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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암 환자를 만나고 [박완규]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23. 20:42

직장암 환자를 만나고

 

 

 

 

 

 

 

어제는 직장암 말기인 분과 긴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의 어머니께서도 직장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분의 한숨 섞인 말이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분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가족이 이해만 해준다면 정말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가족들에게 할 수가 없으니 더 힘들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분의 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그러셨거든요.

 

직장암 수술을 하게 되더라도 부위가 좋지 않으면 인공항문을 따로 만들어서 옆구리에 호수를 차고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여자였거든요. 결국 어머니는 끝까지 수술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날마다 어머니 약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암에 좋다는 약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지 찾아다녔스니다.

 

어른들이 암에는 참빛나무가 좋다고 해서 그 나무를 찾아 깊은 산 속을 헤매기도 하고, 바위손이 좋다고 해서 험한 바위산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독을 지닌 독사를 잡아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좋다고 해서 독사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산에 들어가면 배낭 가득 어머니 약에 쓸 약재들과 독사 몇 마리를 잡아서 내려왔습니다. 이 약재 말고도 어머니 몸에 좋다는 약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덜컥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놔두고 어떻게 어머니 곁을 떠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제가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어서 날마다 주사도 직접 놔드려야 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탈영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야윈 몸으로 마루에 앉아서 짐승 같은 울음으로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저는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했습니다 .

 

그렇게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고 20일 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입대한 후에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지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병이 길어지니 오히려 투지가 더 생겼습니다. 어떻게든 어머니 병을 낫게 하겠다는 투지 말입니다. 직장암 투병을 하면서 죽고 싶다는 그분을 뵙고 어제는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벌써 36년이나 지난 일인데 말입니다.

그분이 하루빨리 쾌차하기를 기도합니다.

 

박완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