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내 손으로 밥을 지어주고 싶다-소설 [오승재]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25. 08:46

내 손으로 밥을 지어주고 싶다-소설

은혜 추천 0 조회 8 20.07.19 08:5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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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내 손으로 밥을 지어주고 싶다.

 

 

 

임봉녀 할머니가 백두산두만강 국경지대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여든다섯도 넘은 할머니였지만 북한의 국경지대라도 가보고 싶다는 임봉녀 할머니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그 아들 김길상이 동행한다는 조건으로 이 여행에 참석시키기로 했다.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아들을 만난 임봉녀 할머니는 다시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 하고 기대했으나 기회가 오지 않자 죽기 전에 이북 국경지대라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6·25 때 실종된 아들을 만난 것은 꿈과 같은 기쁨이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요 수년간 영영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그녀를 더 안타깝게 했다. 아들에게 자기 손으로 밥 한 끼라도 따뜻이 해주고 싶다는 것이 소원이었다. 생사를 확인했으면 전화는 어려울지라도 이제 서신이라도 교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감옥에 있는 죄수도 검열을 통해 서신을 교환하고 사식을 넣어 줄 수도 있는데 왜 다시 만나면 안 되고 안부도 전할 수가 없는가?

그러나 국가에서는 남한만도 이산 가족 수는 767만 명에 달하며 직접 분단을 경험한 이산가족 수도 123만 명이나 되어서 이들에게 공평하게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주려면 한 번 만난 사람에게는 다시 만날 기회를 줄 수 없다는 것이 통일원의 방침이었다.

임봉녀 할머니는 자기는 다 늙어서 쓸모가 없으니 이북으로 보내 주면 죽기까지 아들에게 밥이나 지어주고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쪽에 있는 아들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게 되었으며 함께 지냈기 때문에 50여 년을 만나지 못하고 몽매에도 잊지 못한 아들 곁으로 자기를 보내 주면 되지 않겠는가? 자기 같은 사람에게 사상과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또 인간은 살고 싶은 데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살 만치 산 노인이 누구의 눈치를 보고 묶여 있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었다.

 

1.

임봉녀 할머니는 나이에 비해 훨씬 건강하였다. 그래서 인천에서 심양을 통해 연길까지 비행기로 여행하는데 아무 탈이 없었다. 그녀는 평생 외국 여행이라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행기도 남편이 살아있을 때 제주도를 가보고 이번이 두 번째 비행기 여행이었다. 그러나 멀미도 없이 젊은 사람 못지않게 건강하였다. 심양에 와서 시간이 남아 한국인 거리인 서탑에 가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거리가 한국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간판이 한국어였고 상점, 음식점 등이 한국과 같았으며 그곳 사람들은 다 한국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북한에 있는 자기 아들도 이곳에 와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가끔 와서 함께 살며 따뜻한 밥도 자기 손으로 지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625 때 그가 떠난 뒤 행여 집으로 들어올까 해서 문도 잠그지 않고 놋그릇에 밥을 담아 털실로 짜서 만든 그릇 덮개로 씌우고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놓고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그 아들은 성질이 급해서 싸움을 잘하고 그럴 때면 늘 제 아버지께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고개 하나를 넘으면 있던 큰댁에 피해 있었는데 그녀는 아들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남편의 독특한 처벌 방법 때문에 아들을 데리러 가지도 못했다. 남편의 분노가 가라앉기까지 기다리면서 반찬과 국물을 남겨놓고 가서 달래어 데려온 뒤 따뜻한 밥을 하고 국을 데워서 따로 차려주곤 했었다. 남편은 칠 남매 중에서 왜 그 애만 그렇게 미워했던 것일까? 아마 그가 자기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625가 되자 그는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똑같이 사랑했지만 제일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던 아들이 이렇게 멀리 떠나 버린 것이다. 임봉녀 할머니는 어떻게 하면 그에게 자기의 한결같은 사랑을 전해 줄 수 있을까 하고 늘 안타까워했었다.

그녀는 그가 칠십 리 떨어진 초등학교 교정에서 인민군 훈련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갓난아이인 딸을 업고 걸어가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만나고 싶은 일념으로 거기까지 걸어갔는데 수중에는 돈도 없었고 그를 빼내 올 계책도 없었다. 그냥 쳐다보면서 건강해야 한다.’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행여 자기라도 그곳에 가 있으면 가족들이 덜 다칠까 봐서 그리한 것이 분명했다.

휴전되고 포로 교환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신문의 명단을 다 뒤졌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철수 도중 사망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임봉녀 할머니는 그의 생일마다 미역국을 끓였다. 그때 가족 중에서 웬 미역국이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뒤 그녀는 가끔 먼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꿈을 꾸었는데 돼지들이 홍수에 마구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돼지를 가까스로 구해내서 잘 먹여주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은 돼지띠였다.

임봉녀 할머니는 자기가 죽기 전에 그 아들을 다시 한번 만나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탑의 이곳저곳을 그 생각만으로 걸어 다녔다.

어머님, 참 잘 걸으시네요.”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걸음은 잘 걷지라우.”

그녀는 미소하며 짧게 대답했다. 같이 가고 있던 아들도 그냥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버스비를 아껴서 삼십 리 길을 걸어 시장에 갔고, 올 때 짐이 무거울 때만 버스를 탄, 그런 전형적인 시골 어머니였다.

 

2.

연길 공항에는 연변 조선족이 한 사람 안내인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이 모임은 한중 문학 세미나로 중국 작가협회가 한국의 기독교 문인협회 회원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임봉녀 할머니는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저녁 리셉션에는 참가해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 여행객이라면 잘 들린다는 <해당화>라는 음식점이었다. 이 음식점은 북한이 경영하는 음식점으로 북한 여인들이 호스티스로 한복을 입고 식당에 나와 노래도 부르고 손님 접대도 하므로 북한에 가볼 수 없는 한국 여행객들이 북한을 방문한 것 같은 대리 만족으로 이곳을 잘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 호스티스들에게 무슨 특별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여러 가지 물어보지만,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지식 이상으로 이북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착실히 달고 나와 북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임봉녀 할머니는 이상한 광경을 본 느낌이었다. 북한처럼 그렇게 꽉 막혀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렇게 호화로운 음식점을 중국에서 경영할 수 있는가? 이곳에 나와서 장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 그 종업원으로 이곳에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 아들은 왜 이런 사람들 속에 끼어 나올 수는 없는가? 이북에도 자기 손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애들도 이곳에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부모의 소식을 직접 들을 수도 있을 텐데…….

아들은 어머니를 붙들고 설명하기에 바빴다. 이런 음식점은 다 나라에서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훈련된 당원들을 보낸 것일 거다. 종업원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곳에 나온 요리사들은 다 기술자들이다. 기술이 없는 형이 어떻게 요리사로 같이 나올 수 있겠는가? 또 설령 기술이 있고 딸들이 예쁘다 할지라도 남한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성분이 불량하다고 배제되었을 수도 있다. 그곳에서 무사히 잘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날 수 있는 길은 누군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일인데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에 과학기술대학이 설립되면 초빙교수로 누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이나 중국 등 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면 모르지만, 한국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세계적 석학이 아니라면 입국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가뜩이나 어머니는 갈 수가 없다.

대개 이런 설명이었다.

어머님은 백두산이나 두만강 변을 지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할 수 없다냐?”

그분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오래 사셔서 통일을 기다리는 수밖에요.”

 

다음날은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주석 등이 참석한 한중 세미나가 열리는 때였다. 그동안 임봉녀 할머니는 일행이 주의 시킨 대로 호텔에서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방으로 날라다 주는 식사를 하면서 방안을 뒹굴뒹굴하였다. 아니 뒹굴뒹굴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3.

다음날 백두산을 향할 때는 날씨가 흐렸다. 맑은 날에도 백두산은 그 신령한 자태를 잘 나타내지 않는다는데 흐린 날씨로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4시간 남짓 달리는 동안 여러 가지 북한 이야기가 나왔다. 안내로 왔던 조선족 시인이 장황하게 북한의 어려운 사회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가 가장 어려울 때였는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쌀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 산에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은 고사했다. 나무껍질은 삶아도 삶아도 너무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어 삶다가 꺼내어 방망이로 두들기고 다시 삶고 이러기를 몇 번 한 뒤 다음에는 양잿물을 넣어서 부드럽게 한 다음 먹는다. 젊은 부부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얘들 기르다가 먹지 못해 먼저 죽고 노부부와 애들이 다음에 죽었다. 어딜 가도 굶어 죽은 사람들의 사체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국경감시자가 좀 소홀하게 생각하는 어린애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중국 땅에서 구걸하고 돌아와 끼니를 이었는데 이런 길거리를 헤매는 꽃제비들이 무수히 많았다. 살 수가 없는 처녀들은 안내자에게 돈을 주고 두만강을 건넜는데 두만강은 수심이 낮아 가슴에 와 닿을 정도인 곳도 많다. 그러나 국경경비가 심해 안 볼 때 해치우고 볼 때는 날래게 숨는 빨치산 수법을 써야 한다. 어떨 때는 굶으며 몇십 리를 걸어야 하고 도강한 뒤로도 중국 공안에게 붙들리지 않기 위해 낮에는 숨어 살고 밤에만 행군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큰 도시에 와서도 친척이 있으면 몰라도 그러지 않을 때는 한족(漢族) 집에 팔려가 성폭행을 당하고 드디어는 다른 곳으로 팔려가 또 노리개가 되고 노동하며 짐승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다가 중국 공안원에게 붙들리면 도강 죄로 북조선으로 송환되는데 그때에는 맞아 죽거나 병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민족 반역자 새끼>라는 매도와 함께 구둣발과 각목으로 피투성이가 되게 얻어맞고 종래에는 농포집결소라는 곳에서 강제노동을 시킨다. 붙들려온 여자 중 임신한 자들은 반역자가 <중국 씨종까지 배어왔다>고 욕하며 발길로 배를 차서 하혈하고 죽는 경우도 많다.

안내원은 자기가 북한에 있는 친척을 찾아간 이야기를 계속했다.

쌀을 가지고 갔더니 밥을 지어 내놓았는데 왜 그렇게 흰 쌀이 검은 쌀이 되었는지 처음에는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검은 쌀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파리 떼가 도망갈 줄 모르고 밥그릇 위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밤에 잠을 자려고 불을 끄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공수작전이나 하는 것처럼 빈대들이 천정에서 뚝뚝 떨어져 와 몸을 뜯어 먹는다. 진실만 말하고 거짓말 말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내가 보고 겪은 진실이다.

임봉녀 할머니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후려 파이는 아픔을 느꼈다. 어쩌면 그렇게 한 나라가 둘로 나누어져 틀리게 살 수가 있을까? 좀 나누어 먹고 살 수는 없을까? 어쩌자고 그곳에 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자기 아들은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고 술을 많이 마시나보다고 생각했다. 그 손은 못이 박히고 굳어진 늙은 농부의 손이 아니었던가?

 

화룡을 지나면서부터 비포장이었지만 울창한 원시림을 볼 수 있었다. 임봉녀 할머니는 젊어서 압록강 변의 목재들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그곳은 산림이 얼마나 울창한지 백두산부터 벌목을 시작하여 압록강 하류까지 다 베고 나면 다시 백두산에는 울창한 산림이 자라있었다고 동화처럼 이야기하던 그 압록강 변의 산림 이야기 말이다. 이런 산길을 지나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지나자 장백폭포가 보이는 백두산 마루에 도착하였다. 이야기로만 듣던 백두산에 도착했다. 운 좋게 날씨는 쾌청해졌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우산과 우비를 팔고 있었다. 아래쪽은 쾌청하지만 위로 올라가면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점심 후 그들은 백두산 등정을 시작하였다. 여기서부터 천지까지는 지프로 30분쯤 올라가야 하는데 길이 구불구불하고 운전이 거칠어 임봉녀 할머니는 안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일행들이 권했다. 또 올라가더라도 거기서부터 도보로 가파른 길을 올라야 정상에 갈 수 있는데 할머니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까지 왔으니 정상은 갈 수 없을지라도 그 가까이까지라도 지프로 가보겠다고 우겼다. 인솔 책임자는 불의의 사고가 있을까 봐 걱정했으나 끝까지 어른 말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위로 올라가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보슬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목욕재계하지 않은 등산객이 많아선지 영산은 그 모습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모두 지프에서 내렸다. 이 차들은 순서대로 서서 관광을 마친 다음 사람들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임봉녀 할머니는 비록 건강했지만, 비포장도로를 너무 거칠게 운전하여 달려왔기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임봉녀 할머니와 아들은 지프에서 등산을 포기하고 앉아 기다렸다.

돌아와서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유황 냄새나는 하류에서 뜨거운 물로 달걀을 쪄서 파는 것을 구경하고 또 사 먹곤 했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어서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보고 느끼는 광경 같았다. 이렇게 끝없이 꿈길을 걷고 가다가 갑자기 아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자면서 깊은 잠이 들지 않아 횡설수설한 꿈을 많이 꾸었는데 아들은 만나지 못하고 전혀 뜻밖에 친정 동생을 만났다. 그는 장남이라고 신학문을 했는데 어느 날 농사를 짓는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 두고 감쪽같이 땅을 팔아 그 돈을 챙겨 집을 나가버렸었다. 북간도로 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뒤로 소식이 끊어져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그 동생을 만난 것이다.

누님이 여기에 웬 일이십니까?”

자네는 지금까지 살아있었어?”

죄송합니다. 저는 불효자식입니다. 아내와 아들을 홀어머니에게 맡기고 와 버렸으니…….”

그래 살아있었어?”

그러면서 얼굴을 만지려 하는데 그는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동생이 나타난 것일까? 그는 살아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쯤이면 그도 80이 다 된 노인일 텐데 친척과 조상의 묘를 버리고 떠나 이 외딴곳에서 살아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죽을 때가 다 되어 저승 객이 된 동생을 만난 그것으로 생각했다.

 

4.

연길로 돌아오면서 그들은 용정, 일송정, 해란강 등을 돌아보았다. 일송정에는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한국의 독립투사들이 늘 그곳에 모여 회의를 했기 그 때문에 폭격했는데 그래도 소나무가 죽지 않아서 나무에 약을 주입해서 죽여 버렸다 한다. 지금은 그곳에 늦게 심은 작은 소나무 하나와 팔각정의 정자가 서 있었다. 일행들은 감격스러운 듯 멀리 보이는 해란강을 바라보며 선구자의 노래를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닌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1세의 망명 청년이 작곡했다는 것 때문에 더 가슴이 저리는 가곡이라고 말하며 일행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임봉녀 할머니는 전날 꿈에 보았던 동생을 생각했다. 그도 이 용정 바닥을 헤맸을까? 한국 농부들은 땅을 빼앗기고 광활한 농토가 있다는 북간도로 들어왔고 청년들은 징병을 피해 또는 항일 운동을 하다가 쫓겨서 이곳 만주로 왔다. 그리고 아예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한국에는 김좌진 장군이 일본 군인을 종횡무진 산을 누비며 섬멸했다는 전설 같은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독립운동의 고장을 돌아본다는 것이 꿈같고 신기했다. 아마 동생은 독립투사도 되지 못하고 억척같은 농군도 되지 못하고 그냥 떠돌이로 있다가 어디에선가 객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구한 운명들을 타고나서 왜 이렇게 가족의 사랑을 모르고 헤어져 살다가 죽는 것일까 하고 안타까웠다. 해방되어 살아있었으면 남한으로 가족을 찾아 내려올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마 금의환향할 처지가 되어있지 못했거나 이곳에서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힘이 없고 짓밟히며 사는 사람이 어떤 선택권이 있었겠는가? 만일 살아있었다면 그가 살 수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가족들을 끌어모아서 한 지붕 밑에서 살 수는 없다. 신의 돌봄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일행은 용정을 지나 도문으로 왔다. 도문은 두만강에 접경한 도시치고는 큰 곳이었다. 누군가가 조선 숙종 때 세운 백두산 경계비에 동은 도문으로 경계로 삼고, 서는 압록으로 경계를 삼는다.”라는 글귀가 있어 도문이 중국 도시가 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다는 고사를 설명했다. 어떻든 북한과 중국이 교역하는 도문 대교는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어서 세관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차 선으로 중앙선은 황색으로 북한까지 점선이 그려져 있었다. 여러 작은 강줄기들이 합해져서인지 두만강도 다른 곳보다는 수심이 깊고 강폭도 넓어 두만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봉녀 할머니는 이 강이 범람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강에서 돼지들이 떠내려갈 때 자기가 죽을힘을 다해 한 돼지를 끌어냈었다고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

중국과 북한을 잇고 있는 다리 중간까지가 중국 소유이고 그 남쪽은 북한 소유였다. 그 지점까지 키가 10척도 넘은 노란 기둥이 양편에 열 걸음 정도의 간격으로 서 있었고 그 꼭대기는 전등이 들어있는 우윳빛 유리 커버가 오므라진 호박꽃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다. 남쪽으로는 그 기둥이 더는 서있지 않았다. 마치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그 너머로는 북한 집들이 보였는데 그 어느 곳보다도 그래도 볼만한 마을이었다. 그쪽에도 국가 안전 보위부 사람인지 행인인지 몇 사람 걸어 다니는 그림자가 보였다.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되도록 최남단까지 걸어가 포즈를 잡았다. 한발만 남쪽으로 디디면 북한이라는 지점까지 걸어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가지고 사진을 찍으려고 각종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나고 중국 공안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니 임봉녀 할머니가 경계선을 넘어 남쪽 북조선 땅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벌써 몇 걸음 걸어가서 북한의 안전 보위부 사람이 그녀를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솔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그 할머니를 돌려보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는데 할머니와 보위부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밥 한 끼를 지어주고 싶어 임봉녀 할머니는 가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