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또 하나의 가족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21. 07:39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또 하나의 가족

등록 :2020-07-20 13:43수정 :2020-07-20 13:55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1학년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코로나 블루로 지쳐가던 오월 어느 날 저녁, 급하게 전화 한 통이 울렸다. 동네 언니 릴라의 들뜬 목소리였다. “피노(나의 마을살이 애칭), 혹시 고양이 임보할래요. 하얀 유기묘인데, 급하게 임보할 곳을 찾고 있어요.” ‘임시보호라니까 기껏 이삼 주면 되겠지. 인기 많다는 페르시안 계통 하얀 품종묘라는데.’ 바로 승낙했다.하얗다던 아이는 더러웠다. 피부는 곰팡이로 얼룩덜룩했고, 털은 여기저기 뜯겨 있었다. 설사에 혈변 중이었다. 수의사는 한 살쯤 되어 보인다며 이것저것 약을 처방해줬다. 집에 오자 아이는 우리 부부 품에 꼭 안겼다. 자기 온 존재를 의탁하는 것 같았다. “이 어린 것이 살겠다고 이러는구나” 싶었다. ‘하 수상한 시절에 신기루처럼 온 아이’라는 뜻으로 하루라고 부르기로 했다.

 

며칠 뒤 중성화 수술 날, 하루를 구조한 고보협(고양이보호협회)의 캣맘 두 분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암컷이라 배를 절개하고 자궁을 떼내야 한단다. 하루가 수술에 들어가고 귀가한 사이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개복을 해보니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었고, 이미 중성화도 되어 있다고. 기가 막혔다. “의료사고 아니냐”며 따지려는데 수의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취 후 수액을 주사했는데 폐수종이 왔어요. 검사를 해 보니 비대성 심근증이 의심됩니다. 예후가 안 좋은 병입니다.” 이틀 뒤 확진을 받았다. 심장 기능이 악화되는 병인데 증상을 완화할 뿐 치료 방법은 없단다. 수의사는 1년 정도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캣맘 두 분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리 부부도 망연자실했다.그날 밤 남편은 새빨개진 눈으로 하루를 입양하자고 말했다. 나는 냉정해지려고 몹시 애썼다.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보기는 싫다고, 그 슬픔 애써 떠안지는 못하겠다고 도리질했다. 돌봐야 할 사람 존재만으로도 내 인생은 늘 허덕댔다. 하물며 머지않아 내 품에서 떠날 아이를 품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죽음을 품고 태어난 아이를 누가 품겠는가. 답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는 우리 가족이 됐다.사실 나 김 여사 그동안 동물에게 관심이 없었다. 냉정한 ‘인간우선주의자’라고 자처해왔다. 변화는 6년 전 서울을 떠나 수도권 외곽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됐다. 어쩌다 빠져든 마을살이는 난생 첫 경험들로 가득했다. 텃밭농사, 김장, 매실청 담그기 등 매번 새로운 세계였다. 삶의 경로가 달랐던 이웃들의 경험이 자연스레 내 속으로 들어왔다. 동물에 대한 감수성도 조금씩 열렸고, 하루도 그렇게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도서관 고양이 듀이>는 미국 중서부의 쇠락한 시골 마을 스펜서의 공공도서관 도서반납대에 버려진 고양이 한 마리로부터 비롯된 실화를 담은 책이다. 고양이는 십진분류법을 따서 듀이가 됐다. 듀이는 노인들의 무릎 위에 올라가서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지친 실업자에게는 웃음을, 무기력한 아이들에게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듀이를 매개로 사람들은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아갔다. 도서관과 마을에 생기가 돌았고 연대가 진전됐다. 2006년 11월, 듀이가 위종양으로 안락사했을 때 200여개의 신문에 부음 기사가 실리고, 도서관에는 애도의 편지가 쏟아졌다.듀이처럼 하루도 마을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웃 몇 명이 얼마 전 온라인에 ‘하루네 집’을 만들었다. 하루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집이자, 하루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의지하기 위해 만든 집이다. 하루가 아프면 시간 나는 이가 병원에 데려가고, 우리 가족이 며칠 집을 비우면 직접 와서 밥도 주고 똥도 치우고 놀아준다. 십시일반 해서 하루 통장도 만들었다. ‘공동육묘’의 세계로 진입하는 중이다. 하루의 대모 릴라 언니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지만, 우리는 한 마리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서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걸 실천하는 중이야”라며 대견해했다.마을살이 덕분에 나는 ‘무릎 아래 작은 이웃’을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가족도 생겼다. 느슨하지만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다. 하루는 ‘신기루’처럼 왔지만 ‘루비’처럼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 고마워, 하루!

 

* 코로나19 이후 ‘로컬’ ‘마을’이 뜨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는 모두들 더 멀리, 세계로 뻗어 나갔다. 반면 마을 생활은 내 안의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채워가는 경험이다.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은 서울 근교에 살면서 서울 직장을 오가는 중년 여성이 마을살이를 하며 경험한 소소한 사건과 관계들을 담을 예정이다. 진솔한 이야기를 위해 필명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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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김여사의 어쩌다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