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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함께 추락하기 싫어…” ‘학출’ 노동자 부부의 냉정한 현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20. 03:41

“미안해, 함께 추락하기 싫어…” ‘학출’ 노동자 부부의 냉정한 현실

등록 :2020-06-19 05:59수정 :2020-06-19 09:25

 

자연사박물관
이수경 지음/강·1만3000원

 

이수경(사진)의 첫 소설집 <자연사박물관>에는 2016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표제작을 비롯해 일곱 단편이 실렸다. 일곱 작품은 단편으로서 독립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 이 책은 연작소설집에 해당한다.

 

연작의 주인공은 중년의 노동자 부부. 작품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긴 하지만 이들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같이 한 동지였고, 공장 노동자가 된 남편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가 두 번이나 해고를 당한다. 아내는 결혼 전에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음독까지 했으며 어머니는 결국 자살하고 만 아픔을 지니고 있다. 명문 외고에 진학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아들은 막상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업에 뜻이 없고, 딸은 고집스레 손발이 없는 사람을 그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거듭한다.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의 노조 결성 투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수경의 소설은 이른바 후일담 문학 계열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후일담 소설들이 지난 시절의 순수와 열정에 대한 다소 감상적인 회고를 특징으로 삼는 것과 달리, 이수경의 소설은 현재의 간난과 방황을 냉정하고 담담하게 기록하는 쪽에 가깝다. 표제작에서 아내는 “미안해, 함께 추락하기 싫어…”라며 남편의 투쟁을 말리고, ‘고흐의 빛’에서는 거실 책장에 꽂힌 <러시아혁명사>니 <제3세계 민중의 운명>이니 <노동자여 단결하라> 같은 책들을 보며 “저 책들을 읽고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민중의 운명이니, 단결하는 노동자 따위의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상념을 곱씹기도 한다. 남편의 거듭된 투쟁과 해고는 비극적 숭고미로 치장되지 않고 그저 생존의 불안과 공포로 이어질 뿐이다. ‘고흐의 빛’에서 딸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이유로 아내를 때리는 남편은 성장기에 아내가 목격했던 아버지의 폭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그렇다고 해서 이 연작의 부부가 절망과 파국으로 치닫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흐의 빛’에서 폭행당한 아내가 창밖으로 던져버렸던 베란다 창가의 조명은 다음날 아침 찌그러지고 망가진 채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있고, 때는 마침 “조명을 켜지 않아도 잠시 햇빛이 쏟아지는 시간이었다.” 이 빛은 어쩐지 ‘카티클란’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행길에 오른 주인공이 떠올리는 “마을 어귀에 떠 있던 불빛들과 등불”과 연결되는 것도 같다. 이 빛들이 부부의 앞날을 내내 밝게 비출지 아니면 다만 한때의 따뜻한 기억으로만 남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해 보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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