다. 그렇게 되면 의료와 실물 경제, 농업 등이 지금보다 커다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요? 또 서울처럼 거대한 도시로만 집중되는 현상도 점점 그 중요성이 저하되어, 분산형 사회로 이행해 가리라 봅니다. 어떤 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사태를 통해 지방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육에 있어서도 서울대학교나 유명 사립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대학과 교육기관의 서열도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사회가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 자체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코리아 포비아라고 할 만한 혐한 흐름이 약화될지 더욱 강화될지, 또는 어떤 효과를 낳을지 전망하실 수 있으실까요?

 

“‘혐한’, ‘코리아포비아’ 분위기가 일본에 퍼질지 어떨지 아직 분명하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또 미국을 중심으로 한다고는 해도 한국이 ‘G11’ 의 멤버가 되어 일본과의 경합관계가 보다 선명해진다면 어떻게 될지, 우려가 됩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회의(G7)’의 회원이라는 점에 내셔널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 지위를 한국과 나눠가져야 할 때, 일본 국내의 복잡한 국민 감정이 어떻게 될지가 걱정입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이자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한국은 역사를 ‘기념’하기보다 ‘역사전쟁’을 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역사전’은 한국같은 분단국가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국내의 38선이라고도 할 만한 역사를 둘러싼 분단은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치열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역사수정주의’는 한국에서 스필오버spillover하여 해협을 초월한 한일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가는 듯합니다. 이렇게 바다를 건넌 ‘역사수정주의’의 네트워크와 ‘역사전’의 연대는 한국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문제에서도 보이는 현상입니다.나중에 남북 관계가 보다 친밀해지고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자리매김에 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남북 간에 ‘역사전’이 전개될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평가와 자리매김은 결코 닫혀있지 않으며 영속적으로 열린 대화 가운데에서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전세계적인 커다란 흐름에서 보면, 현재 서구에서 빠르게 퍼져나가는 “Black Lives matter”운동이 보여주는 듯, 인종차별, 여성차별, 식민지주의를 ‘부끄러운 역사’로서 다시 보는 움직임이 보다 큰 힘을 얻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역사를 둘러싼 혼란이 있다하더라도 지구적인 규모의 흐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항상 열린 대화를 통하여 어떻게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고 자리매김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발간하신 책 <조선반도와 일본의 미래> 발간 소식이 국내에도 알려졌습니다. 보충해 첨언해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또한 남북 관계가 강경한 국면으로 치닫는 이 때, 조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추가로 주신 질문 두 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로 정리해서 회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나온 책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의 목적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과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구상을 제 나름의 언어로 바꾸어 일본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데 있었습니다. 통일은 단순히 두 개의 국가가 하나가 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코리아를 향한 긴 프로세스, 그 자체가 통일을 의미하며 이 ‘프로세스로서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히려 했습니다. 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남북의 평화공존을 도모하는 동시에 분단의 고정화가 아니라 분단체제의 지양을 목표로 하는 평화구축의 움직임은 이미 90년대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도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일본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사건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며, 민주화 달성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 바탕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는 위기에 직면하더라도 역사의 커다란 흐름은 분단 체제의 종언을 향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제 책의 취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권은 역사적 흐름의 정통적 계승자이며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레거시(legacy)야말로 한국 국민의 총의가 드러난 것이라 하겠습니다.문재인 정권은 김대중 정권 때만큼 일본에 대해 신경을 써주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한일관계를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으며, 제 책에도 이 부분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일조약으로부터 55년, 드디어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유신체제의 그늘’에 끌려다니던 한국의 정권과 그 시대의 한일관계를 바람직하다고 여기던 일본 간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볼 때 결코 대등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저는 항상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EU 에 속한 독일과 프랑스 같은 관계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코로나 이후, 혹은 코로나와 함께 하는 시대는 안타깝게도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미중간의 대립 구조가 꽤 오랫동안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아니 유라시아 대륙에서 불완전한 형태일지언정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 자유무역의 원칙을 견지하는 두 나라, 즉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면서 그 원칙을 철처하게 지키면서 미국과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대립에 휩쓸리지 않고, 아니 더 나아가 그 대립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방향으로 한일이 함께 협력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세계 대공황이라는 악몽이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오늘날입니다. 이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문제로 대립하는 소모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분단체제의 해소가 일본 국익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합니다. 일본은, 한반도 분단체제가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라 여기는 지정학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동아시아 지역에 다국간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이점을 그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자 했습니다.앞으로의 문제는 남북관계만이 아닙니다. 한국 내부의 ‘남남대립’을 지양하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안정된 남북이 어울어지는 교류의 폭을 얼마나 넓힐 수 있을지, 한국의 국내 정치가 향후 얼마나 성숙된 모습을 보일지 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현재 남북관계는 위기적인 국면을 맞은 듯 보이지만, 결코 비관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위기도 일시적인 반동이며 북한의 강경한 액션도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북한 나름의 신호라 보아야할 것입니다.강한 억지력과 타격력을 준비하면서도 ‘햇볕정책’이라는 포용정책을 통하여 북한과의 국면을 타개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문재인 정권은 얼마전 선거에서 공전의 국민 지지율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지지율에 얽매이지 않고 수미일관한 포용정책을 관철시키고 실행에도 옮길 수 있다고 봅니다.북한은 지금 궁지에 몰린 상황입니다. 그런 북한을 더욱 궁지로 몰아붙인다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한국쪽에도 견디기 힘든 희생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코 현명한 대응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김대중 전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만약에 그들이 도발을 하거나 떼를 쓰더라도 가만히 참고 달래야 한다. 적어도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썼습니다. 분명 문재인 대통령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이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남북관계 화합에 힘을 쏟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번역 노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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