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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우고 새로운 시공을 열고 싶은 꿈, 달리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20. 03:05

세상을 지우고 새로운 시공을 열고 싶은 꿈, 달리다

등록 :2020-06-19 06:01수정 :2020-06-19 10:49

 

김훈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출간
“적개심과 야만적 폭력 이해할 수 없어”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음/파람북·1만4000원

 

신작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낸 작가 김훈. 1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야만은 약육강식의 문명”이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선의에 호소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고, 제도와 구속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김훈의 신작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불분명한 고대 세계를 무대로 삼는다. 나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대치하고 있다. 북서쪽의 초는 유목 문명에 기반한 나라이고 남동쪽 나라 단은 농경 정착 문명에 토대를 두었다.“초나라는 문자를 멀리했다. 사슴뿔 모양을 본뜬 글자가 있었지만, 가축이나 사람 수를 기록하는 정도였다. 왕들은 문자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을 금했다. 노랫말이나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고 반드시 외우도록 명령했다.”“단은 문자를 알았고 문자로 세상일을 적었고 문자를 받들었다. (…) 단은 글자로 가지런히 드러나는 것들을 귀하게 여겼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고, 그것들이 이루어지기가 더딤을 한탄하면서 많은 문장을 지었다.”

유목 문명과 농경 정착 문명을 가르는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문자와 기록이다. 소설은 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시원기>와 단나라 역사서인 <단사>를 바탕으로 삼아 후세의 서술자가 두 나라 사이 전쟁의 경과와 그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했다.“인간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대감, 세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그 야만적 폭력이 부딪쳐서 서로 무화되는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고대사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수백 년을 싸웁니다. 부처님의 자비를 말하는 불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택한 나라들이 서로 싸워야 했던 적개심의 뿌리가 무엇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1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북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언어의 한계와 폐해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의 앞선 책들에서 넉넉하게 드러났던 셈인데, 이번 소설에서도 그의 마음은 문자와 기록을 숭상하는 단보다는 그것들을 사갈시하는 초 쪽으로 기울어 보인다. 간담회에서 그는 “내 마음속에는 유목의 피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건조물에 대한 불신 같은 게 나에게는 있다”고도 했다.책의 후기에서 그는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라고 썼다. 간담회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시공을 열어보려는 소망이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인류사에 없었던 새로운 설정을 소설에서 해 보았는데, 결국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의 상상이 역사적인 시공을 벗어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생사는 명멸한다. 휘두름은 돌이킬 수 없고 물러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공과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칼과 창으로 맞서는 전쟁을 그리는 김훈의 문장은 그에 어울리게 냉혹하고 무정하다.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처럼 전쟁을 다룬 앞선 작품들은 물론이거니와 전쟁과 무관한 소설들에서도 그는 즐겨 군사적 용어와 어법을 구사하고는 했다. 그런 그이기에, “후퇴와 공격은 같다. 적에게 근접 거리를 허용하면서 끝없이 후퇴하라. 후퇴하면서 산개를 거듭하라”라든가 “개 떼들의 진퇴는 대오가 없고 군령이 없었지만, 그 무질서 안에서 싸움은 집중과 산개를 이어가고 있었다”와 같은 전투 장면 묘사는 익숙하고 자연스럽다.인간들의 싸움이 명분이 없고 야만적인 데 비해 그 싸움에 동원되는 말들이 오히려 품위를 지니고 자유와 생명의 편에 서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 흥미롭다. 인간과 말의 이런 뒤집힌 면모는 <걸리버 여행기>의 현자 말 후이넘과 야만적 인간 야후의 관계를 떠오르게도 한다. 가령 단나라 장수의 말이었던 야백은 인간의 호전성을 육식과 연결지어 이렇게 판단한다.“인간들은 고기를 즐겨 먹어서 피 냄새가 누렸고 똥 냄새가 구렸고 뱃가죽과 허벅지에 기름기가 많았다. (…) 냄새가 이러하므로 인간은 싸우고 또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야백은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말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작가는 16일 간담회에서 “십여 년 전 미국의 원주민 마을에 갔다가 어둠 속에 서 있는 수백 마리의 야생마들을 보면서 말에 관해 써야겠다는 모호하고도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초나라 암말 토하와 단나라의 수말 야백이 혼란스러운 전쟁터에서 교접한 뒤 잉태된 태아 유생은 초나라 사람들에 의해 태중에서 독살되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은 초와 단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 월에서 노쇠한 토하와 야백이 재회했다가 함께 쓰러져 죽는 장면으로 처리되거니와, 사람이 아닌 말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월나라 백성들은 두 강대국의 전쟁으로 속절없이 피난 길에 올라야 했는데, 월은 과연 어떤 나라였던가.

김훈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가상의 대륙 지형을 그린 약도. 파람북 제공

 

“월나라라고들 하지만 월은 임금이 없고, 군대가 없고, 벼슬아치들이 세를 걷어가지 않았으니 나라라고 할 수 없다. (…) 월의 백성들은 땅에 붙어서 살았지만, 땅에 금을 긋지는 않았다. 각자의 집 앞마당은 그 집 곡식만을 말릴 수 있었으나, 넓은 들의 소출은 나누었다.”이런 점에서 월은 아직 나라가 되기 전의 나라, 흡사 토하의 태중에서 유산된 태아 유생과도 같은 존재라 하겠다. 그 월에 관한 언급을 두고 책의 서술자는 “초원에 자리하되 초원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 안에 문장과 이야기의 씨를 뿌린 결과가 되었다고 나하 상류 산골 마을의 무명 서생이 평가했다”고 썼는데, 여기서 ‘무명 서생’이 곧 작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의심은 지극히 타당하다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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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가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북카페에서 열린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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