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안 읽었으면 더 떳떳할 텐데, 읽어서 면목 없습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8. 16. 03:28

“안 읽었으면 더 떳떳할 텐데, 읽어서 면목 없습니다”

등록 :2020-08-15 17:23수정 :2020-08-15 18:49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22. “독립적 판단했다”는 판사의 주장

이동원 대법관 사법농단 재판에 등장
친구 이민걸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통진당 재판 관련 행정처 문건 전해
이 대법관 등 당시 재판부 판사들
“문건 영향받지 않고 독립 재판했다”

재판 독립 침해 시점은 언제인가
임성근 1심 “독립해 판결, 무죄”
검찰, 판단 방향 담긴 문건 건넸고
읽어본 것 자체가 ‘의무 없는 일’

 

지난 11일 이동원 대법관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심 속행공판에 증인 신분으로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성실하게 증언하기 위해서 (재판에) 오게 됐습니다.”

 

지난 8월11일 오전 이동원 대법관이 일터인 서울 서초구 대법원이 아닌 서울법원종합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농단 의혹’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서다. 현직 대법관이 진행 중인 형사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건 유례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증인으로 출석한 다수 판사와 다르게 증인 지원 절차는 신청하지 않았다. 법원종합청사 5번 법정 출입구를 거쳐 법정으로 들어간 이 대법관은 재판부 호명에 증인석에 들어섰다. 고법 부장 시절 법원행정처로부터 재판 개입을 당했다는 의혹의 당사자로서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리면서 통진당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도 함께 결정했다. 2015년 1월 통진당 소속 국회의원 5명은 “국회의원 지위를 돌려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해당 사건은 2015년 11월 1심(각하)을 거쳐 서울고법으로 올라왔다. 쟁점은 두가지였다. △정당이 해산됐을 때 국회의원직 지위 상실을 판단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지 △판단 권한이 법원에 있다면 국회의원직 지위 상실 결정이 옳았는지다. 서울고법 행정6부 소속이던 이 대법관은 통진당 행정소송 항소심의 재판장이자 주심으로 판결문을 작성했다. 2016년 4월27일 판단 권한은 법원에 있고, 의원직 상실 결정이 맞다는 취지로 항소는 기각됐다.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통진당 행정소송 하급심에 개입하려 했다고 본다.(<한겨레> 2019년 9월21일치 10면) 판단 권한이 헌재가 아닌 법원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해 헌재와의 경쟁 관계에서 대법원 위상을 확인시키려 했다는 취지다.

‘불쾌감’ 느낀 35년 지기와의 점심

“고생 많았다. 얼굴 보고 식사나 같이 하자.” 사건은 2016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민걸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이동원 당시 고법 부장에게 연락해왔다. 이 대법관이 정기 인사이동으로 수원지법에서 서울고법으로 자리를 옮긴 뒤다. 이 대법관은 이민걸 실장과 사법연수원 동기(17기)다. 가족까지 알고 지낼 정도로 친한 친구이자 형이라고 했다. 보통 여럿이 같이 만나지, 일대일로 둘만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법부에 꾸려진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해달라고 부탁하려나, 짐작했다고 한다. 2016년 3월3일 이 둘은 서울 서초구 한 복집에서 만났다. 자녀들이 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다 이 실장이 통진당 행정소송 얘기를 꺼냈다. “법원이 본안에서 어떻게 판단하든지 그건 법원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법원에 그와 같은 재판권이 없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법원에 판단 권한이 없다는 1심의 각하 결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대법관은 그때서야 생각했다. ‘아, 이 얘기를 하려고 만나자고 했구나.’ 이 실장은 “기일은 언제 (지정)할 거냐”고 묻기도 했다. 이 대법관과 검사가 주고받은 증인신문 내용이다. “이민걸 기조실장이 그와 같은 말을 하자, 증인은 뭐라고 답했습니까.”(검사) “사건에 대해 제3자로부터 접근이 오면 판사는 긴장하게 되고, 그 사건에 대해 침묵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뭔가를 얘기했다면 ‘잘 검토해볼게요’ 정도 했을 수 있는데요,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이 대법관) “당시 이 실장이 왜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얘기했다고 이해했습니까.” “기조실은 법원의 정책 결정을 하고 기조실장은 법원 살림을 주도하니까요. 기조실장이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관계에 관심이 있나 보다 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민걸 실장은 10쪽 내외의 문건과 강현중 변호사가 쓴 <신 민사소송법 강의> 495쪽 복사본을 이 대법관에게 건넸다. 이 대법관은 사무실에 와서 문건을 읽어봤다. 문건에는 법원행정처가 정리해둔 판단 방향이 정리돼 있었다. ‘소 각하한 1심은 잘못됐다. 헌재가 이미 심판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된다. 헌재가 내린 의원직 상실 결정은 법원이 다시 판단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통진당 행정소송 1심이 진행 중이던 2015년 5월26일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서울행정법원의 수석부장판사를 만나 ‘법리 검토 문건’을 건넨 그 상황이 항소심에 이르러 인물만 바뀐 채 재현된 셈이다. 이 대법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외부에서 재판에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법원행정처는 오해받을 소지가 많습니다.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가 동료 판사에게 ‘이 사건 어때’ 의견 물어보는 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동료 판사가 내가 담당한 사건에 대해 ‘그 사건 어때’ 거꾸로 물어보면 불쾌합니다. 재판부가 법원행정처에 검토 자료 있냐고 물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법원행정처에서 거꾸로 하는 건 아니에요. 모든 것은 재판부의 의도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재판부에 접근하는 것은 절대 반대합니다.” 서울고법 행정6부는 만남 당일 오후 비로소 사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법 부장판사였던 이동원 대법관은 사건을 맡은 뒤 처음으로 이날 오후 3시31분부터 6시10분까지 네차례에 걸쳐 관련 사건(2018누68460)의 진행 내역을 조회하거나 1심 판결문을 찾아봤다. 합의부원인 윤정근 고법 판사(현 변호사)는 정당 해산과 관련된 논문 3편을 이날 오후 3시53분에 이 대법관과 또 다른 합의부원인 이인석 고법 판사에게 이메일로 공유했다. 그리고 3월30일로 변론기일을 지정하고 이를 소송 당사자에게 통지했다. ‘우연히도’ 모두 이날 오후에 벌어진 일이다. 이 대법관은 이 같은 ‘분주함’이 이 실장과의 만남과는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사건을 조회해보니 통진당 행정소송은 주요 사건으로 분류돼 있었고, 곧 지방선거가 다가오는 만큼 소송 당사자의 실질적 권리 구제를 위해선 하루빨리 판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통진당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법원행정처가 통진당 티에프(TF)팀을 꾸린 사실도 2년여가 흐른 2018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알게 됐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이나 그의 지시로 문건을 건넸다는 이민걸 기조실장은 동료 법관으로서 도움을 주려 한 것이고, 그렇게 건너간 문건도 판사가 살펴봐야 할 참고 자료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재판 독립, 어디서부터 침해됐나

법원행정처 판단 방향과 같은 내용의 판결을 내렸지만, 이 대법관은 ‘판결은 독립해 내렸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2018년 7월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김명수 대법원장 임명 제청)에서 통진당 행정소송 판결을 ‘자랑스러운 판결’로 꼽은 바 있다. 대법관 청문회 리허설에서 먼저 ‘행정처 문건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가장 고민됐던 공직선거법(192조 4항) 관련 설명이 없어서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 이은재 의원(자유한국당)으로부터 (재판 거래 의혹 관련) 질문 받은 것 기억하십니까.”(임 전 차장 변호인) “네.”(이동원 대법관) “‘재판 거래 아니다.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했고 국민 앞에 부끄러움은 없다.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판결과 관련된) 지시를 받은 적 없다’고 답했습니다. 사실입니까.” “사실 그대로입니다.” “재판 거래 아니라는 소신은 지금도 동일합니까.” “그렇죠.” 같은 날 오후에는 이인석 고법 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했고, 그 또한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부인했다. “행정6부에서 한 통진당 관련 판결은 필요한 모든 노력을 거쳐 합의해서 한 판결입니다. (…) 재판부에선 그 사건과 관련해 행정처에 의견을 물은 사실이 없습니다. 독립돼서 한 판결이었습니다.”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은 사법농단 의혹의 한 축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도입을 목적으로 정권에 협조하기 위해, 혹은 헌재와의 위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통진당 행정소송을 비롯한 일선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동기연·학연·근무연을 매개로 담당 재판부에 문건으로, 전화로, 법원행정처의 판단 방향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 개입을 당했다는 당사자들은 “소신에 따라 판결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재판 개입’ 의혹을 완벽히 씻어내기는 힘들다. 참고 자료, 판단 및 합의 과정을 하나하나 해체해 수년 전 내려진 결론의 연원을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당사자 진술에도 ‘외부 지시대로 판결했다고 공개 인정할 판사가 어딨냐’는 의혹은 가시지 않는다. ‘재판 개입’ 의혹을 받는 임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1심에서는 이런 취지의 증언이 무죄 판단을 내리는 데 주요한 구실을 했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일하면서, 세월호 침몰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당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 개입했다는 혐의 등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 독립을 침해당했다고 느껴본 적 없다”(최창영 전 부장판사), “배석과 합의해 결정했다”(이동근 부장판사)는 당사자 진술이 주요 근거로 받아들여졌고, “(이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법적 판단, 재판부 합의를 거쳐 독립적으로 판단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임종헌 전 차장이나, 임성근 부장판사 등에게 적용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공무원의 지시나 요구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그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결과로 나아가야 성립한다. 재판부는 임 부장판사의 직권남용 행위(재판 관여 행위)와 의무 없는 일(일선 판사 및 합의부 판단)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인과관계가 단절됐다고 봤다. 검찰의 논리는 다르다. 검찰이 주목하는 의무 없는 일은 시점상 그보다 더 앞서 있다.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단 방향이 담긴 문건을 건넸고, 이 대법관이 이를 읽어본 것 자체가 의무 없는 일이라고 본다. 담당 판사가 불공정할 것이라는 의심을 사는 것 자체로 재판의 공정성은 훼손됐고, 그 순간 이미 직권남용죄의 보호법익(국가 기능의 공정한 행사)은 침해됐다는 주장이다. 판결 내용에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는 따져볼 필요가 없다. 검찰이 주목하는 이 대법관의 증인신문 내용은 따로 있다. “이민걸 실장에게서 문건을 받았을 때 ‘찜찜했다’는 취지로 답변하셨습니다. 문건을 굳이 안 읽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검사) “안 읽어도 되죠. 그런데 제가 법률적 문제에 봉착했잖아요. 헌법 교과서에도 깊이 있는 언급은 없고, 선례도 없고요. ‘법원행정처에서 검토했으면 참고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해서 보긴 했습니다. 안 읽었으면 더 떳떳할 텐데, 그걸 읽어서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이 대법관)

두번째 현직 대법관의 증인신문

이동원 대법관에 이어 현직 대법관 증인신문은 또 한번 이어질 예정이다. 2016년 노정희 대법관은 광주고법 전주제1행정부 재판장으로,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을 맡았다. 이민걸 기조실장이 이동원 대법관에게 연락을 했던 그해 3월, 검찰은 당시 법원행정처가 노 대법관에게 부당한 압력을 넣었고 그로 인해 법관의 독립을 침해했다고 본다. 법원행정처에서 누가 노 대법관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그로 인해 문건이 전달됐는지, 노 대법관 쪽 진술과 관련자 진술은 엇갈린다. 노 대법관은 8월24일 열리는 임종헌 전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고한솔 <한겨레21>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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