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선교 - 콩트 2001년
은혜 추천 0 조회 10 20.05.14 10:5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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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북한 선교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어 호감을 주는 이 목사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깡마른 미국인을 안내하여 당회장실로 들어갔다. 탁자 앞의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그는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이내 사무원이 차를 내오고 그 곁에 흰 봉투를 성경 뒤에 숨기고 엉거주춤 서 있던 여전도회 회장에게서 봉투를 받아 들더니 선교사에게 건넸다. “이거 얼마 안 돼서 미안합니다. 요즘 북한 선교라고 해도 헌금들을 잘 안 합니다” 선교사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목사는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에 봉투를 꽂아 넣었다.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의 사례금을 드리는 것이었다. “3월에 북한을 다녀오셨다구요? 그래 뭐가 좀 변했습데까?” 중년 목사였는데 살도 찌고 틀이 잡혀서 손님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너무 추웠어요. 황해북도와 남도에 있는 사리원, 해주, 개성 등의 결핵 병원을 돌았는데 너무 추워서 환자들이 추위를 못 이겨 많이 퇴원해 버렸어요” “난방이 안 되나 보지요?” “난방이 뭡니까? 전기가 제대로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치료를 못 해요. 이번에는 방사선용 그리고 수술용 발전기를 3대쯤 사서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도대체 그렇게 어려우면서 왜 군사용 미사일은 개발하고 최신식 군사 무기를 사들입니까? 너무 미운 짓만 하니까 불쌍한 생각이 들다가도 그 생각이 싹 가십니다.”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느냐 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약이 없어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고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만 보일 것입니다. 이번에도 너무 추울 것 같아 담요를 선적해서 보냈는데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컨테이너가 평양 보건성 창고에 여태 들어 있었습니다. ” “미리 주면 안 되나요?” “글쎄, 우리가 지난겨울에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북쪽 사정으로 3월로 연기되었어요. 미리 배부해 달라고는 연락을 했는데 우리가 보는 데서 주어야 한다고 지금까지 안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때제때 혜택을 못 주어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이런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이 목사는 화제를 바꾸었다. “우리는 일제 시대부터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선교사나 그 후손들입니다. 지금 모두 은퇴했는데 우리가 선교하던 민족들이 이렇게 나뉘어 고통을 받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북한에는 대홍수가 나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린이와 노인들이 거의 얼어 죽고 굶어 죽었어요. 북한에는 지금도 노인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홍수도 물론 천재지만 나무를 무차별로 베고 산을 허물어 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들리는 바로는 산마다 김일성, 김정일 우상이 그렇게 많다고 그래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빌라도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놓아줄까,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줄까 하고 물었을 때 바라바를 원했지 않아요? 우리 인간들은 의인과 같이 살지 않고 죄인들로 살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이지요.” “목사님, 북한에 내는 돈은 창구도 애매하지만, 선교헌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더 어렵습니다. 실제 선교가 아니고 구제거든요. 그리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 돈이 전달되는 건지 그것도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북한 선교헌금들은 더 잘 안 내는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중국에 거점을 두고 탈북자를 훈련해서 북한의 지하교회로 침투시키는 일이 더 효과적인 선교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 목사의 지론을 듣고 미소만 짓고 있던 선교사는 말했다. “북한에도 관용 종교단체가 있습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같은 것이 그런 단체지요. 그런데 이 단체는 관용 단체지만 남한 사람들이 중국에서 이런 활동하는 것을 전쟁 포고만큼 싫어합니다. 그들은 지하교회에 목사가 침투하여 활동하는 것보다. 당장 죽지 않고 살게 해 주는 것이 더 급합니다.” 이 목사는 자기주장을 너무 한 것 같아 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 말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선교사님도 이렇게 애쓰시는데 피를 나눈 우리 동족을 돕는 일에 우리 교회가 협력을 못 해 드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번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의아하다는 듯이 목사를 쳐다보았다. 이 목사는 계속했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북한·미국 관계가 어려워지고, 또 남한의 경제 사정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15만 톤씩 쌀을 보냈는데 우리를 향해 욕한 놈들을 왜 돕느냐? 또 외화도 못 벌어들이면서 우리가 도와준 돈으로 무기를 사들이는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팽배해 있거든요” “돕고 싶은 마음이 먼저입니다. 강도를 만나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을 생각하십시오. 귀한 생명 때문에 측은한 생각이 든 것입니다.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약을 제대로 못 먹어 다제내성 결핵환자기 늘고있으며, 맑은 물이 없고 양질의 전기가 없어 수술을 제대로 못 하는 그들을 돕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결국, 돈이 있는 사람이 더 협조해야 하는데 현실은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대로가 좋은데 왜 도와주면서 통일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이 목사는 자기가 미국의 이민 교회를 다녔던 경험담을 말했다. 이민 교회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열심히 참석해서 신앙공동체로 살기를 원하는데 좀 오래 살고 부자가 되면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고 전화번호부에도 자기 이름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선교사는 말했다. “우리는 돈 있는 사람들의 후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손을 내미는 사랑의 후원이 필요합니다.” 이 목사는 자기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목사님, 한국을 돕는 그 재단에 한국인 이사가 끼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미국 사람들로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hristian Friend of Korea)'이라는 기구를 갖고 있습니다” “거기다 한국인을 하나 끼워 넣어 보세요. 모금이 훨씬 쉬어질 것입니다.” 미국인 선교사는 어리둥절한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국 사람이 끼어 있어야 이 재단에 헌금한다는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는 눈치였다.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왜 그렇지요? 꼭 그래야 한다면 제가 미국에 가서 상의해 보겠습니다.” “목사님은 한국인의 생리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기 이름이 끼어 있지 않으면 협력을 잘 안 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돕는 분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이 목사는 이 교회가 정말 북한 선교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사실 우리 교회는 몇 년 전부터 북한을 위해 기도하며 북한선교헌금은 적립해 오고 있습니다. 통일된 뒤 북한에 우리 교회의 이름을 가진 교회를 하나 세우기 위해서이지요. 지금 적립 중입니다.” 키가 큰 선교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사례금도 거기에 쓰시지요.”라고 하며 여전도회장이 가져온 봉투를 내놓았다. 목사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선교사는 잰걸음으로 당회실을 빠져 나왔다. 주차장에 와서 차를 타려 하는데 한 나이가 지긋한 자매가 어둠 속에서 선교사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많았습니다. 이것 좀 받아 주세요.” “뭔데요?” “며칠 전 빌려준 돈을 받은 것인데 지금까지 제 빽에 들어 있네요. 헌금할 돈을 뒤지다가 이 돈이 지금까지 여기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님께 드리라고 예비시키신 것 같아요.” 그리고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면 안 되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드리도록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동족들을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는 나이가 지긋한 자매는 황급히 사라져 갔다. 2001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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