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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고인이 생전 외쳤던 그대로 / 류영재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21. 08:30

[세상읽기] 고인이 생전 외쳤던 그대로 / 류영재

등록 :2020-07-19 16:39수정 :2020-07-20 13:31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권력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권력이 행사될 때 공동체가 그것을 권력행사라고 쉽게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권력이 쌓아 올린 인습은 부당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이런 점을 뒤늦게야 깨닫게 된 일화가 있다.

 

벌써 10여년 전, 판사 초년 시절의 일이다. 1~2개의 재판부마다 재판부의 행정적인 업무 내지 기타 잡무를 보조해주시는 직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직원의 업무는 상당히 애매했는데, 각종 스캔이나 행정적 서류 전달, 전화 응대 등의 보조업무, 재판부로부터 실비를 받아 탕비실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어떤 직원들은 더 나아가 판사들의 사적인 업무, 예컨대 은행 업무나 각종 사소한 심부름 등을 맡아 해주시기도 했다. 당시는 이러한 직원들의 업무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판사들과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몇몇 직원이 판사들의 사적인 업무 처리는 직원들의 행정업무보조에 속하지 않으므로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예전부터 요구하던 일이니 으레 그러려니 하던 판사들은 당황스러워하며 자기 재판부와 다른 재판부를 비교하거나 행정보조업무란 무엇인가를 두고 토론하곤 했다.당시 나는 한 선배 판사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 “지금 판사실에 배치된 행정보조 직원은 로펌으로 치면 비서에 해당한다. 비서는 자신이 보조하는 대상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업무시간에 발생하는 비업무적 사안을 대신 처리해주고 보조해주는 것을 역할로 한다. 따라서 만일 판사가 업무시간에 은행이나 편의점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긴다면 행정보조 직원이 대신 다녀오고 처리해주어야 한다.” 듣고 보니 참으로 그럴듯했다. 판사가 재판 준비하기도 바쁜 업무시간에 택배를 받으러 당직실에 다녀오거나 편의점에 가 물건을 사다니. 이 얼마나 낭비인가!!!그 말을 듣고 나는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행정보조 직원께 내게 온 택배물을 수거해달라고 ‘명령’했다. 그분은 처음에 거절했다. 하지만 나는 재차 강하게 ‘명령’했다. 그분은 정말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선 택배물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체의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내린 명령이 그 자체로 부당한 권력행사였음을 10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이 지면을 빌려 그분께 사죄드린다.직장에서 이루어지는 부당한 권력행사 중 특히 성을 매개로 하여 인권침해를 낳는 유형이 있다. 상급자의 업무를 공사 구분 애매하게 보조하길 요구받는 여성에게 자주 발생하는 유형이다. 성차별적인 권력행사와 그로 인한 인권침해에 대해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으레 그러려니, 친근감의 표시려니, 그걸로 상급자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감수하는 것도 보조직의 업무려니, 그런 정도의 인권침해는 사회생활에 따라붙기 마련이라느니. 그런 시기에 상급자에 비해 현저히 약자였던 자가 인권침해를 고발하기란 보통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그때 그 고발을 해낸 자가 있었다. 고발한 피해자를 변호한 이가 있었다. 그들과 연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고발은 마침내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법의 영역으로 들여놓았다. 직장 내 성희롱이 위법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낸 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 고발은 모든 근로자에게 성적으로 안전한 근무환경을 제공할 사용자의 의무를 법적인 것으로 정립시켰고, 우리 사회에서 ‘직장 내 로맨스’로 포장되던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명백한 성범죄로 인식시키는 토양을 제공하였다.고발한 피해자를 변호했던 그이가 바로 그 고발을 당한 채 세상을 등졌다. 남겨진 자들은 여러 상념 속에 혼란스러웠다. 피해자만 남은 상태에서,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고인에게 제기된 의혹을 마주한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사실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고인이 생전 외쳤던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직장 내 성폭력(성희롱 포함)을 ‘로맨스’나 ‘통상업무’나 ‘친근감 표시’로 치환하지 않는 것.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피해의 경중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죽음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것. 공정하고 철저한 진상규명 절차로 나아가는 것. 고발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온전한 피해회복과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것.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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