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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동정도 숭배도 없이 존엄하게 [헬렌 켈러: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화신] / 조형근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28. 08:23

[세상읽기] 동정도 숭배도 없이 존엄하게 / 조형근

등록 :2020-07-26 16:33수정 :2020-07-27 12:17

 

조형근 ㅣ 사회학자

 

1912년 9월21일 <뉴욕 타임스>에 ‘경멸스러운 붉은 깃발’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깃발은 자유다. 하지만 혐오스럽다. 그것은 전세계에서 무법과 무정부의 상징이며, 올바른 시민들에게서 경멸받는다.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은… 무법의 상징을 든 탓에 존중받고 공감받을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붉은 깃발은 이 나라를 세운 원칙들을 파렴치하게 무시한다.”

 

같은 해 11월3일 <더 뉴욕 콜>이 반박 기사를 실었다. “나는 어떤 색깔의 천 조각도 숭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붉은 깃발과 그것이 나와 다른 사회주의자에게 상징하는 바를 사랑한다. 내 서재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붉은 깃발을 들고 타임스 사무실 앞을 즐겁게 행진하면서 모든 기자들과 사진기자들에게 최고의 광경을 선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발랄하고 신랄한 반박이다.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제목의 이 기사를 쓴 이는 헬렌 켈러다. 맞다, 그 사람.

 

헬렌 켈러는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화신이자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다. 세상을, 신세를 탓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녀를 보라. 눈귀 다 멀었으되 5개 국어를 했고 책 열세권을 썼다. 그녀처럼 ‘노오오오력’해서 스스로 희망의 증거가 되자.

 

그녀 자신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빈곤과 장애를 낳는 자본주의 고발에 평생을 바쳤다. <암흑의 바깥으로>(1913)에서 뉴욕과 워싱턴의 공장, 빈민굴 방문 경험을 회고했다.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도 방문했다. 물론 나는 그 비참함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냄새를 맡을 수는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코는 착취의 악취를 맡았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과 노동자 착취는 별개의 현실이 아니었다. 숭배받기보다는 함께 싸우려 했다. 그래서 존엄해졌다.

 

그녀는 미국 사회당의 당원이었다.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라며 1차대전에 반대했고, 볼셰비키 혁명과 스페인 인민전선정부를 지지했다. 사회당이 우경화하자 탈당해서 전투적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주류 사회에 점점 위험해졌다. 매체들은 그녀의 급진적 활동에 침묵으로 응수하면서 그녀의 삶에서 정치적 차원을 제거했다. 연방수사국(FBI)은 그녀를 평생 감시했다(인터넷에서 감시 파일을 찾을 수 있다).

 

헬렌 켈러에게서 정치적 삶을 거세하면 그저 ‘슈퍼장애인’ 이야기만 남는다. 손 없는 장애인 소년이 어린이 야구 리그에서 타율 0.486을 기록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들 말이다. <망명과 자긍심>의 저자 일라이 클레어는 말한다. 그저 자기 삶을 살고 있을 뿐인 장애인을 제 삶의 영감으로 둔갑시키려고 비장애인들이 슈퍼장애인에게 열광한다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인 그/녀도 그렇게 소비되곤 했다. 고교 시절 달리기를 할 때면 한참 뒤처져 꼴찌로 들어오는 자신에게 웬 낯선 이가 다가올 때가 있었단다. 고맙다며, 자기 감동에 복받쳐서 울고불고하면서. 일라이의 느낌은 “엿 같았다.” 숭배의 이면에는 동정이 있다. “동정에 오줌을 갈겨라.” 때로 그렇게 숭배하고 동정했다. 부끄럽게도.

 

동정도 숭배도 불평등한 관계다. 그래서 모욕이 된다. 차별 없는 평등이 답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장애인,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퀴어,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면서, 장애·환경·퀴어 운동을 하는 페미니스트,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다. 그/녀는 가난과 무지, 소수자 혐오의 대명사인 백인 남성 레드넥(Redneck) 사이에서 폭행당하며 자랐다. 고학력 중산층 출신 환경운동가, 퀴어활동가 동료들이 시골 노동계급을 돌대가리나 꼰대로 묘사할 때면 땡볕 아래서 붉어진 그들의 목을, 그 가난한 노동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교차해야 하고, 쟁점들은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중화되어야 한다. 서로 혐오해서는 존엄해질 수 없다.

 

헬렌 켈러나 일라이 클레어 같은 유명인은 없지만 한국에서도 혐오와 차별에 맞선 연대운동이 조용히 커왔다. 마침 국회에서 차별금지법도 발의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발의한 이래 민주당과 진보정당 계열에서 몇 차례 발의한 법안이다. 이젠 의석이 넘친다. 그런데 조용하다. 차별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개신교의 반발을 의식한다는 말이 들린다. 설마 싶다. 상처받아온 이들의 삶이 달렸다. 그들이 모욕받았기에 우리도 모욕받았다. 함께 존엄해질 기회다. 부디 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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