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지에서 다산을 되살린 소실 홍임모
등록 :2020-06-19 06:01수정 :2020-06-19 10:06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1999년, 서울의 고서점에서 한시 16수가 발견된다. 이것저것 필사해 놓은 책 사이에 들어 있던 이 시 <남당사>(南塘詞)는 강진에 유배 와 있던 유명한 학자를 현지에서 보살폈던 첩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바로 다산 정약용의 소실 이야기였다. 해배된 다산을 따라 어린 딸과 함께 마재 본가까지 왔다가 ‘쫓겨나’(遭逐) 쓸쓸히 강진으로 되돌아간 그녀의 마음을 독백의 형식으로 풀어놓은 것이다.시의 작자가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을 숨기고 있는 형상은 등 뒤로 숨겨져야 했던 생전의 그녀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7, 8년을 함께 살며 아이까지 낳았지만 다산의 그 많은 글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구장·효순·삼동·농아, 태어나 만 2, 3년을 살다 간 ‘정식’ 아이들에게는 눈물의 표석문으로 부정(父情)을 전한 다산이지만, 총명함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그녀의 딸 홍임에 대해서는 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항간의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녀가 <남당사>로 인해 공식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시를 근거로 오늘 우리는 다시 그녀와 마주하게 되었다.강진 남당포 출신의 그녀가 초당에 왔을 때, 유배 10여 년 차의 다산은 심신이 위태한 상태였다. <시경강의> 12책 저술에 의욕을 쏟은 것이 무리였는지 수족과 언어에 마비가 왔다. 절망한 다산은 아들에게 준 당부의 글에서 오래지 않아 당도할 자신의 상장례를 의논하기까지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 조성되던 해배 분위기가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제자들이 돌아가며 식사 당번을 하지만 누군가 작심하고 섭생과 수발을 맡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 무렵의 상황을 전해주는 <매조도>에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어 나와 꽃을 다 피웠구나”라는 시가 있어, 소실과의 만남으로 다산의 스러져가는 심신이 되살아났음을 알 수가 있다. <논어고금주> 등 다산의 대표적인 저술들이 그녀를 만난 이후 쏟아지듯 나온 사실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그렇다면 그녀에게 다산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부모 연배의 다산과 인연을 맺을 생각을 했을까. <남당사> 속의 화자는 자신을 일러 “조관(朝官)을 지낸 분의 첩실”이라고 한다. 또 자신을 갈가마귀에 다산을 봉황에 비유하며 ‘천한 몸에 과한 복’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녀에게 다산은 “절대 문장에 특출한 재주, 천금을 줘도 한번 만나기 어려운 분”이다. 다산과의 인연은 누군가의 소개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강진 젊은이들의 사표가 된 다산이라는 거목에 대한 나름의 안목이 작용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고목에 날아든 어린 새’를 두고 돌아갈 생각만 하는 아이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하다. “해배되어 온 집안이 기뻐하는 그날”이 모녀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실 다산은 홍임을 생각하여 그리고 쓴 <매조도>에 혜포옹(蕙圃翁-다산을 가리킴)에게 준다는 부제를 붙여놓았다. 이렇듯 그에게 홍임 모녀는 애틋하지만 숨기고 싶은 존재였던 것이다.그러면 다산 소실의 심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남당사>, 누가 썼는가. 그리고 얼마나 사실을 반영한 것일까. 해제를 붙여 작품을 처음 소개한 임형택 교수는 소실의 사연을 잘 아는 강진 문인이 쓴 것으로 보았다. 다산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얘기인데 자신이 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매조도>의 수신자를 감춘 다산의 과거 행적을 참조할 필요가 있겠다. 반면에 정민 교수는 맥락적인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남당사>는 정약용의 작품이 맞고, 미안함 때문에 썼을 것이라고 한다. 다산의 문체를 분석하면 결판이 날 듯도 한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남당사>는 가족이라는 체제 밖에서 서성이는 한 여성의 속마음을 곡진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다산이라는 우리 사회의 상징 기호를 다각도로 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는 충분하다. 문제는 내용인데, 버림받은 여인의 정체성으로 슬픔과 비애의 삶을 예견하는 시인의 시선이다. 죽어가던 다산을 되살린 그 힘과 정성에 주목할 수는 없을까. 다산학을 이룬 한 부분으로 그녀의 존재를 재발견할 수는 없을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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